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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
작성일 : 2025.08.31 11:12 작성자 : 김하기
백두대간 인문기행 76화
고개
구름도 자고 가는 바람도 쉬어 가는
추풍령 굽이마다 한 많은 사연
흘러간 그 세월을 뒤돌아 보면
주름진 그 얼굴에 이슬이 맺혀
그 모습 흐렸구나 추풍령 고개 - 남상규-
한반도 백두대간 덕유산을 벗어나면 소백산까지 유달리 고개가 많다. 고개가 많다는 것은 사람들의 이동과 왕래가 많았다는 뜻이다.
환웅이 이 땅에 나를 세운 후 삼천관리들이 백두대간을 오르내리며 문화를 전했고, 고개마다 애환과 수많은 사연이 서려 있다.
소백산 들머리까지 대충만 열거해도, 빼재 우두령 궤방령 추풍령 조령 큰재 이화령 하늘재 죽령 신의터재 지기재 개머리재 10개가 넘는다.
고개란 대간 마루금의 능선부에서 상대적으로 낮고 넘어가기 쉬운 길목인데, 고개를 높이와 험한 기준으로 영嶺 · 현峴 · 재 · 치峙 · 티 등의 접미사를 붙여 불렀다.
왜 사람들은 힘든 고개를 넘었을까? 인간의 본능이며 뭐가 새로운 희망을 찾아 백두대간을 넘었다.
흔히 우리의 인생을 고개에 비유하여 한 고개를 넘을 때마다 고비를 넘기듯 뒤돌아보면 우리의 삶도 참 굴곡지다.
옛날 옛적에 나무꾼 할아버지와 손자가 삼 년 고개 아래 살았는데, 삼 년 고개에서 한번 넘어지면 삼 년밖에 살지 못한다는 옛날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왔다.
나무꾼 할아버지는 장에 가거나 산에 나무를 하러 가려면, 늘 삼 년 고개를 넘어야 했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조심조심 고개를 넘어가려다가 갑자기 숲속에서 토끼한 마리가 튀어나와 깜짝 놀라, 할아버지는 그만 삼 년 고개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아이고, 나는 이제 삼 년밖에 살 수 없구나!”
크게 낙담한 할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와 근심하다 병으로 드러눕게 되었다.
손자는 할아버지가 삼 년 고개에서 넘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할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할아버지 삼 년 고개에서 한 번 넘어지시면 3년을 산다고 했으니, 두 번 넘어지면 6년, 세 번 넘어지면 9년을 살 것 아닙니까?”
손자의 말을 들은 할아버지는 마음을 바꾸어 먹고 환하게 웃는 얼굴로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삼 년 고개로 가, 열 번을 더 넘어져 30년을 더 살았다고 한다.
이처럼 고개는 우리의 애환이 서려 있는 길이다. 험한 고개를 넘어 입신양명한 사람도 있고 고개를 넘어 시집간 처녀도 있었고, 고개 넘어 비명횡사한 사람도 있었다. 고개마다 도적이 많았고 나라가 어려울 때면 어김없이 의병이 들풀처럼 일어나기도 했다.
한반도 백두대간 고개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추풍령秋風嶺은 충북과 경북으로 잇는 고개로 소설가 오영수는 가을바람이 소슬한 추풍령이란 단편소설을 남겼다.
추풍령은 높이가 221m에 불과해 조령(632m)이나 죽령(696m)에 비해 훨씬 넘어가기 수월하고 비교적 낮은 고개며,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이기도 하다.
일설에는 " 과거시험을 보러 갈 때 추풍령과 죽령은 피해서 갔는데 추풍령으로 가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으로 가면 죽죽 미끄러져서 그렇다"는 말이 붙었기 때문이다. 아마 과거에 낙방한 영남의 선비들이 핑곗거리를 찾다 붙이듯 하다.
일본은 한반도 침탈을 위해 제일 먼저 추풍령을 주목했고, 경부선 철로개통으로 서울과 영남 지방을 오가는 핵심 고개가 되었다.
일본은 대한제국 고종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울 영등포와 부산 초랑에서 경부선 공사를 시작해 3년 4개월 만인 1905년 1월1일 조선의 경부선 철도를 개통했다. 1905년 9월11일 부산과 시모노세끼 간의 뱃길이 열리고 1906년 4월3일 서울 의주 경의선 706Km가 개통하여, 일본은 한반도를 완전히 장학하며 러일전쟁의 승리와 대륙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였고, 조선 약탈과 수탈의 고개가 되었다. 이보다 10년 전 1894년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은 공주 우금치 고개에서 동학농민군 10만을 사살한 적도 있다.
