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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 팔만대장경판의 비밀 3편
작성일 : 2025.05.07 09:14 작성자 : 김하기
61, 백두대간 인문기행 가야산 팔만대장경판 3편)
1907년 1월 21일 낫질재
“그러하오, 무불께서 일본에서 연구하여 보내 주신 서신을 보고 공부하여 나도 요즘 대장경판에 푹 빠져 있다오. 고려 무신정권의 실세 최이崔怡가 중심이 되어 대장경을 판각하지 않았다는 것은 대단한 연구이오다. 그 증거로 무불께서 고려대장경판을 세긴 각수들의 참여가 너무나 자율적이었다는 것을 알아냈다는 것에 난 놀랐소. 16년 동안 계속 참여한 사람도 있었고, 어떤 사람은 처음 이삼 년만 참여하다가 나중에 자신이 참여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참여했다는 사실에 조선의 스님들도 의아해 하고 있소이다.
생각해 보시오. 고려대장경판이 대충해서 되는 불사가 아니잖소. 그럼 분명 뭔가 무신정권의 강압적인 압력이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단 말이오. 또 그렇게 강압적으로 해서는 성공할 수가 없지 않겠소. 일본을 보시오. 일본에서 그렇게 몇 차례나 대장경을 판각하고자 했으나 실패한 이유를…? 그래서 나도 고려대장경판은 무불께서 늘 말씀하시는 백성의 한마음 일심이라고 생각하오.
어디 그것뿐인가요, 경판의 나무는 어떻게 조달했겠소? 온 백성이 한마음으로 산에서 나무를 자르고 옮기고, 소금물에 삶아, 일설에는 바닷물이나 오줌통에 담가 두었다는 말도 있소만…, 가까운 사찰에 시주했다고 봐야지 않겠소. 이와 같은 한마음 일심은 환웅이 이 땅에 터를 잡은 고조선 때부터 내려오는 전통이었소.
이런 경판을 만들려면 최소한 나무 지름이 한자 세치 이상 되어야 되는데, 그것도 아무 나무가 아니지 않소. 나무를 새김에는 회양목이 좋지만 회양목은 사오백년이 되어도 지름이 한 자가 안 된다 말이오. 대부분 가까운 야산에 있는 산벚나무나 돌배나무 아니면 거제수나무로 81,352 경판을 조달했소.“
“오, 그러하오? 나는 자작나무인 줄 알았는데, 산벚나무나 돌배나무 거제수나무였소이까?”
대통도 나름대로 그동안 해인사에 와서 고려대장경 판각에 관하여 많은 연구를 한 듯했다.
“무불, 나도 처음엔 자작나무인줄 알았소. 하지만 자작나무는 조선의 백두산이나 개마고원을 비롯한 북부지방에 자라는 대표적 넓은잎나무지요. 그 먼 북부지방에서 나무를 옮겨 왔다는 것은 무리가 있소이다. 자작나무 못지않게 판각에 좋은 나무가, 마을 주위 야산에서 구하기 쉬운 산벚나무, 돌배나무, 거제수나무 등이 조선 땅 야산에는 지천에 널렸소이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신라시대부터 경판을 시주하는 불사를 많이 했고. 합천 해인사에는 신라시대 일반인이 직접 만들어 시주한 경판이 지금도 수두룩하다오.“
“그러하오이까? 난 그것은 처음 듣는 말인데. 신라 때부터 경판을 만들었다고요!”
무불은 그 말을 듣고 무척 놀라는 듯했다.
“해인사에서는 그것을 사간판私刊板 혹은 잡경이라고 하오, 판각 기술은 고려대장경 보다 떨어진다고 봐야지, 이미 육칠백년 전부터 판각을 했으니 말이오. 나도 얼마 전에 안 사실인데, 신라 이거인李居仁이란 사람이 거제도에서 경판을 새겨 해인사에 봉납했다는 기록을 찾아냈소.”
“신라 이거인 이라고요? 그럼, 목판인쇄는 중국 북송北宋보다 먼저 했다는 말이 아니오? 나도 그렇게 추정은 했소이다만 물증이 없었는데…, 아, 보지 않아도 감이 오는군. 그렇지, 그러했구나…!”
무불은 이거인의 사간판이란 말을 듣고 놀라며 걸음을 멈추었다.
“아시다시피 당은 말엽에 억불정책으로 두 번이나 불교에 관한 모든 자료나 사찰을 불태워버렸소이다. 한때 중국에서는 불교 경전이 사라진 적도 있었지요. 송대에 들어서서 고려에서 불교를 역수입하든 시절도 있었답니다. 고려 승려 체관諦觀은 송나라에 들어가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를 지어 송나라에 불교를 다시 부흥시켰으니까요. 어떻게 보면 신라 원효나 고려 체관은 중국에 상당한 영양을 준 선지식이지요.”
대통에게 해인사 사간판 이야기를 듣고 무불은 뭔가 대단한 것을 발견한 양 걷다말고 무릎을 쳤다. 그러자 자신이 일본에서 공부하다 풀지 못한 고려대장경 판각의 의문점들이 하나하나 풀리는 듯했다.
