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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5.09.15 08:09
26) 사선에 선 사람들
/조경호
‘등대원’ 하면 많은 사람들이 외로울 것이라, 생각한다. 고독의 대명사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고독이라는 것은 시공에서 느낀다. 일단 고독이라는 것은 일정 공간 속에서 느끼는 감정이다. 공간성의 고독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군중 속의 고독이요, 다른 하나는 나 홀로 고독이다.
첫 번째는 소통이 되지 않는 것에서 오는 고독으로 사람은 많으나 내가 문밖의 사람으로 취급되는 것이다. 따돌림 당하는 것이요, 시세 말로 왕따를 당하는 것이다. 갑자기 언어도 소통이 되지 않는 문화와 관습이 전혀 다른 어느 외국에 홀로 떨어진 느낌이 군중 속에서 느끼는 고독감이다. 또한 언어나 문화의 관습이 같다고 해도 따돌림을 당하면 외로움을 느낀다. 사회적 생활을 하는 인간으로서 가혹한 형벌과 같다.
그러나 두 번째는 문화와 관습에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 어느 다른 공간에 따로 떨어져 혼자라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감옥에 갇혀있는 죄수들도 형무소 내의 규정을 어기면 독방에 갇히는 벌이 내려진다. 그 사회의 무리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다. 이런 방법은 인간으로서 느끼는 외로움이라는 것이 큰 형벌일지를 대변해 주는 것이다.
고독은 인간 사회로부터 단절 내지는 소외된 상태다. 그래서 인간으로서의 두려움을 느낀다. 또 하나는 사랑을 주고받는 대상이 없는 절망감이다.
등대에서 고독감은 주어진 공간으로부터 시작되는 나 홀로 절망감에 속한다. 가족과 떨어져 정을 주고받아야 하는 대상으로부터의 소외감을 말한다. 마치 희망없는 일을 하는 시지프스 처럼 지옥의 산정에 거대하고 둥근 바위를 올려놓아야만 하는 희망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등대의 등명기를 계속 회전시켜야 하는 일 시지푸스가 돌을 굴려 올리는 일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산 것이 나의 젊은 날의 등대 생활이었다. 그러나 중년 이후 아이들이 다 독립하고 아내와 둘이 사는 때가 오면 정년이 다가왔다.
시지푸스의 형벌처럼 등대원이라는 직업은 가족과 헤어짐이요, 언제 다시 만나 함께 사는가 하는 것에, 기약도 없다는 점에서 같았다. 아이들이 교육 문제로 아내와도 자식들과도 헤어져야만 한다.
요즘은 ‘기러기 아빠’라는 신종의 이산가족이 생겨 났다. 그 기러기 아빠들은 자식에게 거는 성원의 외로움이 얼마 동안이라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견딘다. 등대원도 그러한 꿈으로 인식 전환이 필요한 직업이었다.
지금 등대의 등대 직원은 수십대 일의 경쟁력을 뚫고 들어오는 인기 있는 직업이 되었다. 그것은 등대원의 애로사항을 배려한 보상 정책과 국가공무원이라는 직업의 인기 열풍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등대원이라는 직업은 가족과 이산 문제 때문에 기피하는 직종이었다.
등대와 떨어질 수 없는 직업이 또 하나 있다. 도선사(導船士: pilot)라는 직업이다. 이 직업은 목숨을 담보로 한다. 그리고 도선사는 우리나라에 몇 명이 되지 않았던 보수가 괭장히 높은 전문 직업 중의 하나였다. 항만으로 입· 출항하는 선박을 안전하게 안내하는 사람들로서, ‘도선법‘에 따라 해양수산부 장관이 면허를 발급하며, 자격 요건은 대형 선박(6,000톤 이상)의 선장 경력(5년 이상)을 가지고 국가에서 치루는 시험(필기, 면접, 6개월 200회 이상 실습)에 합격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대형 선박이 각 항만에 입· 출항할 때는 강제 도선 구역과 임의 도선 구역이 정해져 있어 도선사가 승선 운항하여야 한다.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인천항 도선 구역은 팔미도 등대 앞에서 부도 등대, 선미도 등대 부근 해상에서 이루어졌다. 가장 많이 도선 하는 해역은 부도 등대 부근이었다. 그래서 도선사를 태운 선박(pilot boat)이 부도 등대 선착장에 자주 정박하곤 했다. 등대원이나 선원들은 도선사를 ‘파이롯트(Pilot)’라고 불렀다.
