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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마루금
작성일 : 2025.06.22 10:52 작성자 : 김하기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 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꽃 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유장한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몸이 달아 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려거든
불일폭포의 물방망이를 맞으러
벌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 이원규 -
태초에 마고할미가 하늘을 열어, 궁희 소희 태어나고 황궁께서 산을 주고 청궁께서 물을 주어 백두에서 지리까지 한반도를 만들었다.
환웅이 기원전 2457년(上元 甲子) 4482년 전 10월3일, 삼위태백에 신시神市란 나라를 세우고, 아들 단군왕검이 1,908살에 아사달(구월산) 산신이 되었다.
한반도 대한제국의 오악은 북악 백두산 · 서악 묘향산 · 중악 북한산 · 동악 금강산 · 남악 지리산이었다.
우리는 삼위태백에 천제단을 쌓고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지리산은 남쪽의 산으로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다.
지리산은 남방 백두대간이 웅비 한 곳이자, 북방 백두에서 두류頭流한 기상이 마루금을 따라 내려와, 내륙 넓은 곳에 터를 잡아 접화군생接化羣生, 천왕봉에서 韓國人의 氣像 여기서 發源되었다고 했다.
천왕봉에서 노고단에 이르는 백두대간 따라 걷는 거리는 25.5km로 60리이고, 둘레는 320km로 800리쯤 된다. 백두대간 지리산 마루금에는 1,500m가 넘는 20여 개의 솟은 봉우리가 천왕봉(1,915m), 반야봉(1,732m), 노고단(1,507m)의 3대 주봉을 사이에 두고 마치 병풍처럼 펼쳐져 있으며, 칠선계곡, 한신계곡, 대원사계곡, 피아골, 뱀사골 등 골과 마루를 이루고 파도처럼 흘러 뻗어 사방 어디서라도 누구나 들어올 수 있어 예로부터 어머니의 품이라고 여겼다.
지리산智異山은 "지혜로운 사람(異人)의 산"이다. 문헌에는 智異山 · 智理山 · 知異山 · 地異山 · 地理山 다스리다 다르다 등과 같이 소리는 같되 한자만 다르게 기록되었음을 볼 때, 지리산은 순우리말에서 비롯된 지명이라 할 수 있다. (智異山이라 쓰고 지리산이라 읽는다.)
지리산이 내포하고 있는 뜻은 다름을 알고, 차이를 안다, 즉, 그 다름과 차이를 서로 인정한다는 뜻 아닌가? 다시말해 공자가 말한 화이부동和而不同, 대단하고 엄청난 철학이 내포되어 있다. 이 다름과 차이를 한마음 일심으로 원융회통圓融會通하는 우리의 백두대간 인문기행의 철학인 환웅이 이 땅에 나라를 세운 홍익인간弘益人間에서 나왔음을 증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북방문화 천부인이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왔다고 하여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불렸고 남방문화가 웅비하여 북으로 올라가 지리산이라 불렀다.
신라 5악 중 남악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하여 지리산智異山이라 불렀고, 또 옛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方丈山으로도 불렸다.
조선 선비들은 지리산智異山이란 지명보다 ‘두류산頭流山’이라 불렀다. 이는 일연 말한 삼위태백(묘향산)을 백두산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두산에서 흘러 내려온 산, 즉 북방문화가 낙남정맥을 타고 올라온 남방문화와 어우러져 터를 잡은 곳이란 말이다. 일찍이 최치원이 말한 풍류風流의 참뜻 즉 정체성을 확인하는 지명이기도 하다.
자고로 어질고 인자한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고 했다. 산과 물은 그런 의미에서 같다고 할 수 있다. 바다는 산에서 내려오는 계곡물과 시냇물로 강물을 이루고 모두를 받아들인다. 서로 다른 물이 바다에 모이면 이제는 더 이상 서로가 아닌 하나다.
불로장생 도인을 꿈꾸며, 혹은 난리를 피해, 또는 호연지기를 위해 들어온 사람 등 모두 제각각의 사정으로 들어왔지만, 산을 선과 악, 좋고 나쁨을 구별하지 않는다. 산은 자신이 품에 안은 모든 것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 산에서 하나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산과 물은 둘이 아니다.