“대통. 교토 난젠사南禪寺에 있는 고려 초조본 어제비장전변상도御製祕藏詮變相圖의 사실적 묘사 말이오. 일전 대통께서 일본에 왔을 때 우리 같이 친견하지 않았소. 불도 수행처의 한적한 분위기와 심산의 계곡과 산수를 매우 잘 표현했었다고 대통께서 감탄하지 않았소.”
대통이 초조대장경 어제비장전변상도 목판본을 떠올리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렇소. 화법의 구성이 고원 ·심원 ·평원의 3원을 다 갖추어져 있었지요.”
무불은 숨도 쉬지 않고 계속했다.
“북송본의 복각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었지만, 만약 신라시대부터 우리도 판각을 했다면 그게 아니구먼. 고려 변상도와 북송본 변상도를 비교하면 그 구도와 공간 처리 세부 묘사는 분명 차이가 있었소. 일찍이 신라시대 사간판의 기술이 어제비장전변상도의 독자적 묘사로 발전되었다고 추정이 되는 군…! 송과 고려는 쌍벽을 이루었소이다. 서로 교류하며.”
“그렇소, 무불의 개연성에 일리가 있소이다. 물론 고려 초기의 회화나 판각이 당이나 송과의 교류로 일부 영향을 받고 있었음은 사실이나, 이미 고려는 신라시대부터 이어오는 독자적 양식을 추구해 가고 있었던 것을 그 사간판들과 초조 변상도가 증명하지요.”
한참 신라시대부터 내려오는 어제비장전변상도御製祕藏詮變相圖란 개연성을 편 무불이 대통에게 고려대장경판 이동에 대해서 다시 물었다.
“그런데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대장각판 군신기고문大藏刻版 君臣祈告文에는 강화경에서 판각했다고 나와 있지 않소?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조 7년 5월 10일, 임금이 용산강龍山江한강에 가서 강화도 선원사禪院寺로부터 대장경판을 가져오는 것을 참관했다고 하지 않았소?”
“그러하오. 그렇게 기록되어 있소.”
“그럼 그때 운반했다고 봐야지, 아니 그러하오?”
이제 대통도 자신만의 새로운 이론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소. 일부 경판은 그렇게 옮겼다고 봐야지요.”
“일부라고요?”
“예, 일부라고 생각하오.”
무불은 해인사海印寺가 가까워지자 그동안 일본에서 책으로만 연구해 한계에 부닥친 많은 의문들이 하나둘 술술 풀리는 듯했다.
“이렇게 볼 수도 있소. 고려대장경판은 81,258경판이오. 한꺼번에 이동은 불가하다고 봐야지. 내가 아까 말하지 않았소.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대장경판각 불사에 나섰다면, 이것은 어느 권력자 최이崔怡나, 승통僧統 수기守其 스님 한두 사람의 힘으론 불가하단 말이오. 또 고려에서는 그 옛날 불교가 번성했던 신라시대부터 판각한 경판이 해인사에 수두룩하다고 했잖소.”
“그래서요?”
“아까 말했듯이 보시 중에 불보시를 최고로 여기지 않소. 판각을 할 경우 사경보다 많은 불법을 정확하게 보시할 수 있지 않겠소. 다시 말해 고려는 불국이었소. 불국! 온 백성이 일심으로 고려대장경판각 불사에 16년 동안 동참 한 거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말이오. 물론 판하본은 강화경 대장도감에서 작성했겠지만, 판각은 각지에 분사도감을 두었다고 볼 수 있소. 물론 수차례 각수들은 강화경 대장도감에서 집체교육을 받았겠지요. 널리 알려진 남해분사대장도감 뿐만 아니고 참여 각수들을 조사한 바에 의하면, 정장‧ 손작‧ 혜견 등이 경상도 김천의 개령분사대장도감開寧分司大藏都監이란 곳에서 판각했다는 사실을 알아냈소이다.
생각해보시오. 고려의 사찰들은 마을 뒤 산속에 있어 판각 작업이나 책을 만드는 작업을 하는 가장 좋은 여건을 갖춘 장소이오다. 또 경판 목재를 채취해서 운반하고 다듬고 건조시키는데 가까운 사찰만큼 좋은 장소도 없을 것이오. 뿐만 아니라 16년 동안 판각 장인각수들만 수만 명이 동원되었는데, 기 알려진 강화경 대장도감이나 남해분사도감에서 다 판각했다는 것은 무리라고 볼 수 있소. 그 많은 사람들이 숙식을 하고 동시에 작업을 하기엔 많은 불편한 점이 있었을 것이오. 그럼 전국 각 사찰에서 나누어 판각했다고 봐야하지 않겠소. 특히 남쪽 경상도 전라도 지역에서 많이 참여한 것으로 추측이 가오. 당시 경판을 판각한다는 것은 최고의 법보시이었고, 각 사찰에서는 앞다투어 판각불사에 동참했을 것이오.”
두 사람은 고려대장경판 650년 역사를 한 짐 짊어지고 가벼이 고개를 넘듯 낫질재를 넘었다. 조선과 일본에서 서로 연구한 고려대장경판에 대한 의문점을 서로 토로하다보니 어느덧 해는 가야산 산마루에 걸리고 해인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