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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기행

백두대간 인문기행 호외(만주벌판 달려라 광개토대왕)

만주벌판 달려라 광개토대왕

작성일 : 2025.07.05 01:09 작성자 : 김하기

백두대간 인문기행 호외

만주벌판 달려라, 광개토대왕

 

마고할미 하늘열자 궁희소희 태어나고

황궁께서 산을주고 청궁께서 물을주니

한삽뜨니 백두이요 두삽뜨니 지리이라

동해보자 높게하고 만주벌판 낮게하여

산줄기는 물가르고 물은산을 넘지않아

정맥마다 금수강산 배달국을 만들었네

환웅천왕 둘러보니 삼위태백 신단수라

신시도읍 터를잡아 풍백우운 대동하고

삼천관리 조아리니 사람들이 모여들고

단군왕검 굽어살펴 홍익인간 재세이화

인간만물 접화군생 천년만년 살고지고 -신종석-

 

 

한반도 남방문화는 낙동정맥을 타고 올라가, 백두대간에서 내려온 북방문화와 우리의 토착문화가 접화군생接化羣生하여 한반도 풍류風流의 꽃을 피웠다.

남방문화의 유산은 한반도 들머리 부산 영도 동삼동 6천 년 전 패총과 부산 가덕도 장항 유적에 이어, 낙동정맥을 타고 언양 반구대 암각화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북방문화는 일연의 삼국유사에 기원전 2457(上元 甲子) 4482년 전, 환인의 서자 환웅천왕이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가지고 삼위태백산三危太伯山 신단수 아래 내려왔다. 우리는 이날을 103일 개천절이라 부른다.

조선의 실학자 여암 신경준은 자신의 저서 여지고輿地考에 한반도의 산줄기를 하나의 대간 백두대간白頭大幹과 정간 장백정간 그리고 13 정맥으로 분류했다.
이처럼 한반도의 풍류風流는 백두대간 마루금을 따라 오르내리며 일만 년을 이어왔다.

 

우리의 산, 즉 뫼는 외국의 마운틴과 그 개념이 다르다. 우리에게 산은 신라 박제상의 부도지符都誌에는 기원전 7197, 지금으로부터 9223년 전, 황궁씨가 부도복본符都腹本에 맹세를 한 후, 사람들을 데리고 마고성을 나와 동쪽으로 산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하면서 시작되었다라고 했다.

산은 우리의 삶이자 나아갈 방향이었다. 황궁씨는 장자인 유인씨에게 천부인 단검· 거울· 방울을 물려주고 산으로 들어가 큰 돌이 되었다.

 

마고할미의 모계 신앙이 강한 우리 민족은 자식의 점지를 산에서 얻어왔다. 우리는 모두 산에 빌어 낳은 자식들의 후손인 셈이다. 우리의 산은 잉태하고 시작하고 여는 곳이다. 의식주 모두를 산에 기대어 살아온 우리였다. 한 칸 오두막을 지어도 산기슭에 의지하여 따뜻하게 등 대고 누워 물소리를 듣고 잠이 들어, 배산임수背山臨水를 최고의 길지로 보았다.

어릴 때 맨 처음 그린 그림이 산이다. 이 땅의 멋과 문화가 모두 산에서 나왔다. 치병과 요양을 위해서 산으로 들어갔고 공부하려 산으로 갔다. 우리의 교육은 산의 정기를 받고 시작했다. 산은 어머니가 계신 곳이요, 우리가 나중에 돌아갈 곳이다. 영원한 쉼터이자 안식처로 여겼다. 그래서 환웅과 단군도 산으로 들어가 큰 돌 산신령이 되었다고 여겼다.

우리는 산을 따라 이동했고 산에 기대어 살아왔다.

 

필자는 어릴 때부터 산을 좋아했고 시간만 나면 산을 찾는다. 우리 땅 한반도 백두대간을 따라 걷어서 백두산을 넘어, 그 옛날 환인이 천부인을 가지고 내려왔다는 신단수까지 마루금을 따라 걷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백두대간 남쪽 구간 진부령에서 더 갈 수가 없지 않은가.

몇 번 중국을 통해 백두산 갈 기회는 있었지만, 그 길은 정도가 아니라고 잘못 생각했다.

