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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사찰
작성일 : 2025.07.27 10:56 작성자 : 김하기
지리산의 사찰 1편)
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 법성원융무이상 제법부동본래적
법의 성품은 원융하여 두 모습이 본래 없고 모든 법은 고요하여 움직이지 아니하니 진여의 세계로다.
窮坐實際中道床 舊來不動名爲佛 궁좌실제중도상 구래부동명위불
마침내 실다운 진리의 세계인 중도의 자리에 앉았으니 예부터 변함없는 그 이름 부처로다.
-의상의 법성게法性偈-
지리산 법계사法界寺
백두대간에서 제일 높은 곳 1,450m에 위치한 지리산 법계사는 신라 진흥왕 5년(544년) 연기조사가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여 창건한 적멸보궁이다.
불가에서 법계란 진여를 말하는 것으로, 의상義湘은 자신이 지은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에, “하나 속에 일체가 있고 일체 속에 하나가 있으며,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一中一切多中一一卽一切多卽一”라고 했다.
서로 의존하고 관계를 맺고 있다는 ‘상즉상입相卽相入’의 연기緣起를 나타낸 것이다. 모든 것은 인연因緣에 따라 존재하므로 하나가 없으면 일체도 있을 수 없고, 일체가 없으면 하나도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의상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지었다는 화엄일승법계도 일명 법성게는, 용수보살이 용궁에 들어갔는데, 세 가지 화엄경이 있었다고 한다. 첫 번째 화엄경은 우주와 같이 너무 커서 가져오지 못했고, 두 번째 화엄경도 너무 방대해서 가져오지 못했으나, 세 번째 화엄경 10조5만48자를 가져왔다고 한다. 이 방대한 화엄경을 의상이 210자로 줄인 글로 법法으로 시작해 불佛로 끝난다.
용수보살은 2세기경 인도의 실존 인물로 대승불교의 공空사상을 확립시켰다.
지리산 법계사 대웅전에는 불상이 없다. 다 아시다시피 적멸보궁 대웅전에는 부처님의 불상이 없다. 석가모니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진신사리는 삼층석탑 속에 있다.
법계사가 흥하면 바다 건너 일본이 망한다는 속설로 왜구들의 침략을 끊임없이 받아왔다. 일제강점기 일본이 박아두었던 쇠말뚝을 2006년 10월3일 제거하자, 한국인의 기상이 백두대간을 타고 대륙으로 다시 웅비하기 시작하여 세계 곳곳에 한류風流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지리산 화엄사華嚴寺
544년 연기조사가 법계사를 세울 때 창건한 화엄사찰이다. 연기조사는 신라에 처음 대승 불교를 도입했으며 진흥왕의 총애를 받았던 스님이었다. 다 아시다시피 신라 진흥왕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에 비교되는 왕으로 신라 삼국통일의 발판이 된 왕이기도 하다. 처음 화엄사는 화랑의 무예정신교육장소로 이용되는 등 군사 교육 목적으로 활용되었다.
이후 643년(선덕여왕12년)에는 황룡사9층 목탑을 세운 자장慈藏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절을 증축하고 석존사리탑 · 7층탑 · 석등룡 등을 지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인 676년 (문무왕17년)당에서 화엄종을 공부하고 돌아온 의상대사가 각황전을 창건하고 왕명으로 석판에 화엄경 80권을 새겨 보관하였다.
고려 대각국사 의천이 화엄사에 방문하여 화엄사를 세운 연기 조사의 초상화를 보고 남긴 시를 한번 들어보자.
華嚴寺禮緣起朝師影 화엄사 연기 조사의 진영에 참배하고
偉論雄經罔不通 웅위한 경과 논에 모두 통달하여
師平昔講演起▣花嚴 조사는 평소에 기신론과 화엄경을 강연하였다
一生弘護有深功 일생 동안 널리 알린 공이 깊어라.
三千義學分燈後 삼천 의학이 법등을 나눠 받은 뒤로
圓敎宗風滿海東 원교의 종풍이 해동에 가득해졌도다.
임진왜란 1597년(선조30년) 승군과 의병이 왜군과 대치할 때 화엄사에서 군량을 지원해 준 보복으로 나중에 왜군은 화엄사의 모든 건물과 산마루에 있는 법계사까지 불태워버렸다.
