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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등대이야기 연재> 14. 위기와 반전/조경호

작성일 : 2025.06.17 11:51

4. 위기와 반전

 

(1) 화려한 꽃과 당대 최고의 정객들

 

1960년 봄 내가 격렬비도 등대에서 조근 생활을 마치고 팔미도등대로 돌아오니 등대장은 김득주(1916년 출생 193341일 조선총독부 체신국 고원 입사, 1934년 체신국 인천 해사 출장소 표식과 서기로 근무하면서 관내 8개 유인등대 등대장 역임)로 바뀌었고 정인근씨는 군산지방 해운국 관내 등대로 발령받은 상태였다. 그리고 김득주씨는 1949년 인천항로표지관리소 창고관리직으로 근무할 때 나의 상관(표식과 서기)이었던 분이다. 이분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사진기를 갖고 작품 사진을 찍어 온 사진작가였고 항상 말쑥한 차림을 한 중년 신사였다.

 

중견 작가의 노련함으로도 흑백사진으로는 팔미도의 현란한 봄을 다 담을 수는 없다. 새파란 바닷물이 밀려들어 오는 들쭉날쭉한 해변에 검고 하얀 바위와 바다의 경계선에서 푸르게 물들이는 해당화, 그 검고 휜 바위의 암벽서부터는 바닷바람에 구불구불하게 휘어진 붉은 해송, 섬의 허리에서부터는 곳곳하게 서 있는 붉은 소나무인 적송에서 펼쳐지는 푸른 솔잎의 향기는 팔미도가 봄철에 몸단장하는 방법이다.

 

섬 동쪽의 비탈진 경사면 숲에 자리 잡은 올망졸망한 분홍빛 진달래, 백사장 모래등에서 관사로 올라오는 아랫길과 윗길은 항상 바람에서 일어난 바람을 안고 사그락거리는 소사나무의 군락, 그 해변에서 중턱쯤 오르면 윗길과 아랫길 사이에 우거진 밤나무 숲속, 그 그늘에서 바라보는 바다, 관사로 들어오면 휜 돌담과 어우러진 산벚나무, 인천 송도가 바라다보이는 경사면에 아카시아 숲속 물새들의 군무, 사무실에서 발전실로 올라가는 길 양옆으로 개나리 울타리와 발전실과 충전실 주위에 무궁화나무, 등탑 아래 푸른 양탄자처럼 깔려 있는 잔디밭 그리고 관사의 휜 담장 아래를 둘러친 긴 꽃밭은 팔미도가 붉은 핏발이 맺히도록 몸부림치는 봄날에 들려 오는 아우성이다.

 

특히 흰 담장 아래 긴 꽃밭에서 피어나는 백일홍과 맨드라미, 분꽃과 봉선화, 해바라기와 나팔꽃 등은 팔미도의 온갖 나비들을 불러 모은다. 나는 팔미도에 이렇게 다양한 종류들의 나비가 있는 줄 몰랐다. 아이들의 여름방학 곤충채집을 해 주면서 나비들의 이름을 몰라서 애를 먹은 적이 있었다.

 

팔미도등대 관사의 꽃밭은 아내가 만든 꽃밭이었고 아내가 밭을 갈고 이랑을 오려서 꽃씨를 뿌린 짜투리 땅은 아내의 정서가 일렁거리던 곳이다. 꽃씨를 뿌리고 가꾸는 것은 온전히 그녀가 한 것이다. 아내는 관사에서 아주 가까운 텃밭에 채소를 심지 않는다. 꽃씨를 받아서 씨앗을 뿌리고 가꾸는 것까지 그녀가 섬에서 유일한 낙이었다. 1960년 봄, 이 꽃밭을 찾아온 나비만큼이나 유명 정치 정객들이 팔미도등대를 찾아온 해였다. 팔미도의 여름은 피서를 위해서 일반인들과 유명 인사들이 많이 방문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419혁명이 일어나자 장면 내각 수반이 조각되기 이전 유명한 정객들이 팔미도를 찾아와 회의를 했다. 그분들이 회의한 장소가 현재도 원형을 유지하는 팔미도 등대 사무실이다. 그리고 그날 방문한 정치 정객들이 서명한 방명록이 팔미도 등대 사무실에 비치되어 있다. 팔미도 등대 사무실에는 그런 유명 인사의 방명록뿐만 아니라 1945815일 광복 이후부터 팔미도 등대의 일을 기록한 등대일지가 비치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의 기록들이 지금까지 보관되어 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이듬해인 19614월에 선미도 등대로 발령받아 선미도 등대에 근무하게 되었다.

 

1) 태초의 원시림을 간직한 선미도 등대

 

선미도 등대는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 북리 산 186- 2번지이다.

인천지방 해운국 관내 등대이며, 국내에서 가장 높은 곳 (해발155.3m)에 위치하고 19404월 건립 점등하였다.

등탑(백색 철근콘크리트조 높이 9.5m) 등명기는 3등급 푸레넬식 프리즘 렌즈 중추 회전식이며, 광원은 전등(백열 전구 110V-500W), 등질은 12초에 1섬광, 23마일 거리까지 불을 비춘다.

우리나라 연안 등대가 설치된 섬 중 비교적 큰 섬에 속하지만 등대가 건립되기전에는 악(), 또는 악험도(惡險島)라 하여 사람이 살 수 없는 섬이라 하였다.