그래, 만주도 우리 땅인데!”

어린이 동요, “아름다운 이 땅에 금수강산에로 시작하는 어린이 역사 동요, “만주벌판 달려라, 광개토대왕을 부르며 만주 땅 연변에 도착했다.

사실, 필자에게 만주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에게 이바구들은 봉천의 개장사와 독립군이 전부였다.

 

우리를 처음 맞이해준 곳은 역시 독야청청 일송정 푸른솔이었다. 고향 까마귀같이 전혀 낯설지 않다. 우리 한국 사람이 가장 좋아한다는 소나무는 진달래와 함께 도심 속 관공서나 아파트 단지 내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나무와 꽃이다.

애국가 첫 소절에 남산 위의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뿐만 아니고 백두대간을 타고 남쪽 들머리 부산 다대포 몰운대에서 북쪽 만주 벌판과 연해주 시호테알린산맥 흑룡강 들머리까지 사철 푸르다.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곳에 거친꿈이 깊었나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 소리 들릴때

뜻깊은 용문교에 달빛 고이 비친다

이역 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는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주사 저녁종이 비암산에 울릴때

사나이 굳은 마음 길이 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윤해영-

 

아쉬운 것은 중국에서 관리하는 비암산 소나무가 재선충에 말라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

 

만주벌판 달려라, 광개토대왕

기원전 59년 사 월 초파일 해 뜰 무렵, 하늘이 열리더니 천제의 아들이 다섯 마리 용이 이끄는 오룡거를 타고 백 명의 천인들이 흰 새를 따고 따랐다.

흘승골성(紇升骨城 졸본성, 오녀산성)로 내려와 나라를 세워 북부여北扶餘라하고 스스로 이름을 해모수解慕漱라 하였다.

해모수의 해는 태양을 말한다. 즉 천손이란 말이다. 강의 신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만나 주몽을 낳으니, 이가 고구려를 세운 고주몽高朱夢이다.

 

광개토대왕릉비문의 내용은 고구려의 독자적인 천하관天下觀, 즉 하늘의 후손'이라는 말이다. 이는 환웅이 천부인 세 개를 가지고 내려와 홍익인간 재세이화로 나라를 세우고 백성을 다스린 건국이념과 일치한다.

곰을 숭배하는 맥족貊族과 호랑이를 숭배하는 예족濊族을 평정 통합하고 백제 · 신라 · 부여는 같은 예맥 국가로 고구려와 같은 민족이란 뜻이다. 따라서 광개토대왕의 천하관은 '민족 통합의 상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배달국의 중앙 백두산

기원전 2457(上元 甲子) 103. 하늘은 높고 화창했다.

환인의 윤허를 받은 서자 환웅천왕이 풍백 우사 운사 3신과 3천 관리를 대동하고 삼위태백산三危太白山(백두산) 가장 밝은 산 높은 곳, 제일 큰 나무 신단수 아래 강림하여 하늘에 제사를 올린다는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뒷산 정맥을 타고 마루금을 따라 신단수 아래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한반도에서 13 정맥을 타고 모여든 부족장들은 비록 짐승의 가죽이나 초의를 입었지만 다들 부정을 타지 않게 밤새워 목욕재계했고 머리는 단정하게 빗었다. 신단수 나뭇가지에는 하늘에서 따라 내려온 삼족오가 빽빽하게 자리를 잡았고, · 호랑이 ·까치 · 늑대 같은 짐승들도 먼발치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며 마냥 부러워했다.

103일 오시가 되자 하얀 두루마기에 백관을 쓴 9척 환웅천왕은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가지고 사람들 앞에 섰다. 허리에 동검을 차고 가슴에는 청동거울을 달았다. 유난히 청동거울이 햇볕을 받아 빛났고 사람들은 모두 눈이 부셨다.

환웅천왕이 손을 들어 하늘 향하여 8개의 방울이 달린 팔주령 청동방울을 흔들자, 머리에 복두를 쓰고 허리에 관대를 두른 풍백이 쑥을 때워 연기를 내며 잡귀를 쫓았다. 우사, 운사 대신과 하늘에서 따라와 흰옷을 입고 머리에 모시 두건을 쓴 3천 관리들은 모두 합장하여 예를 갖추었고 머리를 조아렸다.

