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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과 차일혁
작성일 : 2025.07.05 01:07 작성자 : 김하기
백두대간 인문기행
이현상과 차일혁 1)
智異風雲當鴻動 지리산에 풍운 일어 기러기 떼 흩어지니
伏劍千里南走越 남쪽으로 천 리 길, 검을 품고 달려왔네
一念何時非祖國 오직 한 뜻, 한시도 조국을 잊은 적 없고
胸有萬甲心有血 가슴에는 철의 각오, 마음속엔 끓는 피 있네
-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
지리산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은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의 유골을 직접 수습하여 섬진강에 손수 뿌리면서 이렇게 외쳤다.
이른 아침 들판에 나가 일하는 농부에게 물어보라
공산주의가 자본주의가 뭔지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는지
지리산 싸움에서 죽은 군경이나 빨치산에게 물어보라
공산주의를 위해 죽었는지 자본주의를 위해 죽었는지.
할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겠는지?
그들은 왜 죽었는지도 모른다고 할 사람이 태반일 것이다.
이 싸움은 어쩔 수 없이 하지만, 후에 세월이 가면 다 밝혀질 것이다.
미국 소련 두 강대국 사이에 벌어진 부질없는 골육상쟁 동족상잔이었다.
-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
지리산은 쫓긴 자들이 숨어든 땅이었다. 동학농민혁명군 · 항일의병 · 보광당 · 야산대 · 한국전쟁의 빨치산도 지리산으로 몸을 숨겨 후일을 다짐했다.
조선인민유격대 이현상은 보성전문 현 고대 법대를 다닌 상당한 인텔리였다. 우익 인사이자 7선 국회의원을 지낸 유진산과는 절친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학창 시절부터 노동운동 · 독립운동과 고려공산당에 가입한 골수 공산당원이였다. 해방이 되자 박헌영과 조선공산당 재건과 조선남로당 핵심 간부였다.
이현상은 낙동정맥 비운의 사나이 하준수와 둘 다 비슷한 길을 걸었다. 부친이 면장 출신의 부농의 아들이란 점과 일제 징병을 피해 보광당을 조직하는 등 일찍이 야산대를 조직하여 입산한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서울시내 고보생들을 이끌고 6·10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현상은 해방이 되자 발 빠르게 45년 9월7일 남로당 박헌영과 국군의 모체가 되는 조선국군준비대를 창설한다. 대부분 일제 학병을 거부해 산으로 도피한 독립 투사 야산대와 공산당 출신 광복군들로 구성되었다.
김일성 · 김원봉 · 지청천 · 무정을 명예회장으로 추대하고 조선 인민에게 공산당의 강력한 메시지를 보낼 것을 결의한다.
이현상이 조선국군준비대 건국 대회에서 조선공산당 간부로서 축사한 내용을 한번 들어보자.
“친애하는 동지 여러분, 조선의 완전 독립과 진보적 민주주의의 확립, 민족 통일 전선에 참가하며 이승만의 파쇼적 독립 총성 중앙 협의회에 반대하고, 한국민주당의 반민주적 국민 대회 소집에 대한 반대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해야 합니다.
우리 인민의 민주주의적 총의를 응결한 정권은 오직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헌상이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월북하자, 김일성은 이현상의 손을 잡고 단번에 강동정치학원에 입교를 권한다. 뜻밖이었다. 이현상은 박헌영을 따르며 해방된 조국 인민의 지도자로 박현영을 지지하고 있었다.
“이 동무, 잘 오셨소! 이 동무의 노고를 늘 듣고 있었소. 강동정치학원에 입교하여 남조선 해방의 선봉에 서시오.”
강동정치학원은 처음부터 남한 침투 게릴라전을 목적으로 김일성이 설립한 특수부대였다. 이것 하나만 봐도 김일성은 처음부터 6.25 전쟁을 준비해 왔던 것이다.
하준수(남도부: 남쪽을 도발해 부산을 점령)도 강동정치학원 출신이며 영남알프스 신불산에서 조선인민유격대 사령관으로, 이현상은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 사령관으로 활동한다.
1948년에 10월 여순반란 사건이 일어나자, 기다렸다는 듯 이현상은 급파되었다.
