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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3.03.02 03:38
유머 감각과 소통 능력
/윤일현
사람이 붐비는 도로나 교차로를 지나다 보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다양한 종류의 현수막을 보게 된다. 예전에는 명절이나 국가적으로 경축할 일이 있을 때만 정당이 현수막을 걸었다. 지금은 1년 내내 정당 현수막이 명당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대부분이 상대를 비난하고 성토하는 문구다. 국회의원과 자치단체장뿐만 아니라 시도 구군 의원까지 현수막 정치를 하니 현수막 공해를 그냥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됐다. 국민은 생산성 없는 감성팔이와 상호비방 정치에 지쳤다. 정치가 국민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다. 치열한 논쟁과 토론 속에서도 국민을 미소 짓게 하는 유머 감각과 소통 능력을 갖춘 정치인은 없을까.
2011년 여론 조사 기관 갤럽이 ‘미국인이 가장 위대하게 생각하는 대통령은 누구인가’에 대해 조사했다. 초대 대통령 워싱턴 5위(10%), 케네디 4위(11%), 클린턴 3위(13%), 링컨 2위(14%) 순으로 나왔다. 우리 국민에게 물었다면 링컨 대통령이 1위로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 1위는 예상 밖으로 레이건(19%)이었다. 일부 상류층이 그를 두고 ‘B급 배우 출신 대통령’이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경제적 번영과 함께 강력한 미국을 부활시킨 대통령으로 사랑받고 있다. 그가 2004년 타계했을 때 대처 총리는 추도사에서 “우리는 레이건이 시작한 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그는 총 한 발 쏘지 않고 냉전에서 승리했다. 그는 적들이 요새에서 나오게 손을 내밀었고, 결국 그들을 친구로 만들었다”라고 했다. 워싱턴포스트지는 ‘소통의 달인’ ‘보수주의자의 우상’으로 기억할 것이라고 썼다.
레이건은 탁월한 유머 감각을 가진 지도자였다. 그가 이렇게 연설을 시작한 적이 있다. “내게는 대통령이 될 수 있는 9가지 재능이 있습니다. 첫째. 한 번 들은 것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탁월한 기억력입니다. 둘째, 아 또, 그게 뭐더라” 청중이 폭소를 터뜨리며 손뼉을 쳤다. 연설문을 읽다가 ‘다음 페이지로’라는 것까지 읽어버려 폭소를 유발한 적도 있다. 일부 사람은 머리가 나빠 그런 실수를 한다고 말했다. 우리 정치 풍토에서는 ‘치매’ ‘국정 운영 능력 심히 우려’ 등의 악담과 함께 난리가 났을 것이다. 대본 읽기에 익숙한 배우 출신이기 때문에 청중을 웃기기 위한 계산된 실수였다. 기자들의 고약한 질문에 시달리던 그가 ‘개자식(son of bitch, SOB)'이라는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며칠 후 기자들이 ’SOB’라는 글자를 새긴 티셔츠 선물로 대통령에게 복수했다. 레이건은 “기자 여러분은 모두 애국자입니다. 예산 절약 (Saving Of Budget, SOB) 하란 말이지요. 충고 명심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얼마나 재치 있는 응수인가. 1981년 존 힝클리가 쏜 총탄이 심장 바로 옆 왼쪽 폐에 박혔다.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유머가 넘쳤다. 수술에 들어가기 전 부인 낸시 여사에게 “여보 재빨리 머리 숙이는 걸 깜빡했어.”라고 했다. 배우 시절 영화 촬영할 때처럼 못 피했다는 말이다. 레이건의 유머 감각과 인간적인 실수는 사람을 편안하고 친숙하게 해주는 힘으로 작용했다. 국민은 고물가와 실질소득 감소로 몸과 마음이 쪼그라들고 있는데, 유독 정치인만 힘이 넘치는지 머리에 단단한 뿔을 달고 소싸움 하는 현실이 답답하다. 남의 나라 지도자이지만, 오만과 독선을 버리고 소통하는 지도자, 유머 감각이 뛰어난 정치인이 부럽다.
자연은 해가 바뀌면 새싹과 새순으로 자신을 갱신한다. 간혹 꽃샘바람이 변덕스럽지만, 봄기운이 온 누리에 가득하다. 겨우내 움츠리고 있던 가슴을 펴고 어디론가 훌훌 돌아다니고 싶은 3월이다. “봄은 틀림없이/힘이 셀 거야/할머니한테 끌려 다니던 염소/뿔 두 개 달더니/할머니를 끌고 다니잖아/틀림없이 봄은/고집이 셀 거야/봄이란 글자를 잘 봐/뿔 달린 염소처럼/몸 위에 뿔 두 개 달았잖아” 곽해룡 시인의 동시 ‘봄’ 전문이다. 많은 국민이 비전 없는 정치에 실망하고 분노하기보다는 현수막도 막말도 없는 대자연과 소통하며 위안받고 싶어 한다. 자연이라는 위대한 책은 우리의 눈과 귀를 피곤하게 하지 않고 두뇌의 혹사도 요구하지 않는다. 자연의 품에 안기면 가난과 불행도 잊게 되고 자신도 모르게 흥에 겨워 생명의 합창에 동참하게 된다. 거리에 이런 현수막을 걸고 싶다. “새봄이 왔어요. 우리 함께 힘내요”
<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