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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현대문학의 어제와 오늘><부문 3-9>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형상화하는 방법으로서의 시

작성일 : 2025.05.12 12:09

<부문 3-9>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형상화하는 방법으로서의 시

 

 

이번 호(부산크리스천문학2023년 하반기호 40)에서는 지난 2022년 하반기호(38)2023년 상반기호(39) 두 권에 발표된 시를 대상으로 크리스천 시인들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어떻게 형상화하고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크리스천들은 하나님께서 이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그 운행을 주관하고 계신다고 신앙고백을 한다. 그렇다면 그들 앞에 전개되는 모든 현상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많은 크리스천들은 비나 눈이 내리는 것과 꽃이 피고 지는 것과 같은 자연현상이나 인간의 행복이나 불행이나 심지어 고통도 하나님이 주관 하신다고 믿고 그것에서 받은 교훈과 은혜를 직접적으로 고백하는 것을 간증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크리스천 시인들은 이 간증을 직접 고백하기보다 시적 장치로 형상하여 한 편의 시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자세로 시를 쓴다면 그들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제재는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들과는 달라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관점에서 두 권에 수록된 시인들의 많은 작품이 언급의 대상이 되고 그 가운데 지면관계상 몇 편의 작품을 골라 언급한다는 것이 힘들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필자는 그 생각이 쓸데없는 기우였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러한 작품들이 많지 않아 고르기가 쉬었지만 필자는 다시 한 번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많은 시인들이 크리스천이 아닌 시인들과 똑같이 자연을 바라보고 현실과 자기의 체험이나 추억들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에게 시작행위는 신앙고백과는 관계가 없다고 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말하자면 신앙시를 쓸 때에만 그렇게 하지 신앙시가 아닌 시는 그렇게 쓰지 않아야 된다는 시작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태도는 교회에서는 크리스천으로서 열심이지만 세상에서는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들과 똑 같은 삶을 살아가는 성과 속을 분리하는 신앙의 양태와 무엇이 다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필자는 주장하고 싶다. 선배 크리스천 시인들 가운데도 그러한 태도로 시작행위를 한 사람들이 많았고 필자 역시 그런 작품들이 많았다는 반성을 하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오래 전부터 일반 비평가들 눈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해도 신앙시와 일반시를 구분하지 않아야 된다는 생각으로 시를 쓰고 있다.

 

다음 몇 시인들의 작품들은 성과 속을 분리하지 않는 신앙의 자세로 시작행위를 하고 있기 때문에 필자는 다소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부산크리스천 시인들의 역량이 결집될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도 하게 되었다.

 

첫눈이 무성청소기를 휘저으며 온다

저문 들녘에 당도한 눈발이 퍼포먼스를 펼치자

정수리 희끗한 산등성이가 꿈틀거린다

 

초강력 환풍기가 눈보라를 일으키는 사이

세상을 하얗게 변하고

잿빛 나무들의 어깨가 눈부시다

 

저먼치서 성탄 캐럴이 은은이 걸어오고

종소리는 하염없이 능선으로 쓰러진다

팔을 흔드는 전나무 숲이 하프를 켜면

후크로 조절할 수 없는

진눈개비가 부산하게 뛰어 다닌다

 

자상을 아름드리 다자인 하는 큰 손

부풀어 오르는 산들을 잠재운다

헐벗은 나무들의 새살이 차오르고

바람결에 나부끼는 가지들이 반짝인다

사람들은 불빛을 향하여 바삐 걸어가고

눈밭에 잠긴 고목은 날개를 퍼득인다

 

깊어가는 어둠 속에서

교회당의 희미한 불빛이 가물거린다

-신선 설일전문(부산크리스천문학2022년 하반기 호)

 

우선 신선 시인의 시설일에 등장하는 상상력은 아름다운 눈 오는 날을 노래한 많은 시인들의 시와는 다른 면이 있다. 첫 눈이 오는 광경을 무성 청소기와 비유하고 눈보라를 초강력 환풍기와 비유하는 점에서 문명의 이기라고 비유하는 것이 다른 시인들과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많은 눈이 내리는 것을 인간들이 만들어낸 문명으로 자연을 어느 정도 위협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 눈이 쌓이는 나무나 산이나 그 능선은 그러한 위협을 아랑곳 하지 않고 그들 나름의 평화와 안정감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그 안정감의 원동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우선 원동력의 전조 현상은 셋째 연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저만치서 들려오는 성탄 캐롤이다. 그 캐롤로 인하여 전나무는 아름다운 소리로 하프를 켜고 진눈개비는 춤을 춘다. 다음 넷째 연에서 원동력의 정체가 어느 정도 드러난다. 그것은 지상을 아름드리 디자인 하는 큰 손이다. 그 손은 부풀어 오르는 산들도 잠재우고 헐벗은 나무들의 새살을 채운다. 디자인 하는 큰 손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큰 손은 바람결에 나뭇가지가 반짝이게 하고 사람들에게 불빛이라는 희망을 주고 고목들도 생동감을 가지게 한다. 이상과 같은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배경으로 마지막 연에서 교회당의 불빛이 등장하고 있다. 시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나 하나님의 은혜는 이렇게 시적 장치를 통해서 형상화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얼마나 오래 달려왔는지