당시 전라남도 여수시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의 군인 2,000여 명이 중위 김지회 등 남로당 계열 군인 주도로 제주 4·3 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일으킨 무장 반란으로, 진압 과정에서 일제 하사관 출신인 김원종은 일본도로 여순반란 가담자와 부역자들은 무차별 학살하자, 많은 사람들에게 원성을 사고 있었다.
북에서 물 만난 고기 모양 급파된 이현상은 여순반란에 살아남은 일부 부대원과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이끌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일명 지리산 조선인민유격대 빨치산을 결성한다.
우리는 편의상 6, 25 이전 산으로 들어간 사람을 구빨, 6, 25 이후 산으로 들어간 사람을 신빨이라고 부른다. 구빨은 주로 일제 · 미군정이나 이승만 정권을 반대하는 남쪽 사람들이 많았고, 신빨은 낙동강 전선에서 후퇴하다 퇴로가 막혀 산으로 들어간 북쪽 사람이 많았다.
6·25전쟁이 발발하기 하루 전 24일 밤 김일성은 강동정치학원 하준수에게 폭풍작전이란 특별 명령을 하달한다.
“하 동무, 남쪽을 도발해 부산을 점령하고, 8월15일 서울 열병식에 당당하게 선봉에 참가하시오.”
김일성에게 남도부南到釜란 병칭을 받은 하준수는 강동정치학원 인민유격대 300명을 이끌고 먼저 24일 밤 자정 속초에서 배를 타고 임원항으로 침투한다.
김일성도 부산 거점의 중요성을 잘 알고 미리 손을 쓴 것이 아닌가?
남도부가 이끄는 인민유격대 300명이 임원항에 도착할 쯤 25일 새벽 4시 225마일 38선에서 일제히 선전포고 없이 북은 포격을 감행했고 6.25전쟁은 발발되었다.
남도부가 낙동정맥을 타고 영남알프스 신불산까지 오는데, 국군과 교전으로 150명 이상 전사하고 만다. 낙동정맥 영남알프스에는 구빨 출신인 성일기(김정은의 처 성혜림의 오빠)가 150여 명의 구빨 입산자를 이끌며 배내골에서 남도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현상은 인민군으로 낙동강 전투까지 밀고 내려왔다. 그러나 UN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백두대간을 따라 북으로 도주하던 이현상은 강원도 세포군 후평리에서 평생 동지이자 상관인 이승엽을 다시 만난다.
“이현상 동무는 북으로 가지 말고 남부군을 결성하여 후방에서 전선을 구축하시오.
우리는 곧 다시 남침할 거요. 그때를 대비하시오!”
이승엽의 명령을 받은 이현상은 지리산에 들어가 남부군 조선인민유격대 총사령관이된다.
1951년 여름까지 백두대간을 따라 속리산 일대를 돌며 충북도청 청주를 기습하여 관공서를 불태우고 청주형무소의 좌익수 142명을 석방시키는 등, 덕유산 민주지산까지 침투해 경부선 군용열차를 습격하였다. 이때까지 조선인민유격대의 기세는 등등했고 곧 남조선 인민해방이 온다고 떠들었다.
이헌상은 51년 6월까지 덕유산 등 흩어져 있던 조선인민유격대를 지리산으로 모은다. 전선은 다시 38선을 오르내리며 고착화되고, 1951년 7월10일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시작되자, 국군은 전선의 병력을 일부 돌려 지리산 빨치산 소탕을 시작한다.
