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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의 산 가야산
작성일 : 2025.04.29 09:50 작성자 : 김하기
가야의 산 가야산
미친 물 바위를 치며 산봉우리 울리어
사람들이 하는 말 지척에서도 분간하기 어렵네
세상의 시비소리 귀에 들릴까 두려워하여
일부러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둘러 막았네
狂奔疊石吼重巒 人語難分咫尺間 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
- 최치원의 제가야산-
가야의 산 가야산은 신라의 삼대 천제인 최치원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고, 다 아시다시피 우리 민족의 한마음 一心과 그 뜻을 같이하는 고려대장경판이 보관 되어있는 곳이다.
윗 글은 최치원의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 또는 가야산홍류동伽倻山紅流洞이라고도 불린다. 신라 6두품 최치원이 나라를 걱정하며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여조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천령태수의 사직을 버리고 가야산에 들어가 대자연의 이치인 물소리를 벗 삼아 세상의 시시비비를 듣지 않고자 하는 은둔의 결의를 다진 글인듯하다.
최치원의 석리정전釋利貞傳을 보면 가야산의 산신山神 정견모주는 천신天神 이비가 夷毗訶와의 사이에서 뇌질주일(대가야왕 이진아시)과 뇌질청예(금관가야왕 수로왕)를 낳았다고 했다.
按崔致遠釋利貞傳云 伽倻山神正見母主 乃爲天神夷毗訶之所感 生大伽倻王惱窒朱日 金官國王惱窒靑裔二人 則惱窒朱日爲伊珍阿豉王之別稱 靑裔爲首露王之別稱
낙남정맥 가야의 태생은 바로 가야산에서 시작했고 산신령 격인 정견모주는 백두대간을 타고 한반도에 퍼진 마고할미와 그 뿌리가 일맥상통하는 뜻이다.
대가야국의 마지막 월광태자月光太子는 정견의 10대 손이며 그의 아버지 이뇌왕은 신라의 이찬 비지배의 딸을 맞아 청혼하여 태자를 낳았다. 이뇌왕은 뇌질주일의 8대 손이다.
가야산의 들머리인 합천군 야로면에는 월광리가 있고, 월광태자는 가야산으로 정견모주를 찾아 들어갔으니, 가야산은 가야의 모태며 마지막 돌아가는 곳 즉 뫼이다. 한반도 백두대간에서 태어난 우리는 모두 산신이 점지했고 또 마지막 산 즉 뫼로 돌아간다는 뜻이 아닌가?
조선의 비기 도참서인 정감록에는 송악산의 고려가 400년 지기를 다하고, 북한산의 조선이 5백 년 후 망하고 나면 정씨가 계룡산에 도읍을 정하여 8백 년을 잇고, 다음은 조씨趙氏가 가야산伽倻山에 도읍을 정한 뒤 천년을 잇는다고 했다. 지금 와서 보면 일제강점기 36년, 남북이 분단되어 70년을 이어왔으니, 일단 정감록은 믿기 어려운 책이다.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가짜 도참서였지만 당시에는 천기누설이란 하늘이 정한 이치라 할 만큼 대단한 민족 예언서였다. 아마도 힘없이 늘 억압 받아온 백성에게는 듣기만 해도 속이 시원한 유언비어였을 것이다.
그럼, 그 유언비어의 책 정감록에서 말하는 10 승지는 어디인가?
소백산: 풍기 차암 금계촌 소백산 두 물골 사이 豊基車巖金鷄東峽小白山兩水之間
화산: 청양 봉화 동촌으로 넘어 들어가는 곳 花山召嶺古基在靑陽縣越入奉化東村
속리산: 보은 속리산 네 등성이 報恩俗離山四甑項延地
월악산: 예천 금당실 醴泉金堂室
계룡산: 유구와 마곡 두 물길 사이 公州鷄龍山維鳩麻谷兩水之間
영월: 동쪽 상류 寧越正東上流
무봉산: 무주 무봉산 북동방상동 茂朱舞鳳山北銅傍相洞
부안 변산: 호암 아래 扶安壺巖下
운봉 두류산: 운산봉 두류산 雲山峰頭流山
합천 가야산: 만수동 陜川伽倻山萬壽洞 이렇듯 가야의 산 가야산을 비기에서는 가장 안전하고 지기가 흥할 곳으로 봤다.
