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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인문기행

가야산 고려대장경판 1 - 2편)

작성일 : 2025.04.29 09:53 작성자 : 김하기

      백두대간 인문기행

                가야산 고려대장경판 1)

 

국왕 휘는 태자太子ㆍ공ㆍ후ㆍ백ㆍ재추宰樞 문무백관 등과 함께 목욕재계하고 끝없는 허공계, 시방의 한량없는 제불보살과 천제석을 수반으로 하는 삼십삼천의 일체 호법영관에게 기고하나이다.
심하도다. 달단이 환란을 일으킴이여, 그 잔인하고 흉폭한 성품은 이미 말로 다할 수 없고 심지어 어리석고 혼암함도 또한 금수보다 심하니, 어찌 천하에서 공경하는 바를 알겠으며 이른바 불법이란 것이 있겠는가? 이런 때문에 그들이 경유하는 곳에는 불상과 범서를 마구 불태워버렸다. 이에 부인사에 소장된 대장경 판본도 또한 남김없이 태워버렸으니. 슬프다.

                                                                                            -대장각판군신기고문 1-

 

고려대장경 高麗大藏經, Tripitaka Koreana은 석가모니 말씀의 경··의 삼장三藏으로 불교경전의 집대성을 말한다.

 

다 아시다시피, 고타마 싯다르타 왕자가 29세에 출가하여 35세에 깨달아 부처가 되고 80세 열반에 들 때까지 제자들에게 한 말씀 교리 경, 은 부처가 설한 내용 가운데 계율과 관련되는 것을 말하며, 은 경과 율에 관한 보살 제자들의 해석서이다. 이 셋을 합쳐서 삼장三藏 이라 하는데, 우리는 대장경大藏經이라 부른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살아계셨던 기원전 560년에는 글이 없어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으로 남길 수 없었다.

여시아문如是我聞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로 시작하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설법이 처음에는 여러 제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든 다음해, 왕사성 밖 칠엽굴에서 500명의 비구들이 모였다. 다문제일 아난阿難이 경을 독송했고, 계율을 지키는데 으뜸인 우바리優婆離가 율을 일러주었다. 제자들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설법에 대한 1차 오백결집이라 불렀다.

부처님 열반 후 약 100년이 지나자, 계율에 대해 새로운 설을 제창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났다. 교단은 보수적인 상좌부(소승)와 진보적인 대중부(대승)로 분열되였고, 베샬리에서 700명의 상좌부 장로가 모여 율장을 편집하였는데, 이것을 2차 칠백결집이라고도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 열반 후 약 200년이 지난 아쇼카왕 시대에 1000명의 비구들이 모여 경의 삼장을 결집하였다. 이를 사람들은 3차 천인결집이라고 부른다.

처음 삼장은 패다라 나무껍질에 산스크리트어나 팔리어어로 기록되었고 이것이 패엽경이다. 이 패엽경은 오랫동안 수행한 수도승이 아니면 읽을 수 없었다.

패엽경은 인도 북서쪽 간다라를 지나 히말라야를 넘고 사막을 건너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으로 들어왔다. 산스크리트어나 팔리어어로 된 경전을 동진의 도안道安이 최초의 한역불경으로 번역했다. 이후 당나라 지승智昇이 개원석교록 번역서를 집성했고, 우리에게 삼장법사로 알려진 현장玄裝이 정리하여 널리 보급하였다. 대장경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인 경, , 을 한자로 집성한 큰 바구니(산스크리트어 트리피타카 Tripitaka)란 뜻이다.

 

방대한 대장경을 손으로 일일이 사경하여 부처님의 설법을 전달하는 데는 한계가 많았다. 승려들은 나무판으로 도장 찍듯 인쇄하는 획기적인 기술을 개발해 냈다. 송나라는 972년에 판각을 시작하여 983년에 13만 매의 북송판대장경北宋版大藏經을 만들었다.

신라는 원효의 대승기신론소 금강삼매경론 등으로 중국을 앞서는 불교국가佛國로 자부심이 대단했다.

신라 때부터 경판을 판각하여 불경을 찍어내 당나라와 교류해오다, 고려는 불경을 송나라에 역수출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북송대장경이 만들어지자 고려 백성은 큰 충격을 받았고 거국적으로 고려대장경판각 불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고려 현종21011년에 북방 거란이 침략해오자, 부처님의 가피를 염원한 고려 백성은 한마음 일심으로 대장경을 새겨 외적을 막아 내고자했다.

