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부산의 시인들
작성일 : 2025.10.12 12:52
부산의 시인
2. 고석규
사람이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빨리 세상을 하직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얼마 전 작고한 개그맨 전유성을 두고 빨리 작고하는 안타까움을 토로하는 기사와 뉴스가 많았다. 그런데 우리 나이 77세, 이전 같으면 호상인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요절이란 글자의 뜻대로 정말 일찍 세상을 하직하는 경우다. 거기다 계속 살았으면 뭔가 중요하거나 큰일을 이루어냈을 전도 창창한 젊은이의 사망이란 의미가 더해진다.
대학원 박사과정에 들어갔을 때 지도교수와 몇 학생이 어울려 논문집을 하나 발간했다. ‘재부작고시인연구’의 부제를 단 『별은 아직 빛나는데』(1988, 아성출판사)란 서적이다. 논문을 준비하기 위해 필자는 여러 자료를 찾아보던 중 고석규란 시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지도교수에게 고석규 시인에 대해 쓰고 싶다고 했더니 대뜸 첫마디가 “고석규! 너무 안타깝게 요절한 시인이었지. 살았으면 최고가 되었을 텐데.” 그로부터 몇 달간 고석규 시인에 매달려 논문 한 편을 완성하고, 논문집이 다 되고 나서는 출판사의 도움으로 아리랑 호텔에서 거창하게 출판기념회까지 가진 바 있다. 벌써 40년이 다 되어 가는 일이다.
고석규는 1932년 9월 함경남도 함흥에서 출생했다. 함흥에서 고등학교를 나와 반공 지하운동을 하다 단신으로 월남했는데 6·25동란이 나자 즉시 군에 입대한다. 부친은 의사로서 6·25동란 전에 월남하여 군의관으로 복무 중이었는데 동부전선 어딘가에서 극적인 부자 상봉을 했다고 한다. 제대 후 그는 부산대학 국문과에 적을 두고 손경하, 하연승, 김일곤, 장관진 등과 동인 활동을 하며 『新作品』, 『詩潮』, 『詩硏究』, 『釜山文學』 등을 주도적으로 주재했다. 특히 그는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다감해서 그의 집은 항상 전쟁 중 문학도들의 숙소 같았는데, 그때 대구의 김춘수는 대학 강의차 부산에 들를 때마다 그의 집에서 묵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집에는 문학 장서 등 서적이 너무 많아 많은 문인의 도서관처럼 쓰이기도 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그는 1958년 부산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하고 그해 4월 부산대학교 국문과에서 강의를 맡아 후진양성의 꿈을 불태우기 시작한다. 그때의 의욕은 그의 글 여러 곳에 나타나는데 그러나 강의를 시작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4월 19일 아침, 26세의 안타까운 나이로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만다. 정말 전국의 많은 문인들에게 청천벽력 이상의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김춘수는 “한국 문단은 한 사람의 진정한 아카데미 상을 잃은 것이다”라고 했고, 김윤식은 “전후 비평문학은 고석규의 <파아란 傷花>를 조심스럽게 비켜가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안타까워했다.
고석규는 「映像」, 「破鐘」, 「暗城에서」, 「埋魂」, 「길」 등 여러 편의 시에서 그의 시인으로서 자질을 드러내고 있지만 더 큰 역할은 문학비평가로서 한국 문단에 남긴 기념비적 업적이다. 1957년 김재섭씨와 함께 2인 공저 『초극』을 간행하면서 본격적 비평 작업을 시작했는데 바로 그해 『문학예술』에 그의 평론 「시인의 역설」을 6회에 걸쳐 연재하면서 문학평론가로서 고석규를 본격적으로 알리게 되었다. 김윤식 교수도 “한국의 50년대 전후 문학비평 감수성의 발견과 그 전개의 역사는 고석규를 기점으로 하고 있다. 이 점에서 그의 비평 작업은 기념비적이라 할 것이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그의 사후 그가 남긴 대표적 평론인 「시적상상력」은 1958년 『현대문학』에 연재되었고 그리고 유고 평론집 『여백의 존재성』이 1990년 발간되기도 했다. 1993년 『오늘의 문예비평』에서는 『고석규 유고전집』 5권을 발간하고 전국 비평 문단의 유지를 모아 《고석규 비평 문학상》을 제정하기도 했다.
동래 명륜동 뒷산에 있는 고석규의 묘에는 지금도 그때의 문우들이 한 번씩 찾는다고 하는데, 묘 앞에 초라하게 서 있는 비석에는 이런 비문만 새겨져 있다.
「신이 나를 녹이는 것은 신의 필연이며 내가 신의 열을 빼앗는 것은 나의 행위이다」
<박홍배/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