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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가야산 고려대장경판 비밀 5편 에필로그

고려대장경판 에필로그

작성일 : 2025.05.20 10:32 작성자 : 김하기

63, 백두대간 인문기행

      가야산 고려대장경판 비밀 5

 

 

다시 안으로 들어온 일행은 수다라장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법조 스님은 81,258경판 중에 대승경전을 대표하는 경판 하나를 뽑아 들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密多心經이 판각된 경판이었다. 무불은 합장하고 삼배를 한 후 반야심경을 친견했다.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일반인에게도 가장 많이 알려지고 스님이 아니라도 수지독송하는 대승경전의 반야심경이다.

대부분의 경전은 여시아문如是我聞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로 시작하는데, 반야심경은 천축天竺의 영축산에서 관자재보살이 사리자의 질문에 답한 것으로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증명하셨다고 기록되어있다.

물질이 허공과 다르지 않다는 것은 집착이 허공과 같이 공적한 것이기에, 집착으로 인한 물질이 허공과 같고 감각. 지각. 인식도 또한 그러하다는 공사상을 일러준 내용이다. 현장玄裝법사가 천축에서 가지고와 천사백 년 전 한문으로 변역했다고 한다.

 

무불은 법조 스님이 전해주는 또 다른 경판을 이번에는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 양쪽에 마구리가 있어 손으로 잡을 수 있게 되어있었다. 경판은 직사각형으로 묵직한 게 무게가 1관정도 될 것 같았다.

법조 스님은 고려대장경판의 규격을 일러주었다.

무불 거사님. 좌우 폭은 팔을 반쯤 뻗은 것 보다 약간 긴 23촌입니다. 세로는 보통 서책의 길이 정도인 8촌입니다.”

, 그러하옵니까?”

무불은 답례를 하고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며 한 번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경판에 새겨진 글자를 자세히 보았다. 먹을 먹은 경판은 전체적으로 검었지만 활자부분은 금강석을 빽빽이 박아 놓은 듯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니! 이를 수가?’

무불의 눈에는 65십 년이 지난 고려대장경판이 어제 판각을 하고 어제 먹으로 찍은 듯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법조 스님은 무불의 마음을 읽고 눈길이 가는 곳을 따라가며 놓치지 않고 설명해 나갔다.

글자 하나는 손가락 마디만 한 5분입니다. 글자가 23줄로 줄마다 14자가 앞뒷면에 새겨져 있습니다.”

무불은 경판을 돌려보았다. 법조 스님의 설명을 계속 되었다.

한쪽 면이 322자 양면은 644자입니다.”

경판의 글자는 마치 금강석 덩어리같이 촘촘히 빛나고 있었고 그 옛날 솜씨 좋은 신선이 단칼에 각을 하듯 제각각 힘찬 획을 그으며 광체를 발하고 있었다.

법조 스님은 무불의 마을을 읽은 듯 눈길 가는 곳을 따라가며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열심히 설명했다.

전체 경판 수가 81,258장입니다. 전체 글자 수는 52백만여 자로 한사람이 각을 한 듯 반듯하게 구양순歐陽詢체의 돋을새김으로 판각하였습니다.”

영인본을 수없이 읽고 연구한 무불이라 표면적인 것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항이지만 고려대장경판 실물을 직접보고 만져보니 꿈만 같았다. 천년 시공을 뛰어 넘어 그 옛날 수기 스님과 고승대덕들 그리고 일심의 각수들을 만나는 듯 환희심에 가슴 벅찼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무불은 연신 작은 소리로 나무석가모니불을 찾았고 법조 스님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경판의 순서는 한자 천자문의 순서에 따라 천함天函부터 시작됩니다. 두 번째는 함은 지, 세 번째 함은 현, 마지막은 동함으로, 함의 개수는 총 639함으로 초조대장경의 순서 배열방식과 같은 방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고려대장도감高麗大藏都監에서 수기守其 스님이 정리한 방식은 각각의 함은 경의 내용에 따라 다시 권으로 분류되어 있었고 권마다 경판의 일련번호를 나타내는 장으로 경판 숫자는 한자의 일이 삼으로 적혀 있습니다.”

