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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대첩 충무공 김시민
작성일 : 2025.06.09 09:40 작성자 : 김하기
65, 백두대간 인문기행
진주 대첩 충무공 김시민 1편)
1604년(선조 37년)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봉해졌으며, 상락군上洛君에 추봉되었다.
1702년(숙종 35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상락부원군으로 추봉되고,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하사했다. 충민사忠愍祠에 배향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임진왜란 김시민의 진주 대첩은 권율의 행주 대첩 · 이순신의 한산 대첩과 함께 3대 대첩이라고 불리는 것은 모두 아는 역사다.
우리의 바다엔 충무공 이순신이 있었고, 왜가 낙남정맥을 넘어 곡창 호남으로 가려면 반드시 김시민이 지키는 진주성을 통과해야 했다.
단번에 한양을 점령하고 조선의 임금 선조에게 항복을 받는다는 왜 관백 풍신수길의 예상은 빗나고 말았다. 임금 선조의 몽진으로 임진왜란이 장기전으로 돌입했기 떼문이다. 부랴부랴 풍신수길은 계획을 수정하고 식량 확보를 위해 호남 점령을 지시한다.
왜군이 호남으로 진출하는 길은 두 갈래였다. 빠르고 쉬운 길은 바다를 통한 뱃길이었지만, 조선의 바다엔 이순신이 있었고, 조선 수군에게 연패를 거듭한 왜군은 한양 평양까지 진격한 정예군을 후퇴시켜, 남쪽 진주성을 함락한 뒤 호남 진출과 이순신의 수군 통제본부가 있는 통영을 육지에서 공격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평양 쪽으로 진군하던 정예군이 김해로 재집결하기 시작하였고, 3만의 왜군은 처음 낙남정맥을 따라 쉽게 조선군을 제압하며 진주로 향했다.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진영 창녕 함안의 조선군은 전의를 상실한 채 도망가기에 급급했다.
왜군은 의령에서 뜻밖에 복병 곽재우의 의병을 만났다. 왜에서는 겪어보지 못한 의병이었다. 대체로 왜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장군들은 공을 세우기 위해 선봉에 서고 백성은 안전한 곳으로 피하는 게 관례였다. 하지만 조선은 반대였다. 관리들은 도망가고 백성은 무기를 들고 앞장섰다. 몇 번 의병장 곽재우의 후방 기습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보았고 무턱대고 진군해 나갈 수가 없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까지 진주 목사는 김시민이 아니었다. 왜군이 낙동정맥을 따라 경상도 남부를 휩쓸자, 진주 목사 이경은 부하들을 데리고 지리산으로 도주하고 만다.
선조와 함께 몽진 길에 오른 학봉 김성일은 늘 바늘방석이었다. 피난 가는 임금 선조 일행을 바라보는 백성들의 눈초리도 예사롭지 않았다. 선조를 수행하던 관리들도 하나둘 사라져 나중엔 궁녀와 병사를 합쳐 겨우 17명에 밖에 되지 않았다. 일개 고을 사또의 행차보다 초래했다.
학봉 김성일은 지난날을 깊이 반성하며 자신을 돌아보았다.
“전하, 통신부사 신이 관상을 좀 보는데, 관백 풍신수길은 눈이 쥐와 같고 생김새는 작은 원숭이 같아 두려워할 위인이 못 됩니다. 괜히 미리 겁먹고 전쟁이 일어난다고 준비하면 백성들의 동요가 염려되옵니다. 우리 조선은 몇백 년 동안 전쟁이 없었나이다. 그 이유는 대국 명나라가 저렇게 든든하게 우리 조선을 지켜 주기 때문이라 사료되옵니다.”
”오. 그러하오, 김 공!“
선조는 김성일의 말에 감탄하며 안도의 한숨을 뇌 쉬었다.
임금 선조의 몽진 길에서 뒤늦게 임진왜란은 자신의 책임이 크다는 것을 뉘우치며, 김성일은 선조에게 초유사가 되어 남쪽으로 내려가 의병을 독려하여 항전하겠다고 지원한다. 선조는 당장 김성일을 처형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몽진 길 김성일에게 수행하는 사람 하나 없이 경상 우병사 겸 초유사 직책을 내린다.