동족상잔 6.25 전쟁 때 정부에서 “빨치산이 지리산 큰절에 숨을 수도 있으니 화엄사를 모두 불태우라.”는 명령이 내려졌지만, 당시 명령을 받은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 총경은 "태우는 건 하루면 족하지만, 다시 세우려면 천 년도 부족하다." 하면서 상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대신 대웅전 문짝만 떼어 태운 것은 유명한 일화다.
지리산 화엄사 올벚나무는 꽃이 잎보다 먼저 피고 다른 벚나무보다 일찍 꽃이 피기 때문에 올벚나무라고 부른다.
화엄사의 올벚나무는 높이가 14m이고 수령이 약 300살 정도로 추정된다.
병자호란(1636) 이후 임금 인조는 오랑캐에게 짓밟혔던 기억을 되새기며 전쟁에 대비하고자 활을 만드는 데 쓰이는 벚나무를 많이 심게 했다. 당시 화엄사의 벽암스님도 그 뜻에 찬성하여 주변에 올벚나무를 많이 심었는데, 그중에 한 그루가 살아남은 것이다.
지리산 화엄사는 역시 신라 화랑정신이 새겨져 있고, 올벚나무는 나라를 지키려는 승병들의 결기가 담겨있다.
지리산 화엄사 스님으로는 창건한 연기煙氣나 자장慈藏 도선道詵 그리고 태조 왕건을 도운 경보慶甫, 견훤의 왕사 관혜觀惠, 임진왜란 승병장 해안海眼 스님과 근현대 고승 동헌 완규(東軒 完奎, 1896~1983)스님께서 주석하셨다.
지리산 대원사大源寺
신라 진흥왕 무진 548년(진흥왕 9) 연기조사가 창건 평원사(平原寺)라 하였으나, 오랬동안 폐사지를 1890년(고종 27) 구봉(九峰)스님이 대원사로 이름을 바꾸어 중창하고, 1948년 여순반란사건 때 공비 토벌로 다시 전소된 후 탑과 터만 남게 되고 한동안 방치되었다.
1955년 '지리산 호랑이’라 불렸던 여걸 만허당 법일 스님께서 손수 벽돌과 기와를 올리고 터를 잡아 1986년까지 근 30여년 동안 대원사의 중건에 힘써왔다. 대원사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비구니 참선도량으로 발돋움하였다.
만허당 법일 스님과 필자의 인연을 소개한다.
1973년 1월 필자는 학창시절 산악부 대원을 이끌고 지리산 적설 등반에 나섰다. 필자도 지리산 장기 적설 등반은 처음이었다.
부산에서 새벽에 기차를 타고 진주를 거쳐 덕산에 도착하니 밤이었다. 10여 명의 산악부 대원은 키슬링을 매고 유평리를 거쳐 눈 내리는 한밤중 대원사 문을 두드렸다.
“스님, 지리산 등산 온 학생들입니다. 날이 어둡고 추워 텐트를 칠 수 없습니다. 하룻밤만 유숙하게 해주십시오.”
사실 우리는 대원사가 남자는 한 사람도 없는 비구니 사찰인 줄 몰랐다.
눈보라 치는 한방 중, 한참 만에 문이 열리고 우리 대원들은 절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마치 산적 같은 사내놈들이 키슬링을 매고 들이닥친 대원사 비구니들은 잠결에 무척 놀랐을 것이란 생각은, 철이 든 지금에야 했다.
철없던 우리 대원들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버너 불을 피웠다. 당시에는 꽁치 통조림이 산악 식량으로 최고였다. 비구니들이 수행하는 방에서 꽁치 통조림을 끓이고 담배를 피워댔으니, 아마 비구니스님들은 무척 황당하고 놀랐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어떤 노스님 한 분이 지팡이를 짚고 들어와 우리에게 불호령을 쳤다.
“이 철없는 놈들, 불쌍해서 방을 내주었더니, 뭐하는 짓이야, 여기는 절이야, 절!”
등반대를 이끌고 온 나는 그때 서야, 아차! 하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옆 방에서 담배 냄새와 꽁치 통조림 냄새를 풍겨도 말 못하는 비구니 스님들과 호통치는 50년 전 노스님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하다. 그 스님이 지리산 호랑이 법일 스님 같다.
“스님 참회하나이다!”
