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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소설> 32.오소리族 

작성일 : 2025.09.08 02:52

오소리族  /박명호

 

<족제비과에 속하는 포유류, 유라시아 전역에 걸쳐 서식. 겉모습은 너구리와 비슷해 혼동하는 경우가 많음.>

오소리가 우리 생활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지금은 오소린지 너구린지 구별할 수 있는 사람도 거의 없을 것이다.

 

내가 오소리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성씨가 가여서 어릴 때 오소리란 별명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도 여기저기 이사를 다니면서 잠시 붙었던 것일 뿐 내가 오소리와 연관될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특히 퇴직 무렵 직장에서 슬그머니 그놈의 별명이 따라붙었다. 금연운동이 일어나고 담배를 끊는 추세가 거세져 내가 다녔던 직장에서도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극소수로 전락할 때도 나는 여전히 담배를 고집하고 있었으므로 가 성씨에 오소리별명이 붙은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그 별명은 내 시련의 전주곡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회 곳곳에서 흡연자(나는 애연가라고 주장한다)를 혐오하는 분위기가 심해지더니 급기야는 나의 보금자리인 가정에서도 내쫓기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지금의 나는 진짜 오소리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흡연자들은 갈 곳이 없다. 장애자도 각종 보호 장치들이 있는데 흡연자는 그 어디에도 보호 장치가 없다. 집에서도 담배를 피울 수가 없는 것은 물론이요, 냄새만 풍겨도 아내나 딸들이 난리를 친다.

최근에는 아예 담배를 끊지 않으면 이혼하겠다는 아내의 엄중 경고를 받았다. 아내의 경고는 말로만 하는 그렇고 그런 경고가 아니었다. 그동안 오래 참았고 더 이상 같이 살 수 없는 한계치에 와있음을 표정이나 태도에서 알 수 있었다. 게다가 퇴직 후 이렇다할 수입이 없는 나로서는 담배 없이 살 수 없는 내 입장만을 주장할 근거도 후원군도 없는 고립무원의 처지이고 보면 그야말로 죽지 못해 산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 피난처를 만난 것이다. 얼마 전 담배를 들고 일단 집을 나와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담배 피울 적당한 장소를 찾던 중 어디선가 아주 오래되고 익숙한 냄새가 흘러왔다. 그 냄새는 아주 가늘었지만 내 전신의 촉각을 끌어당기기에 충분했다. 9층 깊은 지옥 아래서 탈출구를 만난 기분이었다.

나는 그 냄새의 끈을 잡고는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골목 끝부분 5층 상가 건물이었는데 사람의 발길이 거의 없는 낡은 건물이었다. 냄새는 그 건물 지하까지 이어졌다. 나는 마치 보물을 찾는 고고학자처럼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문이 조금 열려있어서 살며시 밀고 안을 보았다. 백열등 하나가 불을 밝히고 있는 침침한 공간에 담배연기만 자욱했다. 거기에 뜻밖에 담배를 피우는 사람, 아니 오소리과의 동족들을 보았다.

안은 조용했다. 낡은 플라스틱 테이블 몇 개와 등받이 없는 의자들, 그리고 웅크린 채 멍하니 연기만 내뿜고 있었다. 서로에게 말을 거는 이는 거의 없었으므로 마치 판토마임 극 세트장 같았다. 오소리를 잡을 때 오소리 굴에 연기를 피워 오소리를 밖으로 끄집어내지만, 이곳의 남자들은 그 연기 속에서 그저 가만히 웅크리고만 있었다. 연기가 그들을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연기가 그들을 감싸 안아주는 듯한 아이러니. 그 속에서 그들은 어떠한 반항도, 어떠한 저항도 없이 그저 오소리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분위기는 무척 평화로워 보였다.

나는 한 구석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들처럼 허리를 구부정하게 웅크리고 담배를 피워 물고 연기를 길게 빨아 뿜었다.

, 내게 강 같은 평화를 외치는 찬송가처럼 천상에서 주는 평화와 안식이 속 깊은 곳에서 샘처럼 솟아났다. 이 사회 어느 곳에서도 결코 허락되지 않는 이 행위가 이곳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어둠과 연기는 모든 것을 평등하게 만들었다. 이곳에서는 누구의 가장도 아니었고, 남편도 아니었고, 그저 담배 한 개비에 의지해 웅크린 한 마리 오소리이지만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아주 소중한 이를테면 오소리들의 피난처라고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