 

                                                           *

- 여기서 필자의 장편소설 일심을 한번 보자 -

(무불 탁정식은 실존인물로 김옥균의 갑신정변에 일본으로 망명한 조선 승려,

히라노 게이스이는 일본인 승려로 법명은 대통, 해인사 상주하며 팔만대장경을 연구하는 승려로 소설에 등장하는 가상 인물임을 밝혀둔다.)

 

1907121

경부선 대구역에서 일본 궁내대신 다나카 자작과 헤어진 탁정식 무불無不은 물어물어 낙동강 고령 개경포開經浦 나루터를 찾아가고 있었다. 한성까지 가는 궁내대신 다나카 자작이 일본 헌병대의 말과 호위병을 붙여주겠다는 것을 극구 사양했다.

대한제국 황태자 결혼식에 일본 특사로 온 다나카 자작의 예상 경로를 한번 보자. 우선 한성에서 의민 황태자의 결혼식에 참석할 것이다. 그날 저녁 일본국 메이지 덴노의 특사 자격으로 만찬장에서 고종 황제 · 황태자와 사진을 찍는 것으로 공식 행사는 끝난다.

다음날 기차를 타고 개성으로 이동한 후, 도굴꾼 사카와와 경천사敬天寺 십층석탑을 해체해 경부선 기차에 실어 부산항 창고로 보낼 것이다. 다나카 자작과 도굴꾼 사카와는 대구 주둔 영남현병대의 지원을 받아 말을 타고 합천 가야산 해인사로 올 계획을 잡고 있다.

81,352 경판을 포장하면 총 무게만 수백 톤이 넘는다. 이 수송을 영남현병대가 대구역까지 옮겨와 경부선 기차에 실어 부산으로 보낸다. 부산 초량 부두에서 관부연락선 이키마루호에 실어 일본 시모노세키로 옮길 계획을 잡고 있다. 주도면밀한 다나카 자작은 한성에 있는 조선통감부에 미리 연락했다. 고려대장경판은 메이지 덴노에게 봉납할 선물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해 나갈 것을 지시한 상태였다.

 

 

히라노 게이스이平野惠粹 대통大通은 사무라이 출신의 승려로 요코야마 야스타케横山安武정한론을 반대하고 일조중日朝中 삼국 동맹을 주장한 메이지 유신의 공신이었다. 뜻을 같이 한 친구 요코야마 야스타케와 덴노에게 정한론의 부당함을 충언한 후 작위를 반납하고 공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조선 선불교를 동경해오다 정토진종 부산 본원사本願寺(1876년 한일수호조약 후, 일본이 부산에 세운 사찰)로 건너왔다. 범어사 승려 이동인李東仁무불無不 탁정식을 만나 단번에 그들의 학식과 불심에 크게 감응했고 세 사람은 조선과 일본의 화이부동을 위하여 단번에 의기투합했다.

(이동인李東仁은 조선 개화파에게 암살당함.)

1895년 을미사변 때 일본 궁내대신 다나카 미추야키가 보낸 일본의 야쿠자들이 새벽녘 경복궁에서도 가장 깊숙한 건청궁에 난입하여 명성왕후를 시해하자, 히라노 게이스이平野惠粹조선에 참회한다며, 가야산 해인사로 들어가 대통大通이란 법명을 받고 조선 승려가 되고 말았다.

지금 대통大通은 합천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서 12년 째 고려대장경판(재조대장경) 연구에 정진 중이고, 갑신정변을 피해 김옥균을 따라 일본으로 간 무불 탁정식은 도쿄 본원사에서 22년째 고려대장경판(초조, 교장, 재조대장경)을 연구해왔다. 두 사람은 자주 서신을 주고받으며 자신들의 연구 결과와 의문점을 토론해 왔다. 아무래도 이동이 자유로운 대통은 가야산 해인사와 도쿄 본원사를 오가며 좋은 도반으로 25년을 뜻을 같이하고 있다.

무불은 일본 궁내대신 다나카 자작이 해인사 고려대장경판을 강탈하기 위해 온다는 사실을 미리 대통大通에게 편지로 알렸다. 두 사람은 1907121일 정오에 고령 개경포開經浦 나루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60, 백두대간 인문기행

                    가야산 팔만대장경판의 비밀 2)

 

큰 서원을 발하여 대장경 판본을 판각해 이룬 뒤에 거란 군사가 스스로 물러갔다. 판각한 것도 한가지고 군신이 함께 서원한 것도 또한 한가지인데, 어찌 그때에만 거란 군사가 스스로 물러가고 지금의 달단은 그렇지 않겠는가?.

