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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5.09.22 02:05
<세상에서 가장 짧은 소설>
38. 가을비와 함께 지나가다
간밤에 가을비가 지나갔다.
그와 함께 뭔가 급하게 지나간 것이 있었다.
나는 아침부터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화두에 잡혀 있었다. 분명히 가을비와 함께 급하게 지나간 것이 있었다. 천천히 뒷산을 오르면서 생각해 본다. 뒤태가 예쁜 여자가 앞을 가며 자꾸만 생각을 방해했다. 눈길을 옆으로 돌려도 시계추처럼 제자리로 돌아왔다. 차라리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 앞질러 가면서 슬쩍 앞모습을 봤다. 그런데 여자는 모자에 마스크까지 온통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어쩌면 그 여자의 얼굴이 간밤에 지나간 것일까. 그러나 등산길 낯선 여자에게 얼굴을 보여 달라 할 수는 없었다. 김춘수의 ‘꽃을 위한 서시’가 떠올랐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얼굴을 가린 나의 신부여.
아, 고민은 산꼭대기까지 계속되었다. 여기저기 햇볕 좋은 곳에 벤치들이 놓여 있었다. 편한 자세로 앉으니 다시 화두가 꼬리를 문다. 차라리 아무런 생각을 않기로 한다. 그리고 고개를 뒤로 재껴 입을 크게 벌린다. 햇살이 입 안 가득 들어온다. 맛이 있다. 파란 하늘과 단풍 그리고 맑은 바람은 양념이다. 아차, 급하게 지나간 것이 바람이 아닐까 해보지만 그 역시 아니었다.
결국 산을 내려와 집 아파트 승강기에서 알았다. 더 정확하게는 승강기 속 거울에 비친 내 머리카락 새치를 보고 알았다. 그것은 ‘세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