태고에 마고 할미가 하늘을 열고 한반도에서 산신령 산신이 되었다. 반만년 전 환웅 · 단군왕검이 나라를 다스리다, 산으로 들어가 돌 산신이 되었듯이, 사람들은 죽으면 돌 산신이 되기를 기원했다. 당시 한반도에 가장 많은 선진화된 고인돌 문화가 자리 잡는다. (전 세계의 40%) 북부여를 세운 해모수가 웅심산으로 들어가 산신이 되었고 신라 석탈해가 토함산 산신이 되었다.
불교가 들어오면서 산신이 부처나 보살이 되었다. 금강산에는 법기보살이, 오대산에는 문수보살이, 낙가산에는 관음보살이 산신이되어 중생을 제도한다.
지리산에 자리잡은 불교 화엄사상은 ‘이 세상 삼라만상 모두가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의 원인이 되나 서로 대립하지 않고 대립을 초월하여 하나로 융합하고 있다’는 큰 사상을 심었다. 이 화엄사상은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 온 환웅의 홍익인간과도 일맥상통한 곳이 지리산이다. 그래서 신라의 천재 최치원은 당나라를 두루 살펴본 후 신라로 돌아와 낙랑비 서문에 國有玄妙之道曰風流국유현묘지도왈풍류라고 했다.
國有玄妙之道曰風流 設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羣生
지리산은 세 개의 도 유 불 선을 아우를 만큼 넉넉하다고 해서 어머니의 산이라고도 불렸다.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지리산의 정기를 받기 위해 모여들었다. 공부하기 위해, 해탈과 심신을 수련하기 위해, 피병으로, 큰 뜻을 이루려고 했으나 이루지 못했던 사람, 관리들의 횡포를 견디다 못해 숨어든 사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쫓기는 사람, 반역을 일으키려다 도망친 사람, 초근목피를 찾아,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찾아든 사람들이 지리산으로 모여들었다.
백두대간을 따라 영남과 호남의 4대 관문이 있었는데, 안음의 황석산성, 진안의 웅치, 남쪽의 석주관과 북쪽의 팔량치는 고대부터 전략적 요충지였다.
황석산성은 신라가 가야를 점령한 후 백제와 맞서면서 축조한 것이다. 팔량치 넘어 남원의 교룡산성은 백제가 신라를 막기 위해 세웠다. 또한 후백제 견훤과 고려 태조 왕건의 격전지였다.
고려말 이성계는 경상도 전라도를 침탈하는 왜구를 지리산에서 소탕했다. 임진왜란 왜군은 곡창 호남을 수탈하기 위해 3만의 대군으로 진군하였으나 진주성 김시민과 남원성 전투, 구례 석주관을 넘지 못했다. 구한말 영남으로 진격하려는 호남의 동학농민군이, 북쪽에서는 운봉을 사이에 두고 관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무엇보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전후해 빨치산의 활동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이 아직 아물지 않은 곳이다.
우리의 백두대간에는 환웅이나 단군왕검처럼 산으로 들어가 산신이 된 산신령이있다.
지리산 천왕봉에는 마고할미를 모신 성모사 사당이 있었고, 성모 석상을 봉안해 제사를 받들었다.
노고단에는 신라시대부터 선도성모를 모시는 남악사가 있었다. 성모는 나라의 수호신이었고, 매년 국태민안과 풍년을 비는 제사를 지내왔다. 후대에 성모사의 성모는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로 여겨졌고, 남악사의 성모는 신라 박혁거세의 어머니로 신앙되었다. 지리산은 결국 신라와 고려의 시조를 잉태했던 산이었던 셈이다.
지리산 성모는 나라의 시조를 낳은 것만 아니라, 반야봉의 반야 도인을 만나 혼인하여 8명의 딸을 낳아 무속을 가르쳐 팔도에 하나씩 시집 보내 무속을 행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고대에서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백두대간의 역사와 철학 · 종교와 삶이 고소란 이 간직된 지리산이다.