 

무불은 지극한 마음으로 두 손을 모으고, 강화경 대장도감에서 고려대장경 판하본을 작성 교정 감수한 개태사開泰寺의 승통 수기守其흥왕사興王寺의 천기天其, 시랑 박효문, 재상 유공권기흥수문공유, 학사 장자목, 수좌 도휴, 산인 오생요연. 그리고 삼십 여명의 고승대덕들 당장 생각나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과 명필 산인들에게 소리 내어 귀의하기 시작했다.

지극한 마음으로 귀의합니다. 산을 오르며 나무를 패고 목도로 옮기고 탕개톱으로 쓸고 바닷물에 담그고 소금물에 삶고 나무판을 말리신 분들에게 귀의합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귀의합니다. 판하본을 뒤집어 붙이신 분, 행과 행 사이를 파내 신 초벌 새기신 분, 글자와 글자 사이를 파내는 반숙련으로 새기신 분, 판하본 글자를 목판에 직접 새기신 장인들에게 귀의합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귀의합니다. 각을 한 12년 동안 참가한 연인원 130만 각수님들, 직접 동참한 고려백성의 일심에 머리 숙여 귀의합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귀의합니다. 전국각지에서 고려대장경판을 이고 지고 옮기신 분들께 귀의합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귀의합니다. 650년 동안 끊임없는 외부의 침략에도 일심으로 지켜내신 승병 의병님들에게 귀의합니다.”

무불이 앞장서 염불을 외우듯 영령들에게 삼보일배를 드리자, 대통과 법조 스님은 목탁을 치며 뒤를 따랐다.

, , !”

고려대장경판이 완성된 후, 교감을 맡았던 승통 수기守其 스님은 고려대장경의 총 목록인 고려국신조장경교정별록高麗國新雕大藏經校正別綠 30권을 발간했다. 교정별록에는 송본 거란본 등을 참고하여 잘못된 부분과 중복된 부분 빠진 부분은 바로잡았다고 밝히고 있다.

일각을 하고 삼배를 한 초벌 새김이, 반숙련 새김이 그리고 마지막 숙련 새김이 연인원 130만 장인들이 무주상보시로 고려대장경 판각 불사에 스스로 동참했던 것이다. 혹자는 고려 정권의 독재자 최이崔怡에 의해 강제적으로 새겼다고 폄하하지만 고려대장경의 불사는 일개 독재자의 강압에 의해 만들어질 수 없는 불사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누구 몇몇 사람이 아닌 고려백성의 일심으로 새겨졌다는 것이다.

무불은 그 부분을 밝히기 위해 고려대장경 이규보李奎報의 대장각판군신기고문 大藏刻板君臣祈告文을 비롯해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고려국신조장경교정별록高麗國新雕大藏經校正別綠 30, 고려사高麗史 , 삼국유사三國遺事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등 참고 안 한 책이 없었다. 조선보다 일본에 고려대장경 영인본과 기록에 관한 책들이 많았다는 것은 고려대장경을 연구하는데 일본이 더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무불은 고려대장경판각에 가장 중요한 각수들의 명단을 하나하나 찾아냈다. 참여 장인 각수들의 명단을 찾아낸다는 것은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각수들은 무주상보시를 실천덕목으로 삼고 참여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밝히기를 꺼려했다. 판하본에 참가한 지식인들은 다른 문인들의 칭찬에 의하여 간혹 기록에 남아있었지만, 장인 각수들은 그렇지 않았다. 참여 장인 각수의 출신 성분은 전국에서 다양하게 참가했다. 남해의 최동崔同을 비롯한, 국자감시에서 급제한 진사 육영의陸永義, 진사 임대절林大節, 임대절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을 판각했다는 기록을 찾았다. 진사 김광조金光祖130경판을 판각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경상도 김천의 개령분사대장도감開寧分司大藏都監 에서는 승려 정장손작혜견 등이 판각에 참가했다는 것과, 전국분사도감에서 약 3,600여명의 장인 각수들이 참가했는데, 개인마다 판각 매수가 일정하지를 않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만약 강압에 의하여 판각했다면 각수들의 판각 매수가 일정해야하지 않겠나? 강압에 의해 판각했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각수는 첫해에 참가하고 나중에 다시 참가하는 등 너무나 자유로웠다는 것이다. 자율이 성공의 비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출신 지역이나 성분 역시 전국에서 고루고루 참여했다는 사실. 그런데 대정경판은 마치 한사람이 새긴 듯 똑같았다는 사실은 무아의경지에서 一心으로 각을 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가.