                                                                                                   -대장각판군신기고문 2-

 

 

1907121일 정오

조선의 겨울 하늘은 싸늘했지만 맑고 청명했다.

반갑소이다. 대통.”

무불, 용케 잘 찾아왔소이다. 개경포 나루터 길 찾기가 쉽지 않았을 터인데? 그래 조선에 다시 오니 감회가 어떻소이까? ”

무불은 대뜸 두 팔을 벌리고 조선의 찬 공기를 한껏 마신 후 시조를 한 수 읊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어디서 많이 듣던 시조오이다.”

고려 말, 길재吉再 선생의 회고가 올시다. 지금의 내 심정을 그대로 잘 표현한 것 같소이다.”

두 사람은 포옹을 하며 반가워했다. 어찌 보면 몇 겁의 오랜 친구였을 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갑장으로 조선과 일본의 국적을 떠나 터놓고 지내는 허물없는 사이다.

대통은 가야산 해인사로 가기 위해 낫질재로 길을 잡으며 말했다.

다나카 그 자가 조상들의 원을 풀려고 하는 모양인데. 누구 마음대로 대장경판을 일본으로 가져간단 말이오. 대장경판을 빼앗는다는 것은 한 나라를 빼앗은 일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모르고 하는 소리지. 총칼로 나라를 빼앗을 수는 있어도, 총칼로 문화를 아니 조선의 일심을 빼앗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지금은 동안거로 스님들이 거처를 옮기지 않고 용맹정진하고 있소이다만, 조선 스님들은 종단과 각 사찰마다 거미줄같이 연락망이 구축 되어있지 않소. 본사에서 연통하면 하루 이틀이면 전국의 말사까지 봉화나 파발보다 빨리 정확히 전달할 수 있다오.”

무불은 만족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제 보니, 대통께서 조선 사람 아니, 조선 중이 다되었구먼. 특히 남도 스님들의 단결은 옛날부터 정평이 나 있었지요. 그럼 팔만대장경판을 지키는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소이다.”

다나카 그 자가 조선의 중들을 얕잡아보고 있는 듯 한데, 조선의 스님들은 위정자들과는 다르오이다.”

그렇다면 안심이 구료. 이제 보니 대통께서 조선말도 아주 유창해졌어요. 한데 내가 오면서 보니 민심이 흉흉하더이다.”

대통은 염주를 돌리며 걱정했다.

대통은 그동안 일본의 횡포를 무불에게 하소연하듯 숨도 안 쉬고 털어놓았다.

 

                                                                                         *

 

두 사람은 개경포 나루터에서 해인사로 발길을 재촉했다. 누더기 승복을 입은 대통과 삿갓을 쓰고 잿빛 두루마기를 걸친 무불에게 지나가는 사람들은 합장하고 머리를 숙였다.

무불께서 일본으로 건너가 파묻혀있던 고려대장경을 찾아내고 다시 조선의 일심에 불을 붙이는 불씨가 되었으면 하오.”

사실 나도 조선에 있을 때 머리 깎은 중이라지만 떠돌이 땡추라 고려대장경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었소. 또 접하기도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었고, 하지만 일본에서 우연히 고려대장경을 접하고 단박에 눈을 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오.”

그것을 어찌 단박이라고 할 수 있겠소. 평소 무불의 一心이 꽃을 피운 것이지요.”

, 칭찬이 과하시오다.”

무불, 아까 그 나루터를 사람들은 개경포라고 부르지요. 경을 연다는 개경포開經浦란 지명으로 보아 분명 고려대장경도 여기서 강을 건너왔다고 난 생각하는데, 여기서 가야산 해인사까지는 조선의 거리로 백리요. 두어 번 해인사 법조法照 스님과 대장경의 예상 이동 과정을 추측하고 따라 와 보았소. 강화도나 남해에서 육지로 오거나 뱃길로 와도 개경포 나루를 통했다고 짐작할 수 있지 않겠소?”

두 사람은 겨울바람을 등지고 부지런히 옥계리 낫질재를 올라섰다. 길은 좁았고 소달구지나 수레도 다닐 수 없는 길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듯했고 부지런한 사람들은 등짐을 지기도하고 머리에 이고 바삐 고개를 넘고 있었다. 무불이 물었다.

대통, 이 수레도 다닐 수 없는 길에 대장경판을 어떻게 운반 했겠소?”