도선사는 눈보라 몰아치거나 비바람이 불거나 태풍이 와도 배가 들어오면 도선 배를 타고 나와서 선박에 로프 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리고 해야 한다. 도선사를 태우는 도선 배는 작은 보트였는데, 등대원들은 인천에 휴가를 나가거나 등대로 들어올 때 이 배를 자주 이용하였다.
도선사 소유의 pilot boat는 일반인들은 탈 수가 없었는데, 등대원들과 가족들은 이 배를 이용하게 해주었다. 인천지방해운항만청에 업무차 등대 보급선을 타고 인천에 나갔다가 다음날 돌아와야 하는 일정일 때는 선미도 등대에 들어가기 위해 덕적도행 여객선을 타고 와서 북리 선착장에서 용선료를 주고 빌린 작은 어선으로 들어와야 했다.
선미도 등대로 들어가야 하는 날 아침에 폭풍주의보가 내렸다. 이런 날씨에는 대 형 선박이 아니면 인천항 입·출항 허가가 떨어지지 않았다. 도선사를 태워야 하는 대형 선박이 입항하거나 출항할 때는 도선선(pilot boat)과 해군, 해경 경비 함정만 운항할 수 있다.
그날은 겨울이었는데 폭풍주의보가 내려져 덕적도 가는 여객선은 출항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연안부두 3잔교에 정박 중인 도선선을 찾아가서 오늘 입· 출항하는 선박이 있냐고 물어보니 10시쯤에 도선사를 싣고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으며, 부도 등대 부근에서 무역선에 도선사를 승선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들어가야 하는 곳은 선미도 등대이며, 부도 등대에서 선미도 등대까지는 1시간 20여분 운항 거리이다. 하는 수 없이 돌아가려는데 김 도선사가 도선선으로 왔다. 나와는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그 당시 인천항의 도선사는 6∼7명이었다.
‘조 대장님 지금 어느 등대에 계십니까‽
’지금은 선미도 등대에 있습니다.‘
’부도 등대에서 선미도 등대로 가셨군요‘
김 도선사는 내가 부도 등대장으로 있을 때 도선선에 가족들을 태우고 부도에 와 물놀이도 하고 휴식을 하였던 적이 있었다. 부도는 정말 한적한 곳으로 섬과 등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찾아오지 않는 낙도이다. 팔미도는 해변의 모래사장과 섬의 소나무 숲과 인천에서 가까워 여름철에는 관광지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지만 부도는 아주 작은 부채꼴 모양의 섬에 몽돌 자갈밭뿐이다. 사람들이 없기에 바닷가에서 가족들과 오붓하게 하루를 보낼 수 있어 좋은 곳이다. 그런 인연으로 알게 된 김 도선사는 다른 도선사들보다 더 가까운 사이였다.
’오늘 선미도로 들어가시게요.‘
’예 – 그렇지만 오늘은 부도 등대 앞 해역까지 도선 하시지요.‘
’ 그래요, 하지만 우리가 모셔 드려야지요.‘ 우리가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다 등대에서 고생하시는 조 대장님 같은 분이 계시기 때문 아닙니까‽
바람은 초속 20m였고 파도는 5m라 했다. 이런 날씨는 1만톤급 이상이 아니면 항해가 어렵다. 그런데 선미도까지는 어떻게든 가도 선착장에 접안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소. 일단 타시지요. 가 봅시다.
이렇게 바람이 불고 파도가 높은 날에는 선박을 갯바위나 모래 해변에 접안 하려다가 선박이 파도에 밀려 깨지거나 전복되는 경우도 있다. 김 도선사가 어서 타라고 권해서 하는 수 없이 도선선에 몸을 실었다.