 

하지만 6·25 한국전쟁 이후까지 피난민들이 입도하여 약 10여 호의 주민이 섬의 동남쪽에 촌락을 이루고 살았다. 1970년부터는 섬 주인 1가구가 염소, 멧돼지를 키우며 살고 있다. 유인 등대가 건립되고 등대원이 거주하면서 섬의 이름을 개칭하였으며, 섬의 지세가 험하여 사람이 살 수 없는 섬이지만 꼬리가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인 선미도(善美島)로 개칭하였다.

 

내가 발령받아 부임하던 19614월에는 등대 반대편 즉 동남쪽 덕적도와 마주 보이는 곳에 촌락이 있었다. 나는 선미도에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일제 강점기 전부터라고 생각한다. 선미도는 무인도이지만 면적이 넓어 밭을 개간할 수 있고 식수가 나고 사람이 살 수 있는 요건을 갖추었다.

 

등대 건립 공사에 참여한 덕적도 주민 중 일부가 공사를 마치고 그대로 선미도에 정착하였을 것이다. 또는 덕적도 주민들이 선미도에 나무를 하러 왔다가 덕적도와 배로 다닐 수 있고 식수가 나고 하니 몇 사람들이 입도하여 살았는지도 모른다.

 

구전에 의하면 선미도에는 석탄이 생산되어 석탄 생산 작업을 하였다고 한다. 선미도 서쪽 해안가에는 석탄을 켄 흔적이 있다. 1957년부터 선미도 등대에 근무하는 윤성구(1931년 출생)의 조부가 선미도에 살았다고 하니 일제 강점기 이전부터도 사람이 살았을 것이다. 그는 20대 초반에 목덕도 등대에 정순종씨와 같이 근무하면서 등대에 사용하는 땔감을 구하러 선미도를 온 일도 있다고 한다.

 

선미도에는 주민들이 거주하던 초옥 터가 남아 있고 그들이 개간하여 재배하였던 밭들의 흔적이 있으며, 선미도에서 땅콩을 생산하고 땔나무를 덕적도에 팔거나 산봉우리에서 갈매기 배설물이 섞인 회색토를 거름으로 하여 팔았다고 한다.

 

태초에 원시림을 간직하고 있는 선미도는 섬의 형세가 위험하고 해안가는 절벽으로 접근이 어려우며, 위험한 독충과 지네, 뱀 등이 많은 섬이다. 악험도라는 원래의 섬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람이 살 수 없었던 섬이였다. 섬은 비탈과 바위 벼랑으로 되어있고 숲은 사람이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우거져 있다. 또한 곤충 도감에 나와 있지 않은 곤충과 독충들이 많이 살고 있다.

 

특히 수많은 종의 나방류와 다리가 붉은 왕지네는 선미도의 습한 부엽토나 돌틈에 우글거렸다. 간혹 등대 관사 방에도 나타나곤 한다. 뱀도 상당히 많았는데 독사는 없고 전부 구렁이 종류였으며, 특히 먹구렁, 구렁이가 많았다. 뱀이 동면하는 월동기만 빼고 등대 관사 주변 돌담에서 12마리를 볼수 있다. 매일 보는 뱀들이니 무섭지는 않았지만 부엌이나 창고로 들어와 있을 때는 징그러웠다.

 

한번은 등탑에 올라가려고 문을 열고 들어가니 거의 3m정도 크기의 먹구릉이가 또아리를 틀고 있어 놀란 적도 있었으며, 무더운 여름철에는 바닷가에서 헤엄을 치는 뱀도 있으며, 덕적도에 사는 주민 중 나무하러 왔다가 백사(白蛇)를 본 적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농어가 많이 잡히는 여름철이라 해도 부식이 떨어졌을 때를 제외하고는 낚시도 하지 안했다.

 

선미도는 섬이 커서 나무도 약초도 많았지만 우리나라 최북단에 서식하는 대나무 숲이 있는 곳이다. 대나무 숲이 있는 곳에 마을이 형성된 것은 선미도에서 유일무이하게 선창 구실을 하는 자갈밭 해변이 있는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지금은 이 선창에서 등대까지 모노레일이 설치되어 있다.) 또한 유일하게 큰 샘이 있어 물이 나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한 선미도에 발령을 받아 근무하고 있었다. 그런데 1961516일 군사혁명은 나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고 말았다. 군사혁명위원회에서는 군대에 입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19618월에 면직시켰다.

 

그때 나는 등대 생활에 많은 회의를 느끼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6·25 한국전쟁 당시 등대원은 군대 입대 보류 대상이었다는 탄원을 제기하지 않했다. 이유는 아내와 아이들과 떨어져 생활해야 한다는 생각에 등대 직원으로 많은 회의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셋째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어 아내는 네 아이들의 교육 문제와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인천으로 나가 있었다.

 

나는 면직되어 선미도 등대에서 나와 양계장을 운영해 볼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아내와 함께 양계장 견학을 다녔다. 그리고 양계장을 해보기로 하였다.

 

그런데 소청도 등대 등대장으로 퇴임한 큰 매부가 등대 생활이 싫어서 사직하더라도 그렇게 부당하게 해고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큰매부가 탄원서를 직접 작성하여 군사혁명위원회에 제출하였다. 그 탄원서는 정당성을 인정 받아 나는 다시 복직되었다.

 

그때 아내는 양계장을 운영하면서 아이들을 교육시키겠다고 했다. 그리니 나 보고는 조금 더 고생해 달라고 했다. 양계장이 잘되면 그때 나와서 함께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것이다. 아내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고 나는 당분간 등대 생활을 하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19623월 기능직 4등급으로 목덕도 등대에서 근무하게 되었고 아내는 인천에서 양계장을 운영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