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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일현 칼럼/ 물성매력, 감각의 시대를 걷다

작성일 : 2025.05.12 12:12

물성매력, 감각의 시대를 걷다

/윤일현

 

 

해 저무는 강가에서, 스스로 깊어지는 강을 응시했다. 바다까지 함께 흘러가고 싶었다. 노을이 겹 사탕처럼, 짙은 선셋 오렌지와 버건디 색으로, 서쪽 하늘을 감싸고 있었다. 우리의 얼굴도 빨갛게 물들어, 서로의 속마음을 감출 수 있었다. 5월 봄바람에, 그녀의 긴 머리칼이 향긋하게 내 얼굴을 스쳤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늘에 맞닿은 미루나무 쪽으로, 그녀가 천천히 걸어갔다. 수채화 같은 풍경, 그녀의 뒷모습이 아름다웠다. 사위가 한층 어두워지자, 마른 나뭇가지를 모았다. 모닥불이 타닥타닥 소리를 냈다. 주황색 불꽃이 한바탕 황홀한 군무를 끝냈다. 뜨거운 열정을 가라앉힌 불씨들이, 반딧불이처럼 반짝였다. 별들이 하나둘 강물에 떨어졌다. 그녀가 살며시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알퐁스 도데의 이 생각났다.

 

물의 유동성과 낙조의 풍경이 자아내는 시각적, 청각적 분위기가 부드럽고 차분한 안정감을 주는 물멍, 불꽃이 만드는 따뜻한 온기와 역동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움직임이 몰입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불멍, 우주의 신비와 경이를 온몸으로 느끼게 하는 별멍. 디지털 기기가 가득한 시끄럽고 번잡한 도시의 카페가 아닌, 대자연의 물성매력에 흠뻑 젖어 들 수 있는 목가적 풍경 속에서 낭만적인 만남을 가져 본 적이 있는가? 시대와 세대에 관계없이 이런 경험은 우리의 머리와 가슴에 깊이 각인되어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남긴다.

 

서울대학교 소비트렌드분석센터는 올해 10대 소비트렌드 키워드 중 하나로 물성매력을 제시했다. ‘트렌드 코리아 2025’특정 대상에 경험할 수 있는 물성(物性, materiality)을 부여함으로써 손에 잡히는 매력을 지니게 만드는 힘물성매력이라고 정의 내리고 있다. 물성매력이란 특정한 사물의 촉감, 무게, 질감, 색감 등 물질적인 요소가 인간의 감각과 정서에 미치는 현상을 의미한다. 많은 것들이 디지털화되는 비물질의 시대지만, 인간은 여전히 체감할 수 있는 그 무엇을 갈구한다. 만지고 느낄 수 있어야 비로소 존재하고, 또 소유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벨벳의 부드러운 감촉. 오래된 종이책 냄새, 도자기의 윤기와 매끄러운 표면. 나무 가구의 부드러운 질감, 빈티지 LP, 영화나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구체화한 인형, 생활용품, 문구류, 과자 등의 굿즈,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포토존 등 콘텐츠의 물성화, 우정사업본부의 부모님 용돈 현금 배달 서비스 등은 그 자체로 물성매력이 주는 감각적 경험을 선사한다. 언택트, 디지털과 AI에 기반한 가상 경제가 성장할수록 물성에 대한 갈망은 더 커지게 마련이다.

 

물성매력은 학령인구 감소 시대에 신입생 유치와 재학생의 대학에 대한 신뢰와 소속감 강화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대학 캠퍼스는 물리적 환경이 주는 감각적 경험의 집약체다. 캠퍼스의 건축 양식, 조경, 강의실 구조, 도서관 서가 배치 등은 학생들에게 직접적인 촉각적, 시각적, 청각적 경험을 제공하며, 이는 대학의 이미지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하버드 대학의 붉은 벽돌 건물과 고풍스러운 도서관, 케임브리지 대학의 돌길과 중세풍의 아치, 넓은 숲속에 우뚝 솟아 있는 듀크 대학의 듀크 채플 등은 유구한 전통과 학문적 깊이를 느끼게 하며, MIT의 현대적 연구 시설과 유리 구조물은 혁신성과 최첨단 기술 이미지를 강조한다. 경북대의 웅장한 본관 석조 건물과 백색 돔, 봄이면 매화 동산과 정문에서 일청담, 북문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벚꽃 산책로 등 아름다운 교정은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대학은 신입생 홍보 책자에 캠퍼스의 물성매력을 최대한 부각해야 한다.

 

물성매력 붐은 최근에 갑자기 주목받는 현상인가? 인간은 원래 물질과 분리될 수 없는 존재다. 물질은 개인의 삶과 인간관계를 더 풍요롭게 한다. 인류는 늘 식량과 생필품 부족으로 허덕였지만, 산업혁명과 국제 교역의 확대로 물질의 확보와 소유에 지나치게 집착하면서 정신의 타락과 황폐함이 야기됐다. 자원과 영토 분쟁,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물질문명에 대한 성찰과 함께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같은 책이 주목받았다. 삶의 소유 양식은 물질·욕망·지배 등에 관계하고, ‘존재 양식은 생명·성장·사랑 등에 관계한다. 불행하게도 인류 문명사는 꾸준히 존재 양식에서 소유 양식으로 바뀌어 왔다. 물성매력은 유물론적 사고에 기반을 둔다는 사람도 있다. 부정할 수 없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유물론은 세계를 물질적인 요소로 설명하려는 철학적 입장이다. 이 관점에서는 모든 존재와 현상은 물질의 작용과 관계 속에서 이해된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물성매력은 물질 그 자체뿐만 아니라, 물질이 인간에게 미치는 정서적, 심미적, 실용적 영향력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이 바뀌지 않는 한 아날로그적 물성매력에 대한 선호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물성매력이 지나치게 중시되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표피적인 요소에 끌려 사물의 내재적 가치와 본질을 간과할 수 있다. 인간관계도 정신적, 정서적 공감과 배려에 입각한 보편적 사랑이나 우정보다는 신체적 매력이나 물질적 부에 좌우될 위험성이 있다. 무엇보다도 과도하게 상업화된 물성매력은 불필요한 소비와 자원 낭비를 조장할 수 있다. 물성매력이 힘을 발휘할수록 디지털과 아날로그, 물성과 가상,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 사이의 균형과 조화를 유지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윤일현 (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