“지극정성으로 참회하나이다!”
지리산 쌍계사雙磎寺
頭流方丈眞仙界 두류산과 방장산은 참으로 선계로다
鼓翼淸吟付石門 기쁘게 읊으면서 석문에 새겼으니
石門筆迹人間寶 석문의 필적은 인간의 보배가 되었는데
遊戱金壇銷白雲 신선이 노닌다며 흰 구름이 가로막네
-題雙溪寺崔孤雲石門筆迹 제쌍계사최고운석문필적-
지리산 둘레길 800리를 다리품 팔다 보면, 섬진청류 300리 물길을 따라 화개장터 구경을 하고 벚꽃 10리 길을 들어서면 지리산 쌍계사가 나온다.
절 앞에 흐르는 두 줄기 시냇물을 보고, 723년(성덕여왕22년)의상의 제자인 삼법三法 스님이 쌍계라는 이름으로 절을 짓고, 최치원으로 하여금 '쌍계석문雙磎石門이란 4자를 쓰게 하여 바위에 새겼다.
조선 중기 고승인 소요逍遙 태능太能(1562~1649)은 1647년 9월 최치원이 쓴 쌍계석문을 보고 나서 감탄하며, 들머리와 같이 제쌍계사최고운석문필적이란 시를 읊었다.
이렇듯 최치원이 직접 썼다는 ‘쌍계석문雙磎石門’ 4자는 후대 사람들에게 많은 시상의 소재가 되었다.
쌍계사의 대웅전 앞 계단 아래에 자리 잡은 검은 대리석에 새긴, 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禪師大空塔碑에는 유교, 불교, 도교의 삼교가 추구하는 바가 다르지 않다는 최치원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으며, 이는 난랑비서문鸞郎碑序文에도 나오는 말이다.
國有玄妙之道曰風流 設敎之源備詳仙史實乃包含三敎接化群生
국유현묘지도왈풍류 설교지원비상선사실내포함삼교접화군생
나라 안에 현묘한 도玄妙之道가 있으니 풍류風流라 한다. 이는 유불선의 근원이 되고 우리의 삶이라고 했다.
바람 '풍風'과 물 흐를 '유流'가 합쳐져 된 풍류는 우리의 태곳적 백두대간 제천의식에서 나온 고유의 사상이다. 중국이 말하는 바람이나 물의 흐름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사람의 성품이 고지식하지 않고 백두대간을 타고 물과 바람처럼 융통성이 있으며 더불어 속되지 않고 고상하여 삶에도 운치와 멋스러움이 있다는 뜻이다.
최치원은 진감선사대공탑비에 道不遠人, 人無異國 "도는 사람과 멀리 있지 않고, 사람은 나라에 따라 다르지 않다."라고 했다.
또한 진감선사대공탑비에는 범패의 전래와 유포 과정을 소상하게 소개하고 있다.
당나라에서 선종의 법맥을 잇고 귀국한 진감선사 혜소慧昭가 선禪을 가르치며 방편으로 불교 음악인 범패를 널리 보급하였다.
그럼 불교 음악 범패를 한번 들어보자.
성스러운 찬탄 범패 소리, 장중하고 엄숙한 소리, 선정禪定의 극치에서 나오는 소리,
가장 자연스러운 백두대간의 성악聲樂. 범패를 판소리 · 가곡과 더불어 백두대간 삼대 성악이라고 한다.
불교의 재를 올릴 때 부르는 노래로 범음 인도소리 어산이라고도 한다.
리듬과 화성이 없는 단성선율로 규칙적인 장단이나 관현악 반주가 없는 음악으로 범종이나 법고처럼 자연스럽고 소박한 범패는 그윽한 맛이 풍기는 백두대간의 소리다. 청아한 목탁 소리와 장엄한 염불 가락은 다른 장르에서 느낄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진감선사 대공탑비문에는,
선사는 범패를 청아하게 잘 불러서 그 소리가 금옥처럼 맑았다.
슬픈 듯한 곡조에서 나는 소리는 상쾌하고 구슬퍼, 능히 천상 사람들도 기쁘게 할 수 있었다.