현대 건설은 416.4Km의 경부고속도로를 완공하고 기념으로 추풍령에 기념탑을 세웠고, 대한민국 근대화의 상징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는데, 신립의 부장이었던 장지현張智賢은 의병 2,000명을 이끌고, 황간을 따라 추풍령으로 진격하는 왜장 구로다의 2만 명을 맞아 치열한 싸움 끝에 물리쳤고, 다시 공격해온 4만 명의 왜군을 동생 장호연과 함께 싸우다 전력의 열세로 장렬히 전사한 곳이 추풍령이다.
빼재는 예로부터 도적이나 사냥꾼이 많아, 잡아 먹은 동물 뼈가 길에 쌓였다고 붙은 이름이다. 신풍령이라고도 하는데, 추풍령을 본떠 바람도 쉬어가는 새로운 고개란 뜻이다.
주치령이라고도 하는 덕산재를 넘으면 민주지산 물한리 계곡에 들어선다. 물한리 계곡은 백두대간 야생 동물의 낙원이다. 고라니 오소리 사냥노루 담비 삵 고슴도치 붉은배새매 새매 청호반새 희귀종 들의 보금자리다. 야생동물이 많으면 호랑이도 있는 법. 얼마 전까지 호랑이 봤다는 사람이 여럿이었다.
1998년 4월1일 특전사 부대원 6명이 훈련 중 동사하는 안타까운 사고 일어난 곳이 민주지산이다.
소의 머리를 닮은 우두령은 1592년 7월 17일 임진왜란 의병장 김면이 의병 2,000명을 매복시켜 왜군을 물리친 승리의 현장이다. 필자가 백두대간을 종주할 때삼도봉에서 우두령까지 무척 무척 힘들었다는 기억밖에 없다. 우두령에서 차량 지원을 하던 후배가 산을 내려 오는 필자를 보고, “웬 피골이 상접한 해골 하나가 배낭을 메고 산을 내려왔다.” 라고 표현했다.
궤방령은 영남의 선비들이 과거길로 선호한 고개다. 추풍령을 넘으면 떨어지지만, 괘방령의 방(榜 합격자 명부)은 붙인다는 의미라서 과거에 붙는다는 속설이 있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때 황의장군 박이룡은 의병을 모아 왜군에게 대항한 곳이 궤방령이다
백두대간 죽령은 696M의 높은 고개로 신라 아달라 이사금 때의 죽죽竹竹이라는 사람이 닦아서 '죽령'이라 불렸다.
고구려의 장수왕 때는 고구려가 남쪽으로 세력을 뻗쳐 죽령이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선이었다. 신라 진흥왕 때 고구려를 쳐서 죽령을 신라가 빼앗았다.
백제에게 대야성을 빼앗긴 김춘추가 연개소문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고구려를 찾았을 때 연개소문은 죽령 이북 땅을 돌려주면 백제를 칠 군사를 빌려주겠다고 한 대목이 죽령이다. 결국 김춘추는 옥에 갇히고, 다 아시다시피 선도해에게 뇌물을 쓴 김춘추는 그 유명한 귀토지설(토끼와 거북 이야기)로 고구려를 빠져나온다.
흔히 문경새재의 '재'는 고개를 의미하는 순우리말이며, '나는 새도 넘어가기 힘든 고개'라는 의미에서 새재라 불렸다.
통상 우리가 쓰는 영남嶺南은 고개의 남쪽이란 말이다.
큰재 재가 크다하여 큰재이다.
이화령梨花嶺은 높이 548미터의 백두대간의 고개이다. 예전에는 고개가 험하고 산짐승들이 자주 출몰해 여러 사람이 어울려서 함께 넘어갔다하여 ‘이우리재’로 불렸다가, 신작로가 개통되고 이화령으로 불렸다.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는 중국 만주의 이우뤼산醫巫閭山과 통한다고 한다. 고조선은 북쪽 산마루에 천제단天祭壇과 함께 신당神堂을 설치하여 나라의 안녕을 기원했고, 이우리재는 바로 이 영산靈山으로 통하는 길이란 뜻이다.
상주 화령장 전투는 동족상잔 6.25 전쟁의 판도를 바꾼 곳이다.
1950년 7월, 연일 후퇴하던 제17년대 연대장 김희준은 화령장 고개에 매복하고 있다, 파죽지세로 남침하는 북한군 15사단을 궤멸 시켜 낙동강 전선 교두보를 마련했다.
이처럼 백두대간의 고개는 싸움과 다툼의 한 많은 고개였다. 우리는 늘 들풀처럼 일어났고 고개 넘어 희망을 찾아 고개를 또 넘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