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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5.05.05 11:11
<부문 3-8>
크리스천 시인들의 사물을 바라보는 태도의 특성
-2020년대 부산크리스천 시인들(2)
《부산크리스천문학》 2022년 상반기호(제37호)에는 크리스천 시인들은 사물을 어떠한 태도로 바라보아야 하는가 하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언급해 보기로 한다. 다른 말로 바꾸면 사물에서 기독교적 세계관을 어떻게 시적으로 형상화 하는가 하는 점을 알아보기로 한다. 그런데 어쩌다가 그러한 작품들을 골라보니 지금까지 한 번도 언급해보지 않은 시인들의 것이 많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많은 시인들의 사물에 대한 태도가 크리스천만의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작품들이 많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신앙고백을 직접적으로 하여 시적 형상화가 부족한 작품들도 일단 제외하였다.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서
햇빛 쩅쨍함만 있는 것은 아니지
시커먼 구름 소나기 몰고 와서
헤어나지 못하도록 퍼 부어도
내일이면 다시 맑은 날을 기대하듯이
서쪽 하늘 석양을 바라보며
곱다고만 느끼나요
어둠이 지나고 나면
동산 위에 붉은 모습으로 반겨지겠지요
모든 어둠을 밝게 비추며
두근거림 속에 가시지 않던
그대 마음은 아직도 추운 겨울인가요
밖으로 나와 보세요
그 마음 간질어 줄
봄바람이 살랑거리고 있잖아요
새파란 잔디 위에
따스한 햇살 가득한 곳에
그대 고운 모습 가만히 던져 놓고
포근히 품어 줄
봄 하늘이 기다리고 있잖아요
-이경옥 「봄으로 오는 사랑」전문
이경옥 시인의 「봄으로 오는 사랑」에서 주목할 점은 시 전편에 흐르고 있는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세계관은 어디서 왔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사물에 대한 즉흥적이고 현재적 인식보다 역설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인식에서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미래지향적인 인식의 근원에는 이 시인의 신앙이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첫 연에서 오늘이라는 현재적 삶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햇빛이라는 편안함과 소나기라는 불편함이 공존하더라도 내일은 맑은 날이 올 것이라 생각한다. 이 부분은 누구나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둘째 연의 경우 서쪽 하늘의 석양을 바라보는 부분에서는 상식적인 인식에서 벗어난다. 즉, 석양이 곱다거나 석양을 지는 해로 보아 노년의 적막감 등으로 만 인식하는 것이 상식인데 그것을 뛰어 넘어 뒷날 동쪽에서 솟아날 아침 해의 밝은 모습까지 생각한다.
셋째 연과 마지막 넷째 연에서는 추운 겨울 날이라고 절망하고만 있지 말라고 시적청자聽者 ‘그대’에게 방 속의 추운 겨울 같은 마음을 청산하고 봄이 오고 있는 방 밖으로 나오라고 권유하고 있다. 그러면서 봄을 다분히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시적 청자 ‘그대’는 이 시인의 다른 작품 「그대(주님)의 손」’처럼 괄호 속에서 ‘주님’으로 한정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그대이다. 따라서 그대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일로 인하여 상처 받고 있는 사람들이거나 사랑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로 생각할 수 있는 점으로 인하여 중층적 해석의 가능성 획득이라는 시적 형상화에 성공한 작품이다. 그리고 봄과 연관 된 사랑의 정서는 크리스천들에게는 주님의 은혜이기도 한 것이 암사되고 있다.