어디 그뿐인가. 산을 돌아다니며 판각에 좋은 산벚나무, 돌배나무, 거제수나무, 층층나무 등을 지름 한 자 세 치 이상 되는 것을 골라 자르고 옮긴 후 탕개톱으로 두께 약 세 치 정도 되게 잘랐다. 경판이 뒤틀리지 않고 판각하기 쉽게 반드시 소금물에 삶고 말리는 과정은 필수였다. 혹자는 바닷물이나 소변에 담그기도 했다고 한다.

포악무도한 달단韃靼몽골이 스스로 물러가기를 염원한 고려 백성의 일심은 81,258경판을 다듬는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무불은 고타마 싯다르타께서 태어난 룸비니동산에서 깨달음을 이룬 붓다가야를 거쳐 처음 설법을 한 사르나트 사슴동산과 열반에 드신 쿠시나가라까지 오체투지로 삼보일배를 한 듯 환희심 났다.

, , !”

무불을 뒤따르던 대통과 법조 스님은 연신 목탁을 쳤다. 목탁 소리는 가야산 두리봉에서 메아리쳐 깃대봉, 단지봉, 오봉산, 비봉산을 돌아 온 천지에 울려 펴졌다.

 

백두대간 인문기행

가야산 고려대장경판 에필로그

 

노루꼬리 만큼 짧은 겨울 해는 금방 서산에 걸려 해인사는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법조 스님의 안내로 무불과 대통은 수다라장修多羅藏과 법보전法寶殿을 다 둘러보고 요사채에 마주 앉았다. 방안은 따뜻했다.

법조 스님은 작은 화로의 불씨를 살려 잉걸불을 만들었고 찻주전자를 올리자 금방 물이 끓어 연잎차를 마실 수 있었다. 무불은 두 손으로 찻잔을 감싸고 차향을 맡아보았다. 바깥 추위에 곱은 손이 녹고 온몸이 따뜻해지는 듯했다.

스님, 향이 아주 좋습니다. 정말 오래간만에 음미하는 조선의 차입니다. 아직 풋풋한 향이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설악산 백담사百潭寺를 지키고 계시는 사형께서 타주시는 차 같습니다.”

법조 스님은 두 손을 모으고 예를 다했다.

고맙습니다. 무불 거사께서 절 사형에 비교하니 송구스럽습니다.”

대통도 찻잔을 들며 그동안 호의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자상하신 법조 스님은 저에게도 사형인 걸요. 저가 처음 일본사람으로 해인사에 왔을 때 다른 스님들은 왜놈이라고 경계를 했지만 법조 스님은 늘 자상하게 대해주셨습니다.”

대통이 찻잔을 놓고 두 손을 모아 다시 한 번 예를 갖추었다. 법조 스님도 얼른 손을 모아 답례를 했다.

아닙니다. 전 조선 사람들도 등한시하는 고려대장경에 그렇게 관심을 보이시고 명색에 조선 중인 빈도보다 고려대장경에 통달하신 것에 정말 놀랐습니다.”

대통이 손을 허공에 저으며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 아닙니다. , 이 친구 무불에 비하면, 저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편입니다.”

법조 스님이 무불에게 다시 차를 권하자 무불은 두 손을 모아 합장했다.