연안부두에서 출발하여 팔미도 앞 바다쯤 나갔다. 바다의 물결은 산맥처럼 구겨져 있엇다. 바다는 물고랑과 물이랑으로 하얀 거품들 뿐이었다. 배는 목표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아니었다. 이층 높이의 집채같은 파도가 밀려오는 방향으로 고물(배의 앞머리)을 잡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배의 옆면을 파도가 쳐서 복원할 틈을 주지 않고 바로 다음 파도에 배의 밑창을 들이 받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배는 바닷속으로 거꾸로 처박혀 침몰할 수가 있다.
김 도선사는 지금 출발하자고 선원들을 재촉했다. 나를 먼저 선미도에 내려주고 부도로 와서 도선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팔미도도 지나지 않았는데도 바다의 풍랑이 이 모양이라면 부도 앞이라던가 선미도 앞은 더 험난할 것이다.
배의 고물이 하염없이 바닷속으로 곤두박질치는 것 같았다. 영원히 배 앞머리가 바닷속으로 기어들어 가는 것 아닌가. 어쩌면 이렇게 바닷속으로 들어가 나오지 못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바닷속으로 들어가다가 다시 솟아오를 때였다.
검은 하늘만 보였다. 바닷속으로 곤두박질치던 배의 고물이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물결이 갈라지며, 배가 하늘로 오뚝이처럼 바닷속에서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수 백톤의 바닷물이 폭포수처럼 갑판과 유리창으로 덮쳤다. 배는 물벼락을 쓰면서 바다에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배는 폭풍우 치는 바다에 혼자 자맥질을 하고 있는것이다. 살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늘 이건 바다에서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은 바다와 하늘, 파도 소리와 배의 엔진 소리, 이외 모든 것은, 신이 선택한 줄기에 매달린 것들이었다. 모두가 말이 없다. 조타 키를 잡은 선장, 김 도선사, 기관장, 갑판장 그리고 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선장님 선미도는 포기하십시오. 저는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조대장님 정말 미안하오. 이렇게 가다가는 부도 등대까지도 제시간에 가지 못하겠소. 선장 조대장님 말씀대로 다음 기회에 모셔 드리기로 하고 우선 도선할 해역에 시간을 맞춥시다.‘
’네 알겠습니다.‘
도선선은 북장자서 등표 옆을 통과하고 있었다. 북장자서 등표는 검은색에 중간허리쯤에 붉은 띠를 두른 암초 위에 세워진 원주형의 석조 등표다. 바람이 파도의 이랑을 말아 올리자, 물고랑으로 북장자서의 커다란 암초들이 포효했다.
흰 물거품이 바윗골 사이로 하얗게 솓아졌다. 북장자서 등표와 백암 등표는 정말 잘 지어진 항로표지이다. 파도가 수없이 두드렸어도 그 몸을 지탱하고 있으니 말이다. 또 암초 위에다가 그 몸을 지탱하였을 것이다. 지금의 공법으로도 어려울 것이다.
그 당시 인천항으로 들어오는 화물선은 3만톤급이 제일 컸다. 선박이 인천항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가장 깊은 수로로 들어오는데 장안서 등표 앞에서 오다가 부도 등대 서쪽 해역에서 침로를 변경하여 부도 등대 북쪽의 항로를 거친다. 이 수로를 동수도라 하며, 부도와 승봉도 사이에 있는데 부도 쪽으로 가깝게 붙어 있다. 부도 등대 서쪽 부리에서 700m 정도 된다. 그리고 화물선은 영흥도를 보고 직진하게 되면, 왼쪽에 백암 등표가 화물선을 인도하는 좌현 표지이다. 이 해역은 크고 작은 암초들이 산재하고 썰물 때 하얀 색깔의 암초가 들어나며, 밀물 때는 잠겨 선박을 인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흥도 서쪽 끝 뿌리에 들어서면서 북장자서 등표를 바라보고 운항하고 팔미도 남쪽 항로를 이용하여 인천항 항로에 들어서는데 북장자 등표는 암초군을 표시하는 장애 표지이다. 북장자서는 썰물 때는 암초가 들어나며, 밀물 때는 암초가 잠긴다. 이러한 위험한 암초 위에 1903년 6월 화강암으로 등표를 설치하여 현재도 원래대로 보전 운영되고 있다. 등표의 점검 정비는 항로표지선(인성호)이 수행하며, 북장자서 섬광 주기는 팔미도 등대와 식별을 위해 다르게 사용하고 팔미도 등대에서 감시하며, 백암 등표는 부도 등대에서 감시하고 있다.