치마를 두른 바람이 사랑몰이를 했어
어둠은 더욱 싫어
소문이 되어 떠도는 그림자
팔을 벌리고 뛰쳐나갔어
바람결에 찢겨진 날개
젖은 기억들을 흔들며 그대와 파도타기를 했어
내리막을 달리는 노을이
문패 없는 세상으로 항해를 했어
우리의 낙원은 스스로 열릴 수 없는 좁은 문이었어
-이옥순 「먼지가 되어」
이옥순 시인의 「먼지가 되어」는 앞의 이경옥 시인의 작품과는 대조적인 작품이다. 앞의 작품에 등장하는 사물들이 거대한 자연현상임에 비하여 이옥순 시인이 경우는 눈에도 잘 보이지 않는 ‘먼지’라는 조그만 것이라는 점에서 우선 그렇다. 그리고 이 시에서 느껴지는 정서 역시 낙관적이거나 희망적이라기보다 허무하고 비관적이다. 그러한데도 이 시를 기독교적 세계관에 입각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는 점은 먼지라는 미세한 자연 현상을 통하여 인간의 한계성 즉, 인간에게 하나님이 임재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한계성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초반에는 시적화자가 먼지라고밖에 볼 수 없으나 마지막 행 ‘우리의 낙원은 스스로 열릴 수 없는 좁은 문’이라는 부분에 등장 하는 ‘우리’라는 시적화자는 단순히 ‘먼지들’이라고 볼 수는 없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먼지기 이 세상을 마음껏 부유한다고 해도 닫혀 있는 공간을 침투하기는 지극히 힘든 일이고 누구에 의해 틈새가 생기거나 잠시라도 열린 공간이 되어야 쉽게 침투할 수 있다는 자연현상을 이렇게 표현함으로써 시적 형상화에 크게 성공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좁은 문’이라는 표현에서 기독교적 상상력이 충분히 보이고 있으며 그로 인하여 이 시가 인간의 한계성을 상징하고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형태면에서 한 행씩 연 구분을 하는 것이나 ‘먼지’를 의인화 시켜 눈에 보이지 않게 떠다니는 것에다 구체적이고 다이나믹한 이미지를 부여한 것도 성공적인 시적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작품 한 편만 본다면 이 시인은 손색없는 시인이다.
그러나 다른 작품 「토우들의 합창」은 좋은 시적 제재임에도 불구하고 시어의 과감한 생략이 부족하여 응축력이 미흡한 아쉬움을 보이고 있다. 앞으로 이러한 점이 청산된 작품들로만 보여줄 날을 기대하기로 한다.
김씨는 맥주 한 박스를 마시고 성가대 가운을 보관하는 장농문이
화장실인 줄 알고 시원하게 쏟아놓고 쓰러져서 깊은 잠에 들었다.
어느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지 않으면 그 버릇 못 고친다는 말
을 전해 듣고 그 교회에 나가서 오늘 안수집사가 되었다.
최씨는 천수경을 외우고 다니는 풍수지리 신봉자.
왜놈들이 솨말둑을 박아서 민족 정기를 끊어 놓았다고 떠들다 나
에게 명리학도 모르는 당신 같은 목사가 있으니 나라가 이 모양이
라고 고함을 쳐댔다. 어느 날, 집앞 교회에 다닌다더니 뭐가 답답했
는지 새벽기도를 하고 있다고 전화를 했다. 어쩌다 그렇게 됐냐 하
니까 행님이 교회에 나가야 한다고 하지않았소. 그는 지금, 성경 필
사를 하고 있다.
김신조 씨는 청와대 폭파한다고 폭탄을 들고 남침했다가 목사가
되었고, 한국 교회 땜에 이 민족에 망쪼가 들었다며 미제와 함께 타
도해야 한다던 이정훈씨는 회개하라는 방송을 듣고 고꾸라지고
난 후, “내 삶의 개혁 신앙”을 외치고 다닌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새 것이 되었도다“
-이창희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새해 서시」
이창희 시인의 경우 지난 호에도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이번 호의 작품은 또 다른 경향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아 언급하가 한다. 우선 ‘새해 서시’라는 부제가 붙어 있어 새해를 맞은 ‘하나의 경우의 시‘라는 인식을 가져 본격적인 시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새해를 맞은 각오나 소망을 피력하는 기존의 시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는 점에서 이 시인의 개성이 돋보인다. 그리고 이 시는 철저히 산문시이면서 서술시이기 때문에 시적 비유나 상징 등의 기법은 등장하지 않는다.