고맙습니다. 법조 스님께서 고려대장경판의 一心을 조선이나 일본의 중생들에게 많은 가피가 전해지도록 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찻주전자를 들다말고 법조 스님은 무불이 고려대장경판을 一心이라고 표현하는데 무척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一心! 一心 이라고 하셨습니까? ! 거참 대단한 표현입니다. 평생을 해인사에서 고려대장경판 연구에 몰두한 저도 생각해내지 못했던 표현인데. , , 一心 이라! 그렇게 표현하니 고려대장경판의 진공묘유를 보는 듯합니다.”

법조 스님은 잠시 눈을 감고 묘한 표정을 지어며 염주를 돌렸다. 무불은 자신의 논리를 계속 펼쳐나갔다.

법조 스님, 소인은 고려대장경판을 一心의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스님께서 더 잘 아시다 시피, 대장경은 고타마 싯다르타 왕자가 29세에 출가하여 35세에 크게 깨달고 부처가 되어, 80세에 열반에 들기까지 설법한 내용을 기록한 경전 아닙니까. 처음엔 제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습니다만. 세 차례의 결집으로 경 율 론으로 집성되었습니다. 1236년 고려에 극악무도한 달단이 침략하여 전국토를 유린하고 부인사夫仁寺에 있던 초조대장경판뿐만 아니라 고려의 사찰들을 불태우자 백성이 자진해서 나선 것 아닙니까?

이 역경과 길고 긴 과정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중생의 염원을 담은 한마음, 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금 가야산 해인사에 있는 고려대장경판의 52백만 자를 한 자로 요약하면 마음 이 아니겠습니까? 부처님의 설법을 천오백 년 동안 구하고 모아 시공을 초월해 81,258경판에 세긴 것을 한마음인 로 본다면, 고려대장경판은 한마디로 一心이라고 소인 감히 말씀드립니다.”

법조 스님은 눈을 감고 무불의 말에 돌부처모양 앉아 있었다. 무불의 열변은 계속 되었다.

一心은 우주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고 신라의 선지식 원효元曉스님께서 일찍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는 만법유식萬法唯識이요, 삼계유심三界唯心이라고요.

아주 먼 옛날부터 우리 조상은 한마음 일심으로 나라를 세웠습니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은 온 누리에 존재하는 인간뿐만 아니라 공존하는 모든 존재들을 이롭게 한다는 뜻 아닙니까? 너와 나의 경계를 벗어나 한 마음, 一心으로 말입니다. 고구려가 한사군을 쫓아내고 수나라의 공격을 막아냈습니다. 신라가 당나라를 이 땅에서 몰아낸 것도 백성의 일심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려 백성이 거란을 막아내고 달단의 침략을 이겨낸 것도 일심입니다. 임진왜란 때 임금은 도망갔지만 의병과 백성의 일심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물려 친 것 아닙니까? 물론 이순신 장군께서 바다에서 많은 역할을 하신 것도 사실이지만.

우리 백성은 국난의 위기 때면 어김없이 한마음 일심으로 이 땅을 지켜왔습니다. 가까이는 동학농민혁명도 아쉽게 실패했지만 일심입니다. 지금 조선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입니다. 이 위기에 온 백성이 일심으로 일어나야합니다. 하지만 오랜 위정자들의 실정에 실의에 빠진 백성은 우리의 일심마저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어느 때보다 고려대장경판을 통한 一心의 가피력이 간절할 때라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가 나서서 고려대장경판 정대불사를 하듯 다시 나서야합니다.“

무불 거사, 참 좋은 말씀이옵니다. 빈도도 같은 생각입니다.”

법조 스님은 무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두 눈에서는 불꽃이 이글거리듯 타올랐다.

스님, 오늘날 우리의 한마음 일심은 이제 너와 나의 경계를 벗어나 널리 만물의 화를 위한 것이어야만 합니다.“

법조 스님이 맞장구치며 받았다.