학봉 김성일은 왜군들이 이미 점령한 경상남도를 돌며 발이 부르트도록 도망간 관리들을 찾아다니며 항전할 것을 당부했고, 나중에 진주성에서 병사하고 만다.
진주 목사 이경이 부하들을 데리고 지리산에 숨어들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으나 이미 병사한 후였다. 김성일은 부장인 김시민에게 의병장 정인홍 · 곽재우의 봉기한 소식을 전하고, 진주성을 지켜줄 것을 당부한다. 의기투합한 김시민이 진주성으로 돌아와 목사직을 대신하며 급하게 성곽 보수 해자 정비, 염초 150여 근과 총통 70여 포를 정비하여 3,800명의 관민을 모아 훈련에 들어갔다.
하늘은 돕는 자를 스스로 돕는다고 했던가, 진주성의 김시민에게 용기백배할 기쁜 소식이 날아왔다. 옥포해전에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이 왜군의 전함 26척을 격파했다는 임진왜란 최초의 승전보가 날아온 것이다. 김시민은 전라 의병장 최경회, 경상 의병장 곽재우 등과 전령을 주보 받으며 왜군의 이동과 전력을 빠짐없이 공유해나갔다.
김시민은 발 빠른 특공대를 조직해, 사천 고성 진해까지 출격해 왜장 평소태를 사로잡아 큰 공을 세우자, 선조는 기뻐하며 진주목사로 임명했다.
김시민에게 급한 일은 무엇보다 실의에 빠진 진주성 내의 부하 군사들과 백성을 모아놓고 싸울 것을 호소했고, 관민이 일심으로 합심하면 바다의 이순신 모양 반드시 이긴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일이었다.
힘겹게 도망가던 병사를 이끌고 창원에서 왜군 1만에게 수수깡처럼 패배한 경상 우병사 유숭인이 후퇴하며 진주성 안으로 합류할 것을 요청해 왔다. 진주성 안엔 3,800명의 관군이 김시민과 혼연일체가 되어 한 몸처럼 전쟁준비를 해왔다는 사실을 안 초유사 김성일과 의병장 곽재우는 급히 김시민에게 경상 우병사 유숭인을 받아들이지 말 것을 권유한다. 이유는 진주성 목사 김시민보다 경상 우병사 유숭인의 직급이 높아 작전 지휘 계통에 혼선이 생길까 염려했던 것이다. 결국 유숭인과 함께 사천 현감 정득설은 10월4일 왜군 선발대 일만과 성 밖에서 싸워 명예로운 전사를 하고 만다. 사람들은 그를 백마장군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10월 6일, 3만의 왜군 본대가 진주성 남쪽에 집결했다. 왜군은 진주성이 견고한 성이기는 하나, 공성전에 능한 왜군은 쉽게 함락하리라 판단했다. 진주성 동쪽은 남강이 흘러 접근이 불가했고, 북쪽과 서쪽은 외곽의 조선 의병 부대가 배후를 위협하고 있어서 바로 공격하지 못했다.
김시민은 여자들에게도 군복을 입히고 허수아비를 세우는 등 군기를 여럿 세워 처음부터 심리전으로 맞섰다. 외곽의 의병장 곽재우는 2백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왜군의 배후에서 밤이면 횃불을 들고 뛰어다니며 피리를 불며 또한 치고 빠지는 심리전을 펴, 왜군들은 밤새 잠 한심 못 자게 만들었다.
진주성에서 왜군도 처음엔 심리전으로 나왔다. 군사들이 머리를 풀어헤친 뒤 뿔 달린 금색 가면을 쓰고 잡색 기를 들고 칼날을 세워 귀신 모양 성 밖을 돌았다.
왜군은 조선 아이들을 잡아 성을 돌며 노래를 부르게 시켰다.
“한양이 이미 함락되었고 팔도가 점령되었소이다. 아저씨들이 새장 같은 진주성을 어떻게 지키겠소이까?. 빨리 성문을 열고 항복하여 목숨이라도 지키세요”
전쟁에 어린이를 사로잡아 노예로 이용하는 모습에 분노한 군사들이 분괴하여 성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김시민은 침착하게 동요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김시민은 장대에 올라 관민 3,800명을 한 몸같이 지휘했고, 후방에서 곽재우의 의병에게 수시로 왜군의 정보를 얻었다.