정정협정에서 UN 측은 빨치산을 귀찮은 존재로 여겨 북한에다가 몇 번이나 '데려가라'고 제안했으나, 북한은 일절 응하지 않았다. 대신 북한은 조선인민유격대에게 하산해 도시로 들어가 지하 활동을 계속하라는 지령만 계속 보내왔다. 조선인민유격대는 북측에서 볼 때 최대의 이용 가치가 있는 조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뒤늦게 산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공산주의가 뭔지 자본주의가 뭔지 모르고 그냥 산으로 들어간 사람들이었다. 그냥 친일 청산 · 조국 해방과 평등이란 말이 좋아 산으로 들어간 사람들이었다. 다수의 남한 출신들은 대부분 4.3이나 · 여순 학살 피해자로 남한 이승만 정권에 불만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오직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쳤고, 빈부가 없는 지상낙원이 온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시간이 지나자, 빨치산에게 우호적이었던 산간지방 화전민들도 날이 갈수록 빨치산을 멀리했다. 보급 투쟁에 나선 빨치산들에게 투항을 권유하는 사람도 있었고 자진해서 입산하는 사람은 이제 없었다. 강제로 화전민들을 끌고 와도 틈만 나면 도망치기 일쑤였다. 이제 지리산은 더 이상 빨치산의 낙원 해방구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빨치산의 적은 국군 토벌대 보다, 겨울 추위와 배고픔이었다. 겨울엔 굶기를 밥 먹듯 했고 허기진 눈길에 고무신을 전선 줄로 동여매었거나 짚신을 신어 동상으로 발이 썩어 걷기도 어려웠다.
처음엔 하루에 생콩 다섯 알과 쌀 서른 톨씩을 나눠줬는데, 봄 여름에는 초근목피로 연맹했지만, 한겨울엔 나무껍질을 벗겨 씹을 수밖에 없었다.
70, 백두대간 인문기행
차일혁과 이현상 2)
이현상과 지리산 인민유격대는 판문점 정전회담만 기다렸다. 정전이 되면 인민의 영웅으로 북으로 귀한할 날을 학수고대 기다렸다. 그러나 북의 지령은 더욱 집요했다. 후방 인민유격대의 교란으로 전선의 국군을 후방으로 돌리게 하라는 것이었다.
남부군 인민유격대 사령관 이현상은 지리산에 산재한 대원을 전부 대성골로 모았다. 정신 무장과 보다 정확한 인원을 파악하여, 북의 지령에 따라 후방 강경 대응을 하기 위해서였다.
1952년 1월18일 새벽부터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지리산 일대 계곡에 숨어 있던 빨치산들이 하나둘 대성골로 몰려들었고, 하늘에서는 지리산 대성골에 이렇게 많은 눈이 오고, 사람들이 모여들기는 처음일 것이다.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도 놀랐다. 이렇게 많은 인민유격대가 지리산에 숨어 있었는지? 시간이 지나자, 눈사람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눈 반 사람 반이 아니라, 눈 오듯이 눈사람이 대성골 계곡을 가득 메웠다.
눈사람을 바라보는 이현상은 뿌듯했다.
“아!”
모여드는 눈사람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승리가 눈앞에 있고 조국 통일이 머지않은 것 같았다.
기쁨도 잠시, 찌뿌둥한 하늘에 어디선가 “피웅-웅”하고 포탄 날아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순간 쾅하고 박격포탄이 터지더니 산이 무너지는 듯 요란했다. 동시에 수백 발의 포탄이 대성골 계곡으로 날아들었다.
눈사람들이 하나둘 쓰러졌고 여기저기 비명과 사람의 팔 다리가 잘려 공중으로 날아 떨어졌다. 눈사람이 선혈이 낭자한 핏빛으로 물들었다.
국군 토벌대는 산마루에서 아래를 보며 포탄을 마구 퍼부었다. 몇몇 발 빠른 빨치산들은 능선을 타고 도망갔지만, 대다수의 추위와 배고픔에 떨던 눈사람 빨치산들은 독 안에 든 쥐 모양 아비규환 속에서 피를 토하고 팔다리가 잘리며 죽어갔다. 하얀 눈 위에 붉은 핏자국이 선명했고 야속하게 함박눈은 금방 흔적도 없이 죽은 눈사람을 덮어버렸다.
숨 쉴 틈도 없이 이번엔 하늘에서 비행기 소리가 나더니 비행기에서 휘발유를 삐라 뿌리듯 마구 쏟아부었다. 그리고 소이탄을 쏘아댔다. 대성골 계곡은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었다. 살아서 눈 속에 숨어 있던 사람도 이번엔 불바다에 타, 사람 타는 냄새가 진동했고 산을 넘었다. 함박눈은 줄기차게 내렸다.
정오쯤 잠시 포탄이 멈추는가 했는데, 헬리콥터가 선무방송을 하며 투항하라는 전단지를 뿌렸다.