지리산 마루금
지리산
오를수록
가슴 저린 산
서럽게 서럽게
눈물나는 산
쫓기던 이 좇던 이
영문 없이 끌려간
핏덩이까지
아물어간 상혼에도
고통은 남아
유월 짙푸른
한을 삭이고
용서하고 용서받을
하나됨을 바라
초로에 반백이 다 되도록
골마다 영마다
바람으로 흐느끼는
지리산은 서러운 산 <권경업>
국립공원 이사장을 지낸 산악 시인 권경업은 동족상잔의 지리산을 서러운 산이라 흐느껴 외쳤다. 권 시인은 필자와 학창 시절 같이 산을 오르던 악우이기도 하다. 권 시인의 지리산을 읊고 나니 단번에 한반도 비운의 사나이 영남알프스 일명 남도부 하준수와 지리산 이현상이 생각난다.
반만년 민족사에서 지리산이 가장 첨예한 이념 대립으로 동족상잔의 공간이었던 것을 우리는 다 아시겠지만,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지리산은 예로부터 백두대간을 기준으로 남과 북으로 나누었는데, 백두대간 남쪽을 겉지리 또는 외지리라 불렀고 구례· 하동· 산청이 자리 잡았다. 북쪽은 속지리 또는 내지리로 남원· 함양이 이에 속한다.
함양· 남원은 흥부전· 춘향전 등 소설의 배경이 되었고 지리산 800리 둘레길 장승은 변강쇠전을 남겼다. 지리산의 권선징악은 흥부전의 강남 제비가 박씨를 물고 왔고 놀부는 철퇴를 맞고 개과천선하니 가히 한반도의 희로애락 삶이 아닐 수 없다.
이병주의 지리산 · 이태의 남부군 · 조정래의 태백산맥 · 문순태의 달궁과 피아골 · 서정인의 철쭉제 · 박경리의 토지 등 현대소설의 배경이 되었다. 대부분 이데올로기의 갈등과 좌우 대립에 따른 뼈아픈 동족상잔의 다툼을 다루고 있다.
백두대간 지리산은 인문학의 보고다. 문학뿐만 아니라 우리의 멋진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다 아시다시피 대표적인 소리 판소리다. 동편제는 남원 · 구례의 전라도 동북지역을 중심으로 전승된 소리다. 서남지역 보성 · 광주 · 나주에 전승된 서편제와 비교해 발성을 무겁게 하고 소리의 끝을 짧게 끊는다. 동편제 소리는 바로 지리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리산의 계곡과 폭포수 곳곳이 모두 소리 공부터였기에 웅장하고 선이 굵은 남성적인 소리가 나온 것이 아닐까?.
동편제의 발상은 신라 거문고의 고수 옥보고와 불교 범패의 대가 혜소와도 무관하지 않다. 옥보고는 지리산 운상원(남원)에서 50년 동안 거문고를 탔다.
불교 음악인 범패는 하동 쌍계사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쌍계사를 창건한 혜소는 성품이 꾸밈 없고, 빈부귀천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을 똑같이 대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이 몸소 닦은 실천행과 아울러 범패를 중생제도의 방편으로 삶았다.
날 좋은 날에는 천왕봉에서 한반도 남쪽 한려수도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고, 사방을 둘러보면 북쪽으로 백두대간을 따라 60km 떨어진 산 넘어 산 덕유산까지 보인다. 청명한 날에는 직선거리로 무려 100km나 떨어져 있는 달구벌 팔공산이 산 넘어 산으로 눈에 들어오고, 밤이 되면 별빛을 받아 진주시가 유난히 빤작인다. 진짜 덕을 많이 쌓은 사람은 천왕봉에서 245km 떨어진 제주도 한라산까지 아스라해 정말 남방 어머니같이 한반도를 두루두루 살피는 산이다.