1592년 10월6일
진주성을 만만히 본 왜군은 겁을 주기 위해 먼저 진주성 남쪽에 도열했다. 공성전에 능한 왜군은 기선제압을 위해 조총수 들이 먼저 도열하여 사격 자세를 잡았다.
목사 김시민은 장대에서 왜군 지휘부를 살피며 명령을 내렸다.
“동요하지 말라, 조총을 쏘면 성벽에 고개를 숨겨라. 내 명령이 내릴 때까지 절대 발포하지 말라!”
진주성 조선군들은 아무 저항도 없이 허수아비 목만 올렸다 내렸다 약을 올렸다. 그러자 왜군 조총부대는 다시 전진하여 조총을 쏘며 조선군의 화살 공격을 대비하여 대나무 방패를 앞세워 전진했고, 후방 지휘부도 따라 들어왔다.
처음부터 김시민은 늘어선 조총 대열은 안중에도 없었다. 왜군 지휘대가 사거리 2,000보에 들어 온 것을 장대에서 확인한 김시민은 화포 공격을 명령했다.
“현자총통을 발사하라!“
조선군은 일사불란하게 불을 붙여 1차 현자총통 30문을 일시에 발사했다.
”쾅 쾅 쾅“
2,000보 밖 왜군 지휘소까지 날아간 현자총통은 1발에 산탄 100여 개가 장전되었는데, 순식간에 터져 왜군 수백 명이 죽거나 다쳤다.
놀란 왜군 조총수들이 뒤를 돌아보며 등을 보이며 우왕좌왕하자, 김시민은 천자총통과 화살공격을 동시에 명했다.
”궁수는 화살을 쏘아라!“
조선의 활은 왜의 조총보다 발사 속도가 빨랐다.
”기선을 제압했다. 천자총통을 쏘아라!“
등을 보인 왜 조총부대는 천자총통과 조선의 화살 공격에 하나 둘 쓰려졌다. 왜군들이 사거리 밖으로 도망가자, 김시민은.
”비격진천뢰를 발사하라!“
”쾅“
3만의 왜군은 순차적으로 조선군의 화살과 천자총통 현자총통 화포 공격에 죽고 다치고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조선의 신무기 비격진천뢰를 처음 본 왜군은 불발탄인 줄 알고 가까이 접근하다, 나중에 터지는 비격진천뢰에 죽거나 다치기 일쑤였다.
초반 대승이었다. 김시민과 3,800명이 의기투합한 조선군의 잘 짜여진 작전에 따라 순차적인 공격에, 조선군을 만만히 본 3만 왜군의 전투는 초반 싱겁게 왜군의 1차 패배로 끝났다.
일단 후퇴한 왜군은 근처 민가를 헐어 방패막과 공성 무기와 사다리를 준비하여 총공격을 준비하는 듯했다.
김시민은 민간인들을 동원 성벽을 기어오를 왜군에게 투석할 돌과 끓는 물을 준비할 것을 급히 지시했다.
날이 어둡자, 산 쪽에서 곽재우가 지휘하는 군사 이백여 명이 뒷산에 올라가 호각을 불고 횃불을 흔들어 왜군들을 혼란에 빠트리자 당황한 왜군들은 우왕좌왕하며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김시민은 심리전을 구사했다. 악공에게 구슬픈 대금을 불게 해 왜군들의 사기를 저하시켰다.
왜군은 7월 의령 남강 정암진 늪지대에서 곽재우가 이끄는 50 여명의 궁수들에게 2,000여 명의 왜군들이 조총 한번 쏘아보지 못하고 몰살당한 것을 매우 두려워했다.
의병장 곽재우는 10여 명의 부하에게 같은 홍의를 입히고 치고 빠지는 신출귀몰 작전으로 왜군을 혼란하게 만들었다. 비가 오면 약점을 보이는 조총의 단점을 이용, 비 오는 날 기습 공격, 왜군의 식량 탈취, 횟불 · 징 소리 · 심지어 말벌을 이용하는 등 소란작전으로 왜군의 후방 교란으로 천강 홍의장군이란 소리를 들었다.
의병장 곽재우는 신출귀몰했다. 금방 산에서 횃불을 들고 나타나기도 했고, 눈 깜박할 사이에 붉은 홍의를 입고 남강 건너편에 나타나기도 했다. 의병장 곽재우는 같은 홍의를 입은 10여 명을 순차적으로 출격시켰던 것이다.