“너희들은 포위되었다. 저항하면 살아남지 못한다. 투항 전단지를 가지고 투항하는 사람은 살려주고 고향으로 돌려보낸다. 빨치산 여러분 부모 형제가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가십시오.”
동부전선에 있던 국군과 5개 경찰연대와 국군 2개 예비연대가 동원되었다. 그 외 의용경찰대나 사찰유격대를 합하면 무려 4만 명이 넘는 대병력이 지리산을 중심으로 덕유산, 광양의 백운산까지 물 샐 틈 없이 에워쌌다.
구사일생으로 눈보라 속에서 지리산 백두대간을 넘은 이현상 일행은 큰 바위 아래 모여 쓰러졌다. 춥다는 것 외에 아무 생각이 없었다.
누군가가 싸리나무를 한 짐 꺾어왔다. 재빨리 싸리나무로 불을 때기 시작했다. 여기가 어디지 날이 저물자 알 수 없었다. 새벽부터 눈 녹인 물 이외 먹은 것은 없었다. 배고픈 줄도 몰랐다. 무조건 도망가야 한다는 본능으로 앞만 보고 산을 기어 올랐다. 더 이상 오르막이 없고 내리막이 연결되자 백두대간을 넘었다는 감을 잡았다. 따라온 대원은 8명이었다. 한 대원이 싸리나무를 꺾어왔다.
싸리나무는 연기가 나지 않아서 산중에 불을 피우고 취사에는 안성맞춤이다. 불을 피우자 이제야 정신이 들었다. 싸리나무 모닥불에 둘러 앉아 불을 쬐며, 눈 녹은 물로 밥 짓는 걸 멀거니 쳐다보았다. 모두 다 먹는다는 본능을 잃은 사람들 같았다. 아무 말도 할 줄 모르는 좀비 같았다.
빨치산이 되려면 세 가지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총 맞아 죽을 각오, 굶어 죽을 각오, 그리고 얼어 죽을 각오. 지리산의 겨울은 혹독하다. 밤이면 체감온도가 영하 30℃까지 떨어진다. 골짜기를 스치고 지나가는 매서운 바람과 계속되는 토벌, 그리고 굶주림. 언젠가는 토벌대를 피해 얼음구덩이 속에 들어가서 반나절을 버틴 적도 있다.
1월18일 대공습 전까지 각 계곡에 숨어 밤낮으로 계속되는 정치학습과 오락회. 그 와중에도 산 생활은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다른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세뇌되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빨치산에게도 더 무서운 것이 있었다.
이제 민족 해방이니 평등이니 하는 것보다 보다 희망이 없어진다는 현실이었다. 세 가지 죽을 각오를 한 빨치산들에게도 그것은 너무도 두려운 사실이고 현실이었다.
당장 눈앞의 싸리 모닥불도 반합에 끓고 있는 밥물에도 군침이 넘어가지 않았다.
살아남은 대원 8명은 이현상만 바라보는 듯했다. 갖고 있는 무기는 아카보노 소총 세 자루에 탄약 몇십 알이 전부였다. 무엇보다 대원들 손발이 모두 성치 않았다. 낡아 발가락이 나온 신을 전선 줄로 동여매었거나 짚을 감아 동상이 심했다.
눈을 떠서 물 대신 먹었고 등을 기대고 앉아 서로의 체온으로 버티며 하루 종일 동상에 걸린 언 발을 주물렀다.
다행이 대원 중에 식량으로 콩을 지고 온 이가 있었다.
싸리나무 불에 콩물이 끓어 반합 뚜껑을 부글부글 넘쳤다.
53년 7월 휴전협정 타결 소식을 들은 빨치산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 낙담했다. 인민의 낙원 북으로 돌아가리라 기대했건만, 협정문에는 조선인민유격대의 지위나 안전 귀환에 대해 단 한 줄의 언급도 없었다.
북의 김일성은 남한 내 빨치산을 인정하지 않았다.
“빨치산은 남한 내에서 스스로 결성한 게릴라 부대” 라고 우겼다.
고약하게도 국군 토벌대는 "빨치산은 버림 받았다!"는 문구를 큼지막하게 인쇄한 전단을 뿌리며 빨치산들의 사기를 저하 시키며 귀순을 요구했다.
