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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5.04.27 01:28
<부문3-7>
궁극적 관심으로서의 시쓰기
-2020년대 부산크리스천 시인들(1)
필자가 크리스천 문인이 어떤 작품을 써야 하는가를 말할 적에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 있다. 즉, 자칫하면 간증이 되기 쉽고 기도가 되기 쉽다. 그렇게 되어서는 문학적 성취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경고한다. 사실 오늘날의 크리스천 문인들 가운데는 간증을 수필이라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고 약간 시적 기도문을 시라고 인식하는 사람들도 있다. 성경을 텍스트로 하여 시나 수필을 창작할 경우에는 특히 이러한 점을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 즉, 수필이나 시로서 형식이나 기법 측면에서 완성도를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 되겠다. 여기서 시의 기법이라는 것은 시와 산문의 가장 큰 차이인 비유와 리듬이다. 비유라는 개념 속에는 상징까지 포함될 수 있고 그것들로 형상화되는 이미지의 전개 방식까지 포함된다.
다른 한 편에서 내용이나 문학적 세계관에서는 어떠한가를 말할 때에는 문화신학자