그래도 지리산에 오려거든
세석평전의 철쭉꽃 길을 따라
온몸 불 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고
최후의 처녀림 칠선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지리산에 오려거든
섬진강 푸른 산 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고
연하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 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이원규의 시 그래도 지리산에 오려거든을 다시 한번 읊고 나니 걸음이 절로 걸어지듯, 천왕일출부터 섬진청류까지 백두대간 지리산 마루금을 따라 우리 한번 힘차게 걸어보자!
천왕일출天王日出, 태초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붉디붉은 해가 불쑥 솟아올라, 한반도의 기상 천왕봉에서 발원했다.
노고운해老姑雲海, 섬진강에서 피어오른 구름과 달궁 계곡의 이슬이 백두대간을 타고 바다같이 노고단을 넘어가며 노고운해를 이룬다.
야생화가 많이 자생하고 있는데, 특히 원추리가 많다. 여름에 노고단에 오르면 마고 할미의 두 딸 궁희와 소희의 치마 같은 노란 원추리꽃을 볼 수 있다.
반야낙조般若落照, 반야봉은 백두대간 지리산 어느 능선에도 속해 있지 않고 주능선에서 살짝 떨어져 우뚝 솟았다. 지리산 마루금을 따라 어느 곳에서도 잘 보이며 지혜의 반야 도인이 살았다고 한다. 반야봉 반야 도인은 남자다, 그래서 그런지 지리산 다른 봉우리들보다 훨씬 거대하고 홀로 우뚝 서 있는 모습이 남자를 상징하듯 우람하다. 다른 봉우리에 기거하는 여인들 사모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벽소명월碧宵明月, 벽소령에서 보는 시린 달, 밝은 달. 겹겹이 쌓인 산 위로 떠오르는 달빛이 희다 못해 푸른빛을 띤다. 달빛에 걷던 사람은 걸음을 멈추고 벽소한월碧宵寒月이라고 했다. 필자는 젊은 시절 혼자 야간산행을 하다 달빛에 취해 그냥 그 자리에 멈춘 적이 여러번 있었다.
연하선경煙霞仙景은 지리산 25.5㎞ 백두대간 마루금을 걸어본 사람이면 누구나 가장 고즈넉한 길이라며 빠져든다. 연하봉과 촛대봉 봉우리를 걷고 있으면 가끔 발 아래로 구름이 흘러가는데, 마치 신선이 된 듯한 착각을 일어 긴다. 필자의 경험으로 아무리 걸어도 힘든 줄 모르고 걷고 있어도 걷고 싶은 길이다.
이 길을 걸은 비운의 사나이 이현상도 필자와 같은 생각을 했을까? 지리산 3편에 서 이현상과 차일혁을 만나 그의 못다 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쌍계사에서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높이 60m, 폭 3m로서 지리산 최대의 웅장한 불일 폭포가 나타난다. 신라 최치원이 청학을 타고 금방이라도 나타날 것만 같고 보조국사 지눌 스님의 염불 소리가 폭포 속에서 들리는 듯 귀를 세운다.
세석철쭉細石躑躅은 천상의 화원이다. 철쭉은 말할 것도 없고 노란색의 동이나물 · 희색의 외갓냉이 고산에서만 자라는 나도옥잠화 · 금강애기나라도 볼 수 있다.
이상한 것은 세석평전의 철쭉은 다른 곳에 자생하는 철쭉보다 연분홍색이다. 아마 빨치산들이 피를 많이 흘리고 죽어 연분홍색이 되었을까?
직전단풍稷田丹楓, 시인 이원규는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 몸이 달아 오른 절정으로 오라고 했다.
칠선계곡은 설악의 천불동계곡, 한라산의 탐라계곡과 함께 남한의 3대 계곡으로 불린다. 지리산 최후의 원시림을 끼고 있는 칠선계곡은 7개의 폭포와 33개의 소가 펼치는 선경이 마천면 의탕에서 천왕봉까지 이른다. 칠선계곡에는 나무꾼으로 와야 선녀를 만날 수 있다.
이처럼 지리산은 하나가 아니다. 섬진청류贍津淸流 섬진강 푸른 물 속에 또 하나의 거대한 지리산이 면면히 흐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