당신은 모르실 거예요

먼 먼 길

당신과 눈 맞추는

오늘 위해

 

별천지

셀 수 없는데

유난히 반짝이는 저 별은

주인도 많네요

 

헤라크레스 자리 구상상단

흩어 뿌리고

아크투루스 항성

다이아몬드처럼 빛나고 있어요

 

거기 그 자리에

매달아 놓으신 이

밤하늘 꽃밭에 거니시고

 

어둠 깊은 곳에 쏟아지는

은하수길

내 맘에도 별은 떠

당신은 크시고

나는 작음을

 

반닷불이처럼 찾아온 별

이 밤도 세고 있네요

- 신현숙 별빛전문(부산크리스천문학2022년 하반기호)

 

신현숙 시인의 시 별빛에서는 시적청자 당신이 등장한다. 그리고 시적제재인 도 등장한다. 보통의 경우 시적제재를 시적청자와 동일시하는데 신 시인은 동일시하지 않고 분리하고 있다. ‘당신은 이 시의 문맥 속 서두에서는 시적화자가 눈 맞추기 위하여 오래 달려와 만난 이이다. 이 경우 사적화자와 당신은 오랫동안 사랑하던 사람을 만나기 위하여 산과 강을 넘고 건너온 관계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관계가 단순히 사랑하는 관계가 아니라는 점이 넷째 연에서 당신이 꽃밭의 무수한 꽃처럼 많은 별을 매달아 놓으신 이이라고 밝혀지면서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상징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따라서 시적 제재 은 신 시인의 신앙고백을 시적으로 형상화하기 위하여 등장하는 매개물이다. 그런 점에서 넷째 연의 별자리들이나 여섯 째 연의 은하수길 등은 대단히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러한 별자리를 흥미롭고 즐겁게 바라보는 것은 바로 일상에서의 자그마한 즐거움과 소망들이 이루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의미를 부여하면 더욱 구체적으로 상상력을 발동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크고 나는 작다는 표현 역시 대비적 표현이면서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을 비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눈 오는 날이면

검은 구공탄 쌀자루같이

보듬고

우리 집으로 배달하던 젊은 부부

생각난다

 

머리에 쌓이는 흰눈발 허허

털어내며

이쯤이야 활짝 웃던 얼굴

 

연탄 가루 같은 생

날마다 마시지만

희망이란

시린 몸을 통과하는 줄 안다

 

삶을 이해하려면

길을 막는 눈

발로 걷어차며 평탄한 길 만들어

집을 세우는 줄 안다

 

숫불처럼 달아 오르는 슬픔도

발톱 세우며

기쁨으로 녹이는 일

 

눈은 내려 그치지 않고

집으로 가는

그들의 발자욱을 바라본다

 

웅덩이처럼 파인 고단한

그들의 발자욱을

하늘의 무지개가 지우는 것을

본다

-류정희 하늘의 지우개전문(부산크리스천문학2023년 상반기호)

 

류 시인의 시 하늘 지우개는 지금은 거의 사라진 연탄배달 젊은 부부의 성실한 삶의 모습을 시적제재로 가져와 가난이라는 삶의 어두운 모습 속에서도 하나님은 희망이라는 역사하심을 준다는 점을 눈이라는 자연현상을 통하여 보여준 시이다.

우선 이 시는 제목부터 비유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하늘 지우개는 눈이 내려 가난한 부부의 발자욱을 덮는다는 표현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눈이 내리는 현상에서 연유된 하늘이라는 표현은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을 연상하게 한다. 이렇게 제목 속에 시의 내포적 의미가 담겨 있으면서 사물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 자체가 류 시인이 가지고 있는 시적 역량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다음으로 주목할 것은 이 시에 등장하는 눈 내리는 겨울에 연탄배달을 하는 어려운 삶을 살면서도 삶에 대한 긍정적 태도를 가진 젊은 부부의 모습이다. 아마 이것은 류 시인이 그들의 밝고 성실한 삶의 모습에서 간직된 기억들일 것이다. 그러한 기억들이둘째 연에 제시되고 셋째 연부터 다섯째 연까지는 그들 부부의 긍정적인 삶의 자세에 대하여 시적화자 즉 류 시인의 해석이 등장한다. 그 해석이 내용은 절망을 희망으로 극복하고, 슬픔은 기쁨으로 극복한다는 것이다.. 여섯 째 연과 마지막 일곱 째 연에서 그들의 고단한 삶의 자취인 발자욱을 내리는 눈이 덮음으로 인하여 지워진다고 비유적으로 표현하면서 시는 마친다. 앞에 인용한 신선 시인의 설일에 등장하는 눈은 문명비판적인 태도로서의 눈이라면 류 시인의 이 시에 등장하는 눈은 하나님의 은혜로서의 눈이다. 같은 사물이라도 시인 각자의 태도에 따라 이렇게 다른 의미가 부여될 수 있다. 그러나 두 작품이 추구하는 지향점은 모두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다.