맞습니다. 대단한 말씀입니다. 일찍이 원효元曉 스님께서 우리의 마음은 원래 맑고 밝은 것인데 탐진치 삼독에 물들어 그 참모습을 보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툼을 버리고 一心으로 원융회통圓融會通시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방안이 시나브로 어두워지자 법조 스님은 부싯돌에 불을 붙여 촛불을 밝혔고 평소 주역에도 조예가 깊었던 대통大通은 미래를 예견하듯 말했다.

그렇습니다. 조선과 일본의 역사는 갈등과 다툼의 시대를 거쳐, 一心 한마음의 가피를 입어 언젠가는 평화와 화합의 시대로 나아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지금 일본의 위정자들은 탐진치 삼독에 빠져 한치 앞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원효 스님의 一心과 화쟁和諍입니다. 一心은 만유의 바탕을 말하고 화쟁和諍은 만유의 공존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누구나 一心을 통해 자신의 본성자각을 깨우치고 자리이타로 진정한 를 이루어야합니다. 지금 일본에 필요한 것은 一心의 가피입니다. 현명한 선조들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만, 지금의 위정자들은 부국강병이란 무명에 빠져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않으려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고려대장경판 一心의 가피로 눈을 뜨고 귀가 열려야 합니다. 그래야 일본과 조선이 화이부동하게 될 것입니다.“

법조 스님은 찻잔을 조용히 내려놓고 부젓가락으로 꺼져가는 화롯불을 뒤적이며 차분하게 말했다.

고려대장경판을 고려에서 초조대장경, 재조대장경 이렇게 두 번이나 판각을 했습니다만, 영인본은 지금 일본에 더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고려에선 백성의 염원을 담아 일심으로 만들기만 만들었지, 제대로 백성에게 알리지 못했습니다. 물론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권이 바뀌면서 억불숭유정책을 썼습니다만, 일본의 고려대장경에 대한 집념도 참 대단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 말 우왕 14년부터 시작해서 오백 년 동안 다 열거를 못할 형편이니까요.”

대통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법조 스님. 예로부터 일본은 조선이나 중국의 문화를 선망해왔습니다. 특히 불교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겐로쿠시대 이후 차츰 나라가 안정되고 일본 민족정신인 국학이 부흥하고 서양의 난학을 받아들이면서 독자적인 일본 만의 민족정신을 만들어나갔습니다. 그러다 명치유신으로 부국강병이 되자 이제 도리어 조선이나 중국의 문화를 미개하다고 배척하기 시작합니다.

일본은 고려 말에 포로 250명을 돌려보내주면서 처음 고려대장경을 요구했지요. 그 후 나라가 바뀌고 조선이 억불숭유정책을 쓴다는 것을 알고 본격적으로 고려대장경판을 달라고 억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태종 8년에는 회례관으로 일본에 갔던 최재전崔在田이 돌아와 일본에서 사신이 많은 토산물을 가지고 왔는데, 다른 것은 필요 없고 고려대장경판을 주십사한다고 태종 임금에게 글을 올렸습니다. 또 태종 10년에는 일본 국왕이 사신을 보내어 토산물과 수레와 병기를 바치고 고려대장경판을 간청하였습니다.“

법조 스님은 고개를 끄떡이며 부젓가락으로 뒤적인 재속에서 꺼져가는 불씨를 찾아내고는 재가 날리지 않을 정도로 불어댔고 대통의 열변은 계속 되었다.

그때마다 조선에서는 찍어 놓은 영인본을 주었고 결코 경판은 주지 않았습니다. 태종13년에는 대마도 태수 종정무宗貞茂에게 고려대장경 영인본을 하사했습니다. 태종 15년에는 일본 대내전에서 고려대장경을 요구하였으나 숫자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거절하였습니다. 세종 6년에는 사신 규주가 경판을 간청하며 단식투쟁을 하여, 조정에서 고려대장경 영인본 1부와 주화엄경판 180권을 주고 달래 보냈습니다. 이외에도 수 없이 많았습니다.“

법조 스님이 몇 번 입을 모아 불자 금방 불씨는 살아나 다시 잉걸불이 이글거렸고 방안은 따뜻해졌다. 무불도 웃으며 말했다.