가야산은 백두대간 남쪽 지리산 영신봉에서 낙남정맥을 타고 벋은 가야의 산으로, 백두대간의 호랑이가 자주 출몰한다는 산세가 깊은 곳이다. 일찍이 대가야가 자리 잡아 사람들이 터를 잡은 곳으로 봄이면 백두대간의 진달래가 만발하고 가을이면 억새가 휘날려 아주 한국적 정서가 깃든 곳이다.
산 정상부에 주봉인 상왕봉(1430m)이 우뚝 솟아있고, 1,000m 내외의 연봉과 능선이 뻗어 다양한 지형과 아름다움을 일러 예로부터 ‘조선팔경’ 또는 ‘12대 명산’의 하나로 꼽혀 왔다.
우리나라 3대 사찰 가운데 하나인 법보사찰 해인사가 있고 고려대장경판 일명 팔만대장경판이 보관되어 있다.
다 아시다시피 고려는 여러 차례 외세의 침략을 받아왔다. 그때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위정자들은 일단 도망가고, 백성과 관리들을 국교인 불심으로 국란을 막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아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과연 종교 불교로 외세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인가?
고려 초조대장경판의 제조 목적부터 한번 살펴보자.
고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하여 판각한 우리나라 최초의 대장경이다.
북송 대장경이 991년 고려에 전래하자, 불교를 국교로 숭배하며 북송에 불교 경전을 역수출하던 고려는 크게 자극을 받고 대장경 판각을 서둘러 준비하고 있었다.
993년(성종 12)에 거란이 고려로 침략해 들어왔다. 1011년에는 고려 현종이 남쪽으로 피하였으나, 거란군이 수도 송악에서 물러나지 않자, 신하들은 부처님에게 큰 원을 세워 대장경판을 새기기로 한마음으로 서원하자, 바로 거란군이 물러간 것이다.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의 「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 참고
다시 말해, 거란이 고려를 침략하자, 고려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을 받들고 한마음으로 정신을 통합하여 외적으로부터 국가와 백성을 지키겠다는 간절한 다짐을 한 것이다
필자는 백성의 간절한 다짐을 우리의 한마음 一心이라 본다. 그 一心으로 초조대장경판을 조성한 것이다.
우리 민족의 한마음 一心은 무엇인가?
우리 민족은 기원전 2333년 전부터 환웅의 천부도에 의한 홍익인간 사상을 국시로 삼아왔다. 이것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선진화된 사상이 아닐 수 없다.
다 아시다시피 홍익인간 사상은 온 누리의 인간뿐만 아니고 주변의 모든 존재를 이롭게 한다는 뜻이 아닌가. 최치원은 이것을 왈 풍류라 했다. 자비와 절대 평등을 주장하는 원효의 일심사상도 여기서 나왔다고 본다. 선지식 원효는 일심은 만유의 본체(나무아미타불, 眞如)이고, 화쟁은 만유의 공존(보시, 生滅)이라고 했다.
만유의 본체인 一心을 원효는 저서“대승기신론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삼국 중 가장 약소국인 신라가 세계 최강의 당나라를 이 땅에서 완전히 쫓아냈다는 사실은 우리 민족에게 면면히 흘러온 힘인 간절한 한마음 一心이 있었기 때문이다. 몽골의 침략에 끝없는 저항, 임진왜란의 의병 승병이 한마음 一心이고, 동학농민혁명· 3.1운동· 4.19· 5.18 가까이는 IMF 극복이 한마음 一心이다. 우리 민족 가슴속에 뿌리 깊은 이념인 인간뿐만 아니고 주변의 모든 존재를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 사상이 너와 나를 벗어난 간절한 한마음 一心이지 않은가?
필자가 여러 번 말했지만, 당나라에서 돌아온 최치원은,
國有玄妙之道曰風流 設敎之源 備詳仙史 實內包含三敎 接化群生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말하기를 ‘풍류’라 한다.
설교지원 비상선사 실내포함삼교 접화군생이라 했다. 접화군생 즉 다른 것이 하나가 되는 일심인 것이다.
양극화로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작금에 다른 것이 하나가 되는 一心만이 우리가 나아갈 길이다.
초조 고려대장경판은 1011년에 시작하여 1087년까지 77년이 걸려 백성의 간절함 즉 一心으로 새겼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거란군은 물러갔다.
1232년 몽골의 침략으로 부인사에 있던 초조대장경이 불타버렸다.
고려는 초조대장경이 몽골군에 소실되자, 몽골군이 물러가기를 원을 세우며 재조대장경(팔만대장경)을 다시 조성한다.
현재 가야산 합천 해인사 장경각에 보관되어 있는 고려대장경판 일명 팔만대장경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