신단수 아래 모인 전국의 부족장들은 머리를 풀고 짐승의 가죽이나 초의를 걸쳤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3천 관리들처럼 모두 두 손을 모으고 엉거주춤 따라 했다.

환웅천왕은 팔주령을 힘차게 흔들며 고했다. 그 소리는 우렁찼고 천지를 진동하는 사자후였다.

 

환웅천왕 둘러보니 삼위태백 신단수라

신시아래 자리잡아 풍우운사 대동하고

3천관리 조아리니 사람들이 모여들고

환웅천왕 굽어살펴 홍익인간 재세이화

인간만물 여기모여 천년만년 살고지고

 

백관을 쓴 환웅천왕이 소맷자락을 휘날리며 팔주령을 흔들자, 가슴에 단 청동거울은 햇볕을 받아 더욱 빛났다. 복두를 쓴 풍백 우사 운사 대신들이 앞으로 나와 읍을 하고 술을 올린 후 팔 벌려 합장하고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리자, 모시 두건을 쓴 삼천 관리들도 모두 크게 합장하고 땅바닥에 엎드려 세 번씩 아홉 번 절을 했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얼른 두 손을 모으고 곁눈질하며 엉거주춤 아홉 번 절을 따라 했다. 제각기 각자 지방의 방법으로 연신 비손하며 소원이나 부족의 안녕을 빌었다.

신단수 아래 천제단에서 하늘에 올리는 제사가 끝나자 사람들은 음복으로 제물을 나누어 먹으며 흥겨워 노래와 춤을 추며 뒤풀이를 즐겼다.

처음 만난 넓은 땅 배달국의 동서남북 사람들은 서로 덕담을 주고받기도 하고 젊은 사내들은 힘 자랑으로 즉석에서 샅바를 잡고 씨름을 했다. 사람들은 단번에 두 패로 나누어 응원을 펼쳤다.

이겨라, 이겨라.”

들어 올려, 들배지기.”

승부가 나면 모두 와하고 환호를 질렀다.

여자들도 질세라 나뭇가지에 줄을 메고 누가 높이 올라가나 그네를 탔다.

도 개 글 윷 모야!”

한쪽에서는 윷놀이 판이 벌어졌다.

이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본 환웅천왕이 아버지 환인의 뜻을 받들어 홍익인간 재세이화로 사람들을 다스리자, 하늘의 광명이 비친 신시 배달국(넓은땅)은 차츰차츰 질서를 잡아갔다.

 

삼국유사 일연은 삼위태백三危太伯을 평안도 묘향산으로 보았지만, 조선의 학자들은 모두 백두산이라고 입을 모운다.

필자 생각엔 삼위태백은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다.

조선의 실학자 신경준은 한반도의 산줄기를 하나의 대간 백두대간白頭大幹과 정간 장백정간長白正幹 그리고 13 정맥正脈으로 분류했다고 했다.

필자는 백두대간의 영역을 만주 대흥안령과 소흥안령 그리고 백두산 호랑이가 자유롭게 산을 따라 왕래한 연해주 시호테알렌 정맥 흑룡강 들머리까지라고 생각한다. 그 중심에 백두산이 우뚝 솟아 남북을 연결하여 반만년을 이어왔다. 백두대간백두산을 중앙으로 동쪽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는 낙동강 하구까 1,625Km 북으로는 연해주 시호테알렌 정맥(내흥안령)까지다.

 

선사시대 언양 반구대 암각화에는 많은 동해 고래와 백두산 한국 호랑이가 22마리나 그려져 있다.

 

환웅이 나라를 세우자 곰과 호랑이(濊貊)가 사람이 되겠다고 찾아왔다.

환웅천왕님, 저희를 사람으로 바꾸어 살게 해주십시오!”

곰과 호랑이는 바닥에 엎드려 환웅천왕에게 고했다. 환웅천왕은 감동하며 말했다.

, 기특하구나! 너희들이 진정 사람이 되고 싶으면, 동굴에 들어가 쑥 한 다발과 마늘 20개만 먹고 삼칠일 21일을 견뎌야 하는데, 할 수 있었겠냐?”

천왕님. 저희들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라도 다 하겠나이다.”