그 소리가 먼 데까지 전해져 배우려는 자가 절에 가득찼는데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범패는 삼국시대부터 면면히 이어온 백두대간의 우리 소리다. 안채비와 바깥채비로 나눈다. 안채비는 흔히 염불이란 가락이고 바깥채비는 홀소리 짓소리 등 매우 다향하고 어렵다. 범패에 맞추어 추는 춤을 작법이라고 한다. 작법에는 우리 모두 한번 쯤 본 적이 있는 바라춤 법고춤 나비춤 세가지가 있다. 부처님에게 올리는 몸 공양으로 정성을 다한다.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범패는 복잡한 세상을 잊게 한다. 성스러운 찬탄의 노래 범패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은 백두대간의 소리다.
회심가 왕생가 열반가 몽환가 등이 있다.
지리산 쌍계사하면 다선일미茶禪一味의 초의艸衣 선사를 빼놓을 수 없다. 우리나라 최초의 차시배지로 쌍계사 계곡 아래에 있다.
초의선사의 동다송東茶頌을 한번 음미해 보자.
一傾玉花風生腋 옥화 한잔 기울이니 겨드랑에 바람 일어
身輕已涉上淸境 몸 가벼워 하마 벌써 맑은 곳에 올랐네.
明月爲燭兼爲友 밝은 달은 촛불 되어 또 나의 벗이 되고
白雲鋪席因作屛 흰 구름은 자리 펴고 병풍을 치는구나
칠불사七佛寺
북방문화에서는 한반도에 불교가 들어온 시기를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년으로 공인하고 있다. 전진(前秦: 315~394)의 왕 부견(符堅: 재위 357~385)이 사신과 승려 순도(順道)를 보내어 불상과 불경을 전하였다. 라고 하지만, 남방문화에서는 건무(建武) 24년 무신 7월 27일 허황옥이 바다 건너 아유타국에서 배를 타고 오면서 김수로왕을 만날 때 파사석탑과 함께 불교를 전했다.
쌍계사의 말사인 칠불사는 101년 낙남정맥 가락국 김수로왕과 허황옥의 일곱 왕자가 수행하다가 103년 8월 보름날 밤에 일시에 성불했다는 한반도에서 가장 역사 깊은 사찰이다.
신라시대 만들었다는 아자방 온돌방에 누우면 아직까지 등이 따뜻하다.
연곡사
화엄사 말사로 절터에 큰 연못이 있었다고 하여 연곡사다. 백두대간의 사찰 중 연곡사만큼 많은 시련을 겪은 절도 드물다. 임진왜란 의병과 동학혁명 그리고 을미의병을 겪었고 동족상잔 6.25 빨치산의 격전지였다.
연곡사가 있는 골짜기는 피를 많이 흘린 골짜기라고 하여 피아골로 불린다. 피를 많이 흘리고 죽은 사람의 넋이 단풍잎에 물들어 유난히 붉다.
피아골 삼홍소는 단풍이 붉고, 계곡이 물들어 붉고, 바라보는 사람의 얼굴이 붉다고 하여 삼홍소라고 한다.
지금 건물은 대부분 80년대 이후 지어진 것이다. 필자가 처음 방문한 70년대 초만 해도 낡고 작은 사찰이었다.
지금도 당시 연곡사에서 받은 발우공양이 눈에 선하다. 오래된 까만 발우에 새까만 잡곡밥 한술 그리고 짠지 한 조각이 전부였다. 합장하고 받은 발우 공양은 정말 꿀맛이었다.
計功多少量彼來處
이 음식이 어디에서 왔는가.
村己德行全缺應供
내 덕행으로는 받기가 부끄럽네.
防心離過貪等爲宗 正思良藥爲療形枯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삼아,
爲成道業應受此食
깨달음을 이루고자 이 공양을 받습니다.
70년 대 초반만 하더라도 지리산 둘래길 마을에 배낭을 메고 들어서면 동내 꼬마들이 신기해하며 우리 뒤를 졸졸 따라다니든 때였다. 유평리 가랑잎 국민학교 꼬마들의 얼굴이 오십 년이 지난 아직 눈에 선하고 그들도 이제 중년을 지나 노년으로 접어든 것이다. 시간 나는 데로 지리산 둘래길을 다시 한번 걸어야겠다.
지리산 800리 길을 다리품 팔다 보면 천은사 실상사 계림사 내장사 천수사 벽송사를 지나 해가 지리산 마루금에 걸린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