그러하오, 여기부터 야로 해인사 입구까지는 수레도 다닐 수 없는 길이오, 저기 보시오. 저 사람들 모양 조선의 남자들은 대장경판을 지게에 지고, 아낙들은 머리에 이고 해인사까지 옮겼다고 추측할 수 있지 않겠소.”

그렇군요. 지금 저분들의 모습이 당시 대장경판을 이고 진 모습이군요.”

그러하다오, 조선 사람이나 고려인들의 모습 하나 하나에 불사가 아닌 게 없었다고 나는 생각하오. 당시 고려 독제정권 최이崔怡의 실정과 몽골의 침략을 막기 위해 백성들이 한마음 일심으로 맞서 대장경판을 판각하였고. 억불의 조선에서도 백성의 일심으로 옮기고 지켜냈던 것이라 생각하오.”

대통은 한 손으로 염주를 돌리며 나무아미타불을 한번 찾더니 말을 이었다.

나무아미타불, 그러게 말이오, 나도 그게 늘 의문이었소. 우리가 밝힐 수는 없지만, 한번 계산을 해봅시다. 고려대장경판 하나의 무게를 대충 1관으로만 잡아도 81,352경판의 총 무게는 약 8만 관이 넘고. 짚으로 싸고 나무상자에 포장을 할 경우, 최소 총무게를 대충 잡아도 10만 관이 넘는다 말이오. 한 사람이 다섯 관씩 운반했다고 해도 하루에 이만 명 이상 필요하지요.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이고 지고 운반했다면 아무리 조심해 운반을 한다고 해도, 현재 해인사에 있는 고려대장경판의 표면이 너무 깨끗하다오. 확대경으로 봐도 전혀 마모된 흔적이 없단 말이오. 생각해보시오.”

대통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말했다.

강화도에서 해인사까지는 천릿길이오, 수없이 반복해서 배나 달구지에 싣고 내리고, 사람이 이고 지고했다고 봐야지 않겠소? 그럼 흔들릴 수밖에 없고 경판끼리 맞닿은 흔적이 남기 마련 아니오? 그런데 너무 말짱하단 말이오. 81,352경판이 전혀 이동 없이 이 자리에서 꼭 엊그제 새긴 것 같으니 믿기 어려운 일이 아니겠소.

특히 자 같은 점이나 가는 부분이 수없이 많은데도 떨어져 나간 부분 하나 없소이다.

81,352경판을 산 넘고 물 건너, 이고 지고 한 번에 완벽하게 옮긴다는 것은 불가능하오.

그럼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소. 해인사 가까운 곳에서 판각했다고. 아니면 전국의 사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법회를 열 듯 말이오. 어차피 경판의 판하본은 강화경江華京 대장도감大藏都監에서 개타사 승통僧統 수기守其대사를 비롯한 고승대덕들이 직접 교정 감수를 하고, 필체가 좋은 학승들이나 승과에 급제한 스님들이 집체교육을 받아 구양순체歐陽詢體로 쓰고, 전국의 각수들이 일심으로 한자 각하고 삼배를 하면서 16년 동안 새겼다고 봐야지요. 그런데 무불의 편지를 받고 난 놀랐소. 무불께서 연구한 각수들이 자율적이었다는 것에 정말 놀랬소. 난 처음 고려대장경판이 무인정권의 실권자 최이崔怡에 의하여 반강제로 만들어진 줄 알았소이다. 조선 스님들도 대부분 그렇게 알고 있고요.”

무불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 동안 대통께서도 공부를 많이 하셨구려. 1236년은 고종23년으로 무신정권의 독재자 최이가 군림했고, 달단韃靼몽골이 고려의 전국토를 유린하고 쑥대밭으로 만든 시기가 아니오. 하지만 고려인들은 무주상보시의 한마음 一心으로 판각했소이다. 억불숭유의 조선 선비나 일본의 일부 학자들이 고려 불교를 폄하하기 위해 한 말이지요.”

두 사람은 고려대장경에 관하여서는 이론적으로 통탈하고 있었다. 원래 무불도 조선에 있을 때는 고려대장경에 관하여 그렇게 많은 관심을 가지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무불이 일본으로 망명을 하고 놀란 것은 예로부터 일본 왕실은 말할 것도 없고 고승대덕들이나 관료와 백성들까지 고려대장경판을 용의 여의주처럼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조선에는 몇 권 없는 고려대장경 영인본이 일본에는 수두룩하다는 사실에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조선에는 전설처럼 전해오던 초조고려대장경 영인본이 일본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무불은 단번에 법안法眼으로 고려대장경판의 一心을 보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