팔미도를 지난 선박은 인천항 제1항로를 이용하여 연안부두 (남:홍색· 북:녹색 방파제 등대)및 갑문(남:홍색·북:녹색 방파제 등대)으로 들어가 화물을 하역하였다. 1974년(갑문 완공) 이전에는 작약도 및 월미도 앞 해상에서 하역하여 작은 선박으로 연안부두 (지금의 하인천 부근)로 운반하였으며, 제1선거에서도 접안 하역 작업을 하였다. 그리고 국· 내외 대형 화물선은 인천항에 입항하려면 인천항의 뱃길을 잘 아는 사람이 승선하여 항로를 인도하는 것은 국제적 관례이며, 이항만의 수로를 안내하는 사람이 도선사이다.
드디어 거대한 화물선과 마주했다. 부도 등대 서쪽 항로에서 승선하려고 했으나 파도의 놀이 높아 도선선이 화물선에 접근하지 못하고 부도 등대 앞 해역으로 왔다. 화물선 쫓아가는 도선선에서는 15놋트(시속 약 28km)의 속력을 냈다. 도선선 앞머리에 부서지는 파도에 배가 깨져나갈 듯했다. 파도를 가르는 배의 마찰은 대단했다. 이러다가 배의 엔진이 꺼지면 배는 물속으로 수장될 것이다. 도선선은 15놋트의 속력으로 화물선 옆으로 붙었다. 3만 톤급의 화물선은 이 정도의 너울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너울이 화물선의 옆면 붉은 철판에서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할 뿐이다. 너울이 화물선 옆에서 하늘과 바닷속을 들락거렸다.
도선선은 화물선의 철판에 더 붙지 못했다. 김 도선사가 도선선의 난간 파이프를 잡고 배를 더 가까이 붙이라고 손짓을 했다. 그는 죽음의 사선에 서 있었다. 화물선은 수면에서 갑판까지 높이가 20m는 되어 보였다. 물론 배에 실린 화물의 중량에 따라 수면에서 높이가 달라진다. 그런데 화물선에서 내린 사다리는 밧줄이 얼기설기 마름모꼴로 엮여진 그물 같은 줄 사다리였다. 화물선에는 대부분 사다리가 달려있지 않았다. 해적선에 의해 나포되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선박 옆에 사다리가 붙어 있으면 야간에 빠른 배를 이용해 접근하여 무장한 해적들이 화물선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도선선은 화물선과 거리를 1m 이하로 접근시키지 못했다. 왜냐하면 화물선의 옆면과 도선선의 옆면에서 생겨나는 파생 파도의 놀 때문이다. 도선선이 화물선의 옆면으로 다가가면 화물선의 선체 벽면에서 파도가 생겨 도선선을 자꾸 밀어냈다. 그런데 김 도선사가 도선선에서 화물선이 내린 밧줄과 1m 정도의 거리로 좁혀졌을 때 그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화물선의 선체 벽을 향해 몸을 날렸다.
30 여분 사투의 결정체였다. 그는 이제 거센 강풍과 싸우고 있었다. 그물코 같은 밧줄 사다리를 타고 20여m의 화물선 옆면 선체를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간 선체 난간에서 밧줄 사다리를 당기고 있던 선원들의 부축을 받으며, 갑판 난간을 넘어갔다. 그는 늘 그렇게 사선을 넘어가야 하는 직업에서 등대의 고마움을 아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