조선의 조정에서는 모두들 고려대장경판을 하찮게 여겼습니다. 그것을 알고 일본 대내전에서 끊임없이 고려대장경판을 간청했던 것 아닙니까. 재상 정창손鄭昌孫은 우리 임금께서 부처를 좋아하지 않으니 모두 일본에 주자는 의견을 내놓았고, 도승지, 호조판서, 우찬성, 이조판서, 영중추부사, 영의정을 지낸 노사신盧思愼은 심지어 대장경은 이단의 책이므로 태워버려도 아깝지 않다. 일본에서 달라고 하면 아끼지 말고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세종실록에 당시 사관들이 기록한 내용입니다.

일본은 고려대장경을 한 부라도 더 얻기 위해 왕과 왕비 이름으로 각각 청구하거나 여러 번진에서 요구하는 등 갖은 방법을 동원해 얻어갔습니다. 나중에는 구변국久邊國과 이천도국夷天島國이라는 존재하지도 않은 가짜 나라를 내세워 고려대장경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구변국 왕의 성이 이씨라고 사칭하기도 했지요. 전해오는 말로는 구변국 가짜 사신을 내세우기도 했으니까요.”

 

법조 스님도 자신이 알고 있는 사건을 말해주었다.

조선 성종 때 심지어 일본인들이 조선 조정의 관리 복장으로 변복을 하고 어명이라며 합천군수에게 고려대장경판을 가지려왔다고 속인 일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변복한 관리들의 말과 행동을 수상히 여긴 합천군수가 조정에 급히 사실을 확인하여 막았다고 합니다. 그때 대장경판을 전부 포장까지 했다고 하니, 지금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조선 500년 동안 일본은 끊임없이 고려대장경판 약취에만 신경을 썼습니다. 그런데 왜 일본은 대장경판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법조 스님은 다시 끓인 연잎차를 무불의 찻잔에 따랐고 무불은 합장하며 받았다.

저가 일본 본원사에 머물면서 일본의 고승대덕들과 대장경에 관하여 토론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일본도 몇 차례 대장경판각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국은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어찌보면 조선보다 일사불란하게 판각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대장경판각은 누구 몇 몇 사람의 뜻으로 될 수 없는 불사입니다. 전 국민이 나서도 그냥 나서서는 안 됩니다. 일심으로 나서야한다는 것입니다. 일본엔 그 일심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남의 나라 것을 약취할 궁리나 한 거죠.”

무불은 찻잔을 단숨에 비우고 입을 앙다문 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본격적으로 꺼내는 듯했다.

스님! 우리가 수행을 하는 목적은 상구보리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아닙니까? 어리석은 중생을 깨우치게 하고자하는데 국적이 중요하겠습니까? 일본의 위정자 하나를 깨우치게 하면 동아시아 전체를 구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법조 스님, 대통께 전 해들은 줄 압니다만 일본 궁내대신 다나카 자작이 이번 황태자의 결혼식에 일본 특사로 참석했습니다.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덴노에게 줄 선물로 가야산 해인사의 고려대장경판을 가지고 가겠다고 합니다. 예부터 일본 황실이 가장 갖고 싶어 했던 고려대장경판이라 이제 강제로 빼앗아 가려고 하는 모양입니다.”

법조 스님이 두 주먹을 쥐고 분괴했다.

어찌 조선의 중들이 두 눈을 뜨고 빼앗기겠습니까? 목숨을 걸고 막아야죠.”

무불이 담담하게 말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만, 만에 하나 안하무인인 다나카가 헌병들을 동원한다면 조선 스님들과 충돌이 예상됩니다.”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목숨을 걸고 지켜야죠. 저가 앞장서서 지키겠습니다. 일본이 고려대장경판을 가져가면 저는 죽어서도 귀신이 되어 일본을 저주 할 것입니다. 일본 특사 다나카의 음모를 전해들은 스님들은 모두 분괴하고 있습니다. 해인사 스님들뿐만 아니고 말사의 스님들도 만약 일본이 해인사에 나타나면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을 결의했습니다. 전국의 비구승들뿐만 아니고 가까운 동화사, 지리산 대원사, 충청도 수덕사 비구니들도 뜻을 같이하겠다고 했답니다. 무불계서도 잘 아시겠지만 본사에서 아침 공양하고 통지를 보내면 말사까지 반나절이면 다 모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불교가 핍박을 받고 있다고 해도 지금이라도 해인사에서 통지를 보내면 영호남에서만 이틀 안에 승려 일만을 모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해인사와 고려대장경판을 몸으로 막을 스님들입니다.”

