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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5.10.26 06:58
부산의 시인
4. 안장현
고등학교 입시에 낙방하고 거기다 집안 사정도 여의치 못하자 중학교 졸업 이후에 다소 방황하면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할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간곡한 권유로 몇 개월 뒤 재수 학원엘 나가게 되었다. 그 학원에서 국어 선생님으로 만난 분이 바로 안장현 시인이다. 벌써 55년이 지난 일이라 별 생각나는 일은 없지만 그래도 몇 가지 기억들은 또렷이 남아 있다.
수업 중이나 걸을 때에 안 선생님은 항상 허리를 뒤로 재친 모습이 기억난다. 아랫사람이라면 건방지다고 꾸지람이라도 했을 정도다. 그만큼 도도하게도 느껴졌다. 거기에는 선입견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시인이다’라고 주장하는 그분의 이미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많은 시집을 낸 시인이다”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그리고 “내 수필집 『사랑은 파도를 넘어』 때문에 그 말이 많은 사람들에게 유행어가 되었다”라는 자랑도 하셨다. 나는 학원 강사들이 대부분 그렇듯 허풍이라고 생각했다. 시인이 얼마나 대단한 분인데, 서울이나 큰 대학의 별세계에나 있지 부산의 이렇게 조그마한 학원에 계실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연유로 안장현 선생님의 수업까지 크게 신뢰하지 못했던 것 같다. 대강 이 정도가 그때 필자가 느꼈던 그분의 모습이다.
그러나 필자가 문단에 나와 문인들과 교류하고 있을 때 우연히 어느 원로 시인으로부터 안장현 시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자초지종 그분에 대한 이력들을 여쭈어보았다. 그런데 허풍이라고 생각했던 당시 안선생님의 말씀들은 모두가 한 치 거짓 없는 사실이었다. 부산에 시인이 많이 없던 시절 그분은 교직에 있으면서 누구보다 활발하게 활동한 시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시는 한 때 시단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는 말씀을 듣고 새삼 안선생님께 죄송한 마음으로 그때 그 학원에서의 모습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안장현 시인(1928-2003)은 김해시 진영읍 출신으로 초등학교 교사를 역임하다 1954년 동아대학 국문과를 졸업했다. 그리고 부산 남성여고 교사가 된 이후 서울 무학여고로 잠시 자리를 옮겼다가 1963년 부산고등학교 교사로 다시 부산에 돌아온다. 그리고 이후 부산여자대학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게 되는데 그때 그 대학에서 많은 시인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70년대 중반부터는 서울로 올라가 중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정년퇴임까지 하게 된다. 안선생님은 교육계에서는 드물게 초·중등·대학의 교직을 다 섭렵하면서 교육자로서 한평생을 사신 분이다. 거기다 필자와 만난 계기가 된 학원 강의까지 경험한 특별한 교육계 이력의 소유자시기도 하다.
안장현 시인의 시는 한 때 순수, 참여시 논쟁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것은 그분의 시가 그 양면성을 다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6.25의 극단적 상황이나 군부독재가 판을 치던 시절에는 서정적인 시보다는 현실 인식이 강한 참여시 계열의 작품이 두드러졌고 사회가 다소 안정되었을 때는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서정적인 시가 돋보였기 때문이다. 그의 첫 시집 『어안도』에 실린 작품 중 「전쟁」은 당시 6.25를 다룬 전쟁 시들 중에서 단연 백미로 꼽힌다. 〈…적의 심장을 뚫었다는데/죽은 놈도/자빠진 놈도/그것은 나다〉(「전쟁」 중) 당시 조선일보는 이 시를 대서특필하면서 6.25 시 중 최고의 시라고 소개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학자와 시인들도 이 시를 외국어로 번역해서 소개했는데 구상 시인은 이 시를 영역해 「한국동란과 한국의 전쟁시」라는 제목으로 하와이 대학에서 강연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에 비해 「보다 낮은 목소리로」 같은 시들은 시인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아주 서정적인 시들이다. 지금 문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분의 제자들은 “안장현 선생님은 저항시인의 반열에 들기 어려운 아주 마음 여린 서정시에 어울리는 분”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그리고 안장현 시인은 한글 전용 운동가로도 업적을 남긴다. 그는 1956년 부산에서 『한글문예』를 창간했는데 이 『한글문예』는 최현배, 허웅의 한글전용 운동을 문학으로 승화시킨 데 큰 의의가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한글문예』는 그 뒤 『한글문학』으로 이름이 바뀌어 서울에서 계간지로 출판되었다고 하는데 전체 제작비를 안장현 시인의 사비에 의존하면서 통권40호까지 나온 뒤 출판이 중단됐다고 한다. 아무튼 필자가 고입 준비 기간 만났던 안장현 시인은 우리 같은 일개 조무래기 학생들은 감히 쳐다볼 수 없던 큰 시인이었다. 그런 시인을 ‘자기가 무슨 시인이라고 학원 강사 주제에’라고 감히 무시했던 그 시절이 정말 부끄럽다. “선생님 저승에서라도 용서해 주십시오. 새삼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