 

1.

길을 예비하는 광야에서 길을 잃고

생명의 빛을 만났다

갈릴리 비딧가 헛 그물질하는 형제

썰물의 해안에서 참 어부 되자 하였다

 

2.

올리브 잎새 반짝이는 언덕

나에게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 있어요

어여쁜 아이 데레가

오천 명 먹이고 열 두 광주리 거두었다

 

3.

참으로 세상에 오신 선지자

텅 빈 가슴들 어루만지고서도

그여 세상의 끝을 묻다 부끄러워

눈을 감은 십자가!

 

4.

모든 것 끝났다 도망친 골짜기

벗겨진 눈비늘에 뜬 무지게

바다 건너 멀리 전하고

나는 X’라고 참 빛으로 간다

-송정우 안드레아전문(부산크리스천문학2023년 전반기호)

 

송 시인의 경우도 우선 이 시의 제목인 안드레아에 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안드레아는 우리말 성경에는 안드레로 번역된 안드레의 라틴어 이름이다. 그는 잘 알려져 있듯이 베드로의 동생이요, 그의 형 베드로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요한과 함께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예수의 열 두 제자가 된다. 그의 이름은 사내다움또는 용기를 뜻한다. 성질 급한 그의 형 베드로와는 달리 성실하고 온건하며 신중한 성격의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러시아에 최초로 복음을 전파했다고 알려져 있다. 안드레는 원래 세례 요한의 제자였다. 그래서 예수가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는 자리에서 처음 보았다고 한다. 안드레가 예수의 부름을 받은 후에는 수제자로 알려진 베드로와는 달리 성경에 세 군데 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송 시인의 이 시는 이렇게 성경에 자주 나오지 않는 안드레를 시적제재로 하였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1의 경우는 마태복음 418-20절에 있는 갈릴리 네 어부 가운데 한 사람인 안드레가 고기 잡는 어부에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과정을 시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이렇게 안드레는 네 사람과 동시에 제자가 되었으나 그 다음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제자이다. 사도가 된 이후 성경에는 단지 세 군데에 그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다. 2의 경우는 세 군데 가운데 한 군데이며 비교적 구체적으로 안드레가 등장하는 장면이 시적공간이다. 즉 오병이어의 기적이 등장하는 요한복음61-16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안드레는 8-9절의 제자 중 하나 곧 시몬베드로의 형제 안들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에서 등장하고 있다. 그는 직접 소년을 예수께로 데려 왔으며 오병이어로는 도저히 많은 무리들을 먹일 수 없다고 아뢰고 있다. 아마 안드레는 오병이어의 기적 현장에서 가장 큰 충격을 받았을 인물이다. 3의 경우는 마가복음 133-4절에서 네 어부 제자가 말세의 징조에 대하여 에수께 묻는 부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두 군데 말고는 헬라인을 예수님께 안내하는 요한복음 1220-22절이 있다. 4의 경우는 성경을 배경으로 하지 않은 것이다. 위경 사도 안드레아의 행전에는 안드레는 그리스 북부지방에서 선교하다가 로마병정들에게 체포되었으며 총독과의 심문 도중에 X자형 십자가 처형을 당부하여 그렇게 처형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처형되기 직전 십자가 위에서 X자형으로 팔을 펼쳐 2시간 동안 설교한 후에 숨을 거두었다는 전설도 있다. 4의 경우는 이렇게 죽은 안드레의 생애의 마지막을 형상화하고 있다. X자는 그리스어의 그리스도 첫 글자이다. 안드레의 유해는 유여곡절을 거쳐 현재는 순교지 그리스의 파트리아에 있다고 한다. 말하자면 열 두 제자들 가운데 그의 행적이 전설로 아니라 역사적 사실로 남아 있는 경우라고 한다.

아마 송 시인은 이러한 점을 착안하여 안드레를 시적 제재로 가져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많은 신앙인들 가운데는 베드로나 바울처럼 이름을 많이남긴 사람들도 있겠지만 안드레처럼 미미한 신앙인들도 있을 것이다. 분명히 그들도 천국에서는 유명한 사람들과 똑 같은 영생복락을 누리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성경의 인물의 생애를 단편적인 시로 형상화하는 것 역시 크리스천 시인의 시적 신앙고백의 한 양식이라고 볼 수 있다.

 

두 권의 시편들 가운데는 자연이나 삶에 대한 신앙적 태도가 보이지 않은 작품들도 많았지만 신앙이 비유적으로 표현되지 않고 직접적인 진술형태로 드러나는 경우도 많았다. 말하자면 신앙은 문제가 없지만 시적형상화가 문제가 되는 작품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시적형상화에 노력을 기울인다면 좋은 시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신앙시가 아닌 시와 신앙시를 구별하는 태도로 시작행위를 하는 분들은 자기들의 신앙이 성과 속을 분리하는 이원적 신앙이 아닌지를 되돌아보고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자연과 사물 그리고 삶을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바라보는 태도에 대하여 고민하기를 권유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