잠시 흥분한 듯한 법조 스님은 연잎차를 두 사람에게 따라 주면서 긴장을 풀었고 무불이 조용히 받았다.

해인사 스님들께서도 만반의 준비를 하며 일단 상황을 지켜봅시다. 다나카 일행의 뒤를 밟으며 조선에서 무모한 행동을 할 경우 외국 언론과 국제 여론을 모으는 방법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지금 일본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조선 백성의 한마음이 된 봉기이고 또 하나는 국제 여론입니다. 다나카 일행이 대구에서 해인사로 들어서는 순간 조선의 일심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스님뿐만 아니고 백성들도 일어나야합니다. 그래서 아예 고려대장경판을 일본으로 가져가겠다는 망상을 단념하도록 만들어야합니다. 그리고 외국 언론을 통하여 일본의 만행이 전 세계에 알려지고 규탄 받아 대한제국의 합방이 부당할 뿐만 아니라, 고종황제가 비준을 거부한 을사늑약도 강제로 이루어진 사실이란 것을 만방에 알려 무효가 선언되어야합니다. 한 발 더 나아가 일본을 이 땅에서 완전히 쫓아내는 불씨가 되어야할 것입니다."

대통이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지금 일본의 위정자들은 일로전쟁 승리 후 정한론과 대동아신질서를 내세우며 조선 합병의 기회만 노리고 있습니다. 위정자들은 눈앞에 보이는 하나만 보고 그 결과는 예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서양문물의 겉모습만 받아 드리면서 더욱 탐진치 삼독에 눈멀어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국강병이 되자 자신들의 덕목인 화를 왜곡하여, 집단의 질서를 화한다는 핑계로 대동단결을 외치며 국민의 희생을 강요하고 전쟁 준비에 빠져있습니다.

그리고 큰 를 내세워 정한론과 대동아신질서를 주장합니다. 이것은 가 아닌 지배와 합방의 길입니다. 나아가 서양 열강들을 끌어들이는 공멸의 길입니다. 제가 쇄국을 옹호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이웃끼리 도우며 공존하자는 것입니다. 화이부동이라 했습니다. 친하게 지내데 서로를 존중하며 한쪽으로 동화 시키지 마라는 말 아닙니까?“

 

밤은 깊었고 요사채 봉창에 달그림자가 몰래 내려앉아 세 사람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다. 봉창을 두드리는 해인사 종고루의 북소리는 세 사람의 심장을 더욱 뜨겁게 달구었다.

, , ……!”

 

깎은 듯 아아峨峨할 뿐 도도陶陶함이 없는 너 가야伽倻의 이마.

푸른 천년의 낙락落落이 문이 되고 그 사이로 흐르는

무상無常의 동길이 홍류虹流의 물소리로 종종淙淙하다.

고목의 허벽虛壁을 치는 딱따구리의 색공 두 글자에

집념한 직승職僧의 목탁木鐸소리가 화한다지만

저 준령의 정상을 넘어 오는 송뢰松藾와 한석寒夕

높이 외마디하는 까마귀의 소호嗉呼를 어찌 겨루랴.

고운孤雲이 한 번 들고 나온 자취없다 함은

인적출입人跡出入의 욕됨을 잠깐 염치廉恥하였음인저

팔만장격각八萬藏經閣 마루에 하늘 빛 청기와가 녹슨다고 할지라도

번뇌무진煩惱無盡 속에서 생사불수生死不隨의 법호法湖는 빛나리라.

<파성巴城 설창수 가야산 해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