곰과 호랑이는 호언장담하며 마늘과 쑥을 받아 들고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고기만 먹던 호랑이가 쑥과 마늘만 먹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평소 쑥과 마늘을 먹어 왔던 곰은 21일을 잘 참아 결국은 웅녀란 참한 여자가 되었고, 호랑이는 21일을 참지 못하고 동굴 밖으로 나가 영원히 사람이 되질 못 한다.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사람이 되질 못한 한국호랑이는 언제나 사람을 부러워하며 사람 주위에 가까이 맴돌 수밖에 없었다. 담배를 피울 때도 사람과 맞담배를 피웠고, 남 흉을 볼 때도 같이했다. 우는 아이 옆에도 있었고, 떡 한입을 얻어먹기 위해 떡장수 할머니를 회유하며 졸졸 따라다니기도 했다. 우리의 백두산 한국호랑이는 사람은 되질 못했지만, 죽어서는 멋진 가죽을 남기며 장식과 온갖 잡귀를 쫓는 데 앞장섰다.

이처럼 우리나라 백두산 한국호랑이는 사람은 되질 못했지만, 사람을 따라 백두대간을 타고 전국을 오르내렸다. 그러니 호랑이의 주요 서식지 역시 사람이 사는 마을 주변이 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남쪽으로 내려온 호랑이는 낙동정맥 고헌산을 타고 내려와 그 흔적을 유달리 많이 남겼다. 선사시대 유적인 언양 반구대 암각화에는 동해 고래 다음으로 많은 22마리의 호랑이 그림이 그려져 있고, 경주 석장동 금장대 바위에도 호랑이는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낙동정맥 금정산을 타고 더 남쪽으로 내려와 부산 범내골 범일동 호계천에는 일제 강점기 때까지 백두산 한국호랑이가 내려와 물도 마시고 멱도 감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이 얼마 전까지 여럿 있었단다.

 

한편, 백두대간 낙동정맥 고현산에서 뻗어 내린 대곡천 반구 마을에는 고래 사냥을 주로 하는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예로부터 이어져 오는 고래 사냥은 마을의 협동 작업으로 두레를 형성하는데 최고였다. 뭐니 뭐니해도 고래고기는 맛있다. 큰 집채만 한 한 마리만 잡아도 마을 사람 모두가 배부르게 며칠을 먹을 수 있었고 버리는 것이 없었다. 뼈는 농기구와 바늘로 요긴했다.

낙동정맥을 따라 환웅천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낸 삼위태백 신단수 아래 천제단에 다녀온 반구 마을 군장 할배는, 마을 사람들에게 하늘에서 내려온 삼천 관리들 모양 남자들에게 모두 산발이 아닌 두건을 쓰게 했고, 여자들은 긴 머리를 땋아 댕기를 달게 했다.

산발 머리를 손질하고 두건을 쓰자 사람들의 얼굴이 돋보였고 서로를 존중하며 생활이 훨씬 활기찼다.

 

고래 사냥에 제일 중요한 선창잡이와 후창잡이, 직접 바다에 뛰어들어 고래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칼잡이, 노를 젓는 격군들을 구분하기 위해 머리 두건에 새의 깃털이나 나뭇가지를 꽂게 했다.

반구 마을 부족장 할배는 강치 껍질로 만든 가죽 두건을 썼다. 가죽 두건을 쓰니 한층 위엄 있어 보였고 마을 사람들도 명령을 잘 따랐고 차츰 질서가 잡혀갔다. 사람들은 할배(한배)란 존칭을 깍듯이 붙였다.

반구마을 사람은 풀로 짠 초의나 동물 가죽을 걸친 사람은 없었다. 모두 형편에 따라 삼베나 면화로 짠 옷을 입고 두건을 써 풍채나 인물이 훤했다.

무엇보다 삼위태백 신단수 아래 다녀온 할배가 가지고 온 청동칼이였다. 이제 무딘 돌칼이나 사슴 뼈로 만든 창보다, 청동칼의 위력은 대단했고 고래잡이에 무척 효과적이었다.

모두 배달국의 중심 백두산 신단수 아래 강림한 환웅천왕의 삼천 관리들에게 본받은 것이 아닌가. --

 

  • 인문기행 호외 편은 필자가 방문전 미리 써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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