10월 7일, 8일
왜군은 여러 번 사다리를 들고 벌떼같이 성을 공격하였으나, 김시민의 화포 공격 · 진주성 군관민의 투석전, 아낙들이 성을 기어오르는 병사들에게 끓는 물 쏟아붓기 등으로 단 한 명도 기어오를 수가 없었다.
김시민은 왜병들이 접근하여 성벽을 기어오르면 화살을 아껴 돌을 던지게 했다. 다시 어두워져 전투가 멈추고 밤이 되자 성 밖 곽재우가 이끄는 의병이 남강 건너편에 나타나 횃불을 올려 화살 화약 등 군수 물자를 지원해 주었다.
10월 9일
김시민은 아침부터 심리전을 폈다. 성벽 곳곳에 불을 피워 아침밥을 짓게 했다. 아침도 제대로 먹지 못한 왜군은 소수의 소부대로 나누어 편성한 다음 진주성 외곽에 잠복한 의병 공격에 집중하는 듯했다. 왜군의 병력 분산 작전은 전력을 약화시켜, 매복 중인 의병장 김준민에게 몰살 당하는 등, 전라도에서 지원 온 의병장 최경회에게도 큰 타격을 입었다.
성 밖 의병의 승전보에 김시민과 3,800명의 관민은 만세를 불렀고 더욱 용기백배했다.
”조선군 만세!“
”진주성 만세!“
”목사 김시민 만세!“
”요시! 조선의 모쿠소(목사 김시민) 에게 우리 3만이 당했다. “
왜장 하치로八郎는 주먹을 쥐고 분괴했다.
다시 정비한 왜군은 공성 작전을 바꾸는데, 대나무 다발과 연결 사다리를 많이 준비한 다음, 토성을 쌓고 누대를 세워 한 부대가 그 위에서 성 안으로 조총을 쏘아대는 동안 나머지 부대가 대나무을 엮어 만든 타케타바(竹束)를 방패로 하여 사다리를 들고 성으로 접근하였다. 몇 번 왜군과 싸워 요령이 생기고 힘이 난 관민은 성벽을 기어오르는 왜병에게 투석전으로, 토성 누대서 조총을 쏘는 왜병에게는 일사불란하게 현자총통으로 맞섰다.
왜군은 큰 피해를 당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왜군은 진주성 공격에 계속 실패하자, 밤에 작전을 바꾸어 성안 조선군을 밖으로 유인해 내기 위해서 여기저기 모닥불을 피워 어둠을 환하게 밝혀놓고는 거짓 퇴각을 하는 척 했다. 그때 마침 왜군에게 잡혀갔던 조선 아이 한 명이 탈출하여 성으로 들어왔다.
김시민은 그 아이에게 왜군의 동향을 물었다.
”지금 왜놈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냐?“
”예, 지금 왜놈들은 거짓 철수를 한답니다. 내일 새벽 총공격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10월 10일 새벽
어둠 속에서 왜군 3만이 총공격을 시작하자, 중과부적 진주성 외벽이 뚫렸다. 하지만 진주성 내벽은 아직 온전했고 사력을 다해 최후의 전투를 벌인다. 김시민은 칼 뽑아 들고 외쳤다.
”물러서지 마라!“
1592년 10월10일 전투를 끝낸 후 전장을 둘러보던 김시민은 시체 속에 숨어 있었던 한 왜군의 조총에 왼쪽 어깨를 맞고 쓰러져 사경을 헤맸다. 그의 나이 향년 38세였다.
부장 곤양 군수 이광악이 쓰러진 김시민을 대신해 마지막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10일 정오쯤 왜군은 진주성을 포기하고 퇴각한다.
조선군도 피해가 컸고 김시민이 의식이 없었기에 추격하지 못했다. 김시민은 며칠 동안 사경을 헤매다, 끝내 세상을 떠났다.
진주 목사 김시민의 운구가 지나가는 길에는 백성이 달려 나와 하나같이 소리쳐 곡을 했고 곡소리가 백두대간을 넘었다.
왜장 하치로八郎는 관백 풍신수길에게 목사 김시민의 이름을 모쿠소牧使 목사라고 보고한다. 모쿠소는 나중에 일본에서 가장 무서운 귀신의 대명사가 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