정전협정 체결 1주일 후 8월 3일, 평양에서 박헌영과 이승엽이 미국의 간첩이라는 죄명과 전쟁의 책임을 물어 처형되었다는 소식이 지리산까지 날아들었다. 박헌영과 이승엽은 이현상의 정신적 우상이 아닌가?
그야말로 사면초가 지리산 조선인민유격대는 심한 내분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은 반공포로 출신과 전향한 빨치산을 위주로 구성된 618 토벌대를 이끌고 있었고, 차일혁은 빨치산의 정보를 손바닥 보듯이 읽고 있었다.
경성의전 출신으로 빨치산 의무관이된 의사 이형련을 생포했다. 이형련은 파상풍으로 죽기 직전이었다. 차일혁은 죽어가는 이형련에게 자신의 피를 수혈해 주고 부인도 만나게 해주었다. 이형련은 감동하여 죽으면서 마지막으로 이현상이 숨은 곳을 알려 주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차 대장, 우리가 왜 싸웠는지 모르겠소. 인민유격대 사령관 이현상은 평당원으로 강등당하여, 지금 빗점골에 감금되다시피 된 상태이오. 마지막으로 이현상 동지를 부탁하오!”
차일혁은 이현상이 완전히 실권을 잃고 반 감금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토벌대장 차일혁은 빗점골 일대에 빨치산 출신 618부대 수색조를 매복시켜, 9월 17일 야간에 빨치산들과 한동안 어둠 속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무전 연락을 받고 차일혁 토벌대장이 현장으로 달려갔을 때는 빨치산 4명이 사살되었고 포로 2명을 사로잡았을 때였다. 포로 2명은 시체 한 구를 이현상이라고 증언했다.
이현상의 몸에서는 소련제 권총 한 정과 일기와 한시가 써진 수첩 그리고 늘 지니고 다닌 염주가 나왔다.
이현상의 시신을 친척들이 인수를 거부하자 차일혁 대장은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님을 불러 불교식으로 화장해 자신의 철모를 벗어 이현상의 뼈를 Ml 소총으로 곱게 빻아 섬진강에 유골 가루를 뿌렸다. 이 일로 인해 상부로부터 질책을 받아 618 부대원들에게 태극무공훈장이 3개나 수여되었지만,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은 하나도 받지 못했다.
이현상은 북한의 제1호 애국렬사증을 추서받고 애국렬사릉에도 가장 먼저 묻힌 인물이 되었다. 1990년 8월에는 조국통일상도 추서되었다.
비록 평당원으로 강등되었지만, 그래도 간첩으로 몰려 김일성에게 처형된 박헌영과 이승엽에 비해 행복한 사후를 맞은 셈이다.
빨치산 토벌을 위해 정부에서 화엄사를 전체를 소각하라는 명령에 토벌대장 차일혁은, "절을 태우는 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을 세우는 데는 천년 이상의 세월로도 부족하다."라며 대웅전 문짝만 뜯어 태웠다.
토벌대장 차일혁은 사후, 1958년 조계종으로부터 화엄사를 지킨 것에 대한 공적비를 세워 추모재를 드리고 있다. 화랑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등 호국영웅 10인으로 선정 차일혁 영원우표永遠郵票도 발행되었다.
다시 한번 차일혁의 외침을 들어보자.
이른 아침 들판에 나가 일하는 농부에게 물어보라,
공산주의가 자본주의가 뭔지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는지
지리산 싸움에서 죽은 군경이나 빨치산에게 물어보라
공산주의를 위해 죽었는지 자본주의를 위해 죽었는지.
할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겠는지?
그들은 왜 죽었는지도 모른다고 할 사람이 태반일 것이다.
이 싸움은 어쩔 수 없이 하지만, 후에 세월이 가면 다 밝혀질 것이다.
미국 소련 두 강대국 사이에 벌어진 부질없는 골육상쟁 동족상잔이었다.
- 토벌대장 차일혁-
1963년 11월 12일에 경상남도 산청군의 지리산 기슭에서 마지막 빨치산 이홍이가 사살되고 정순덕은 생포되면서 비운의 빨치산은 완전히 지리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