서술시 혹은 이야기 시의 경우 재치 있거나 풍자성을 어느 정도 갖춘 이야기들을 간직해야 하는데, 이 작품의 경우 그러한 역할을 충분히 하는 에피소드들이 등장하고 있다. 첫째 단락에서는 술주정뱅이 김 씨를 등장시켜 웃음을 참지 못하는 장면을 제시하고 있다. 즉 성가대 가운 보관하는 장농문을 화장실로 착각하여 방뇨하는 것도 모자라 그곳에서 잠든 적이 있던 김 씨가 교회에 출석하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 후 안수집사가 된다는 흔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둘째 단락의 경우도 풍수지리 신봉자가 새벽기도에 출석하고 성경 필사도 한다는 최 씨가 등장하고 있다. 풍수지리를 신봉하는 행위도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산의 곳곳에 박힌 쇠말뚝 뽑는다는 구체적이고 흥미로운 상황을 설정하였다는 점에서 충분히 공감이 간다.
마지막 셋째 단락의 경우 1965년의 1.21 사태의 생존 무장공비 김신조 씨가 목사가 된 실제적인 사례와 이정훈 씨라는 반기독교주의자이고 반미주의자가 회심하여 전도자가 된 실레를 들어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실감나게 서술하고 있다.
이상 네 사람의 회심의 경우를 통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인식시켜 주는 것이 이 시의 역할이며 그 기능을 흥미롭게 수행하고 있다. 다만 마지막에 인용된 성경은 굳이 인용하지 않아도 크리스천 독자들은 제목에 담긴 상징성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다음은 시가 아니지만 사물에 대한 기독교적 인식이 담겨 있는 시조 한 편을 인용하여 보기로 한다.
1
남천동 삼익비치 눈에 어리는 벚꽃 길을
정든 이를 찾아가듯 틈 내어 가봤더니
어디서 한창 때 보내고
이제 왔나 묻는다
2
주님 이름 두신 곳
또는 말씀을 사모하듯
KBS 앞 삼거리
튤립 안부 묻는 걸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봉오리만 보여준다
3
저만치 바라보이는 광안대교 누리 마루
해수면이 반가운 듯 일렁이며 말을 걸 즈음
확진자 안내문자가
느닷없이 날아든다.
-허성욱 「남천동」 전문
허성욱 시인의 평시조 3수로 구성된 연시조 「남천동」의 경우 시조의 특색을 잘 드러내면서 사물을 바라보는 양상이 기독교적인 상상력의 전범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시조의 특색이라는 것은 불가피한 지명이나 건물명 또는 꽃 이름을 제외하고는 순수한 우리말로 된 시어로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조도 현실비판이나 모더니즘적 인식을 보여줘도 무방하다는 일부 시조 시인들의 견해에 필자는 동조하지 않는다. 시조는 시조답기 위해 될 수 있는 한 순수한 우리말을 사용해야 하고 발상도 전통지향적이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허 시인의 시조는 일단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첫 수의 벚꽃 구경에서 그 점이 강조되고 있다. 둘째 수의 경우 튤립을 구경하는 행위에다 주님과 말씀을 등장 시켜 크리스천으로서 사물을 보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크리스천의 경우 자연과 사물을 보는 방법이 이러해야 한다. 많은 크리스천 시인들의 경우 제재에 대한 태도는 비기독교인 심지어 불교인과 같은 상력을 전개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허 시인의 이 자세를 보고 반성하고 배워야 할 것이다. 셋째 연에서는 요즈음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코로나 19가 등장한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경각심 정도는 시조에 등장해도 무방하다.
이상 2022년 상반기 호에서는 시에 등장하는 사물이나 공간 그리고 사람들에 대하여 크리스천 시인은 어떠한 자세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보았다.
보다 많은 작품이 언급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네 편의 작품만 인용하지 못한 점을 아쉽게 생각한다.
<양왕용 시인>
<부문 3-8>
크리스천 시인들의 사물을 바라보는 태도의 특성
-2020년대 부산크리스천 시인들(2)
《부산크리스천문학》 2022년 상반기호(제37호)에는 크리스천 시인들은 사물을 어떠한 태도로 바라보아야 하는가 하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언급해 보기로 한다. 다른 말로 바꾸면 사물에서 기독교적 세계관을 어떻게 시적으로 형상화 하는가 하는 점을 알아보기로 한다. 그런데 어쩌다가 그러한 작품들을 골라보니 지금까지 한 번도 언급해보지 않은 시인들의 것이 많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많은 시인들의 사물에 대한 태도가 크리스천만의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작품들이 많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신앙고백을 직접적으로 하여 시적 형상화가 부족한 작품들도 일단 제외하였다.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서
햇빛 쩅쨍함만 있는 것은 아니지
시커먼 구름 소나기 몰고 와서
헤어나지 못하도록 퍼 부어도
내일이면 다시 맑은 날을 기대하듯이
서쪽 하늘 석양을 바라보며
곱다고만 느끼나요
어둠이 지나고 나면
동산 위에 붉은 모습으로 반겨지겠지요
모든 어둠을 밝게 비추며
두근거림 속에 가시지 않던
그대 마음은 아직도 추운 겨울인가요
밖으로 나와 보세요
그 마음 간질어 줄
봄바람이 살랑거리고 있잖아요
새파란 잔디 위에
따스한 햇살 가득한 곳에
그대 고운 모습 가만히 던져 놓고
포근히 품어 줄
봄 하늘이 기다리고 있잖아요
-이경옥 「봄으로 오는 사랑」전문
이경옥 시인의 「봄으로 오는 사랑」에서 주목할 점은 시 전편에 흐르고 있는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세계관은 어디서 왔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사물에 대한 즉흥적이고 현재적 인식보다 역설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인식에서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미래지향적인 인식의 근원에는 이 시인의 신앙이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첫 연에서 오늘이라는 현재적 삶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햇빛이라는 편안함과 소나기라는 불편함이 공존하더라도 내일은 맑은 날이 올 것이라 생각한다. 이 부분은 누구나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둘째 연의 경우 서쪽 하늘의 석양을 바라보는 부분에서는 상식적인 인식에서 벗어난다. 즉, 석양이 곱다거나 석양을 지는 해로 보아 노년의 적막감 등으로 만 인식하는 것이 상식인데 그것을 뛰어 넘어 뒷날 동쪽에서 솟아날 아침 해의 밝은 모습까지 생각한다.
셋째 연과 마지막 넷째 연에서는 추운 겨울 날이라고 절망하고만 있지 말라고 시적청자聽者 ‘그대’에게 방 속의 추운 겨울 같은 마음을 청산하고 봄이 오고 있는 방 밖으로 나오라고 권유하고 있다. 그러면서 봄을 다분히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시적 청자 ‘그대’는 이 시인의 다른 작품 「그대(주님)의 손」’처럼 괄호 속에서 ‘주님’으로 한정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그대이다. 따라서 그대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일로 인하여 상처 받고 있는 사람들이거나 사랑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로 생각할 수 있는 점으로 인하여 중층적 해석의 가능성 획득이라는 시적 형상화에 성공한 작품이다. 그리고 봄과 연관 된 사랑의 정서는 크리스천들에게는 주님의 은혜이기도 한 것이 암사되고 있다.
치마를 두른 바람이 사랑몰이를 했어
어둠은 더욱 싫어
소문이 되어 떠도는 그림자
팔을 벌리고 뛰쳐나갔어
바람결에 찢겨진 날개
젖은 기억들을 흔들며 그대와 파도타기를 했어
내리막을 달리는 노을이
문패 없는 세상으로 항해를 했어
우리의 낙원은 스스로 열릴 수 없는 좁은 문이었어
-이옥순 「먼지가 되어」
이옥순 시인의 「먼지가 되어」는 앞의 이경옥 시인의 작품과는 대조적인 작품이다. 앞의 작품에 등장하는 사물들이 거대한 자연현상임에 비하여 이옥순 시인이 경우는 눈에도 잘 보이지 않는 ‘먼지’라는 조그만 것이라는 점에서 우선 그렇다. 그리고 이 시에서 느껴지는 정서 역시 낙관적이거나 희망적이라기보다 허무하고 비관적이다. 그러한데도 이 시를 기독교적 세계관에 입각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는 점은 먼지라는 미세한 자연 현상을 통하여 인간의 한계성 즉, 인간에게 하나님이 임재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한계성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초반에는 시적화자가 먼지라고밖에 볼 수 없으나 마지막 행 ‘우리의 낙원은 스스로 열릴 수 없는 좁은 문’이라는 부분에 등장 하는 ‘우리’라는 시적화자는 단순히 ‘먼지들’이라고 볼 수는 없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먼지기 이 세상을 마음껏 부유한다고 해도 닫혀 있는 공간을 침투하기는 지극히 힘든 일이고 누구에 의해 틈새가 생기거나 잠시라도 열린 공간이 되어야 쉽게 침투할 수 있다는 자연현상을 이렇게 표현함으로써 시적 형상화에 크게 성공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좁은 문’이라는 표현에서 기독교적 상상력이 충분히 보이고 있으며 그로 인하여 이 시가 인간의 한계성을 상징하고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형태면에서 한 행씩 연 구분을 하는 것이나 ‘먼지’를 의인화 시켜 눈에 보이지 않게 떠다니는 것에다 구체적이고 다이나믹한 이미지를 부여한 것도 성공적인 시적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작품 한 편만 본다면 이 시인은 손색없는 시인이다.
그러나 다른 작품 「토우들의 합창」은 좋은 시적 제재임에도 불구하고 시어의 과감한 생략이 부족하여 응축력이 미흡한 아쉬움을 보이고 있다. 앞으로 이러한 점이 청산된 작품들로만 보여줄 날을 기대하기로 한다.
김씨는 맥주 한 박스를 마시고 성가대 가운을 보관하는 장농문이
화장실인 줄 알고 시원하게 쏟아놓고 쓰러져서 깊은 잠에 들었다.
어느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지 않으면 그 버릇 못 고친다는 말
을 전해 듣고 그 교회에 나가서 오늘 안수집사가 되었다.
최씨는 천수경을 외우고 다니는 풍수지리 신봉자.
왜놈들이 솨말둑을 박아서 민족 정기를 끊어 놓았다고 떠들다 나
에게 명리학도 모르는 당신 같은 목사가 있으니 나라가 이 모양이
라고 고함을 쳐댔다. 어느 날, 집앞 교회에 다닌다더니 뭐가 답답했
는지 새벽기도를 하고 있다고 전화를 했다. 어쩌다 그렇게 됐냐 하
니까 행님이 교회에 나가야 한다고 하지않았소. 그는 지금, 성경 필
사를 하고 있다.
김신조 씨는 청와대 폭파한다고 폭탄을 들고 남침했다가 목사가
되었고, 한국 교회 땜에 이 민족에 망쪼가 들었다며 미제와 함께 타
도해야 한다던 이정훈씨는 회개하라는 방송을 듣고 고꾸라지고
난 후, “내 삶의 개혁 신앙”을 외치고 다닌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새 것이 되었도다“
-이창희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새해 서시」
이창희 시인의 경우 지난 호에도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이번 호의 작품은 또 다른 경향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아 언급하가 한다. 우선 ‘새해 서시’라는 부제가 붙어 있어 새해를 맞은 ‘하나의 경우의 시‘라는 인식을 가져 본격적인 시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새해를 맞은 각오나 소망을 피력하는 기존의 시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는 점에서 이 시인의 개성이 돋보인다. 그리고 이 시는 철저히 산문시이면서 서술시이기 때문에 시적 비유나 상징 등의 기법은 등장하지 않는다.
서술시 혹은 이야기 시의 경우 재치 있거나 풍자성을 어느 정도 갖춘 이야기들을 간직해야 하는데, 이 작품의 경우 그러한 역할을 충분히 하는 에피소드들이 등장하고 있다. 첫째 단락에서는 술주정뱅이 김 씨를 등장시켜 웃음을 참지 못하는 장면을 제시하고 있다. 즉 성가대 가운 보관하는 장농문을 화장실로 착각하여 방뇨하는 것도 모자라 그곳에서 잠든 적이 있던 김 씨가 교회에 출석하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 후 안수집사가 된다는 흔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둘째 단락의 경우도 풍수지리 신봉자가 새벽기도에 출석하고 성경 필사도 한다는 최 씨가 등장하고 있다. 풍수지리를 신봉하는 행위도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산의 곳곳에 박힌 쇠말뚝 뽑는다는 구체적이고 흥미로운 상황을 설정하였다는 점에서 충분히 공감이 간다.
마지막 셋째 단락의 경우 1965년의 1.21 사태의 생존 무장공비 김신조 씨가 목사가 된 실제적인 사례와 이정훈 씨라는 반기독교주의자이고 반미주의자가 회심하여 전도자가 된 실레를 들어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실감나게 서술하고 있다.
이상 네 사람의 회심의 경우를 통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인식시켜 주는 것이 이 시의 역할이며 그 기능을 흥미롭게 수행하고 있다. 다만 마지막에 인용된 성경은 굳이 인용하지 않아도 크리스천 독자들은 제목에 담긴 상징성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다음은 시가 아니지만 사물에 대한 기독교적 인식이 담겨 있는 시조 한 편을 인용하여 보기로 한다.
1
남천동 삼익비치 눈에 어리는 벚꽃 길을
정든 이를 찾아가듯 틈 내어 가봤더니
어디서 한창 때 보내고
이제 왔나 묻는다
2
주님 이름 두신 곳
또는 말씀을 사모하듯
KBS 앞 삼거리
튤립 안부 묻는 걸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봉오리만 보여준다
3
저만치 바라보이는 광안대교 누리 마루
해수면이 반가운 듯 일렁이며 말을 걸 즈음
확진자 안내문자가
느닷없이 날아든다.
-허성욱 「남천동」 전문
허성욱 시인의 평시조 3수로 구성된 연시조 「남천동」의 경우 시조의 특색을 잘 드러내면서 사물을 바라보는 양상이 기독교적인 상상력의 전범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시조의 특색이라는 것은 불가피한 지명이나 건물명 또는 꽃 이름을 제외하고는 순수한 우리말로 된 시어로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시조도 현실비판이나 모더니즘적 인식을 보여줘도 무방하다는 일부 시조 시인들의 견해에 필자는 동조하지 않는다. 시조는 시조답기 위해 될 수 있는 한 순수한 우리말을 사용해야 하고 발상도 전통지향적이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허 시인의 시조는 일단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첫 수의 벚꽃 구경에서 그 점이 강조되고 있다. 둘째 수의 경우 튤립을 구경하는 행위에다 주님과 말씀을 등장 시켜 크리스천으로서 사물을 보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크리스천의 경우 자연과 사물을 보는 방법이 이러해야 한다. 많은 크리스천 시인들의 경우 제재에 대한 태도는 비기독교인 심지어 불교인과 같은 상력을 전개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허 시인의 이 자세를 보고 반성하고 배워야 할 것이다. 셋째 연에서는 요즈음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코로나 19가 등장한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경각심 정도는 시조에 등장해도 무방하다.
이상 2022년 상반기 호에서는 시에 등장하는 사물이나 공간 그리고 사람들에 대하여 크리스천 시인은 어떠한 자세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보았다.
보다 많은 작품이 언급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네 편의 작품만 인용하지 못한 점을 아쉽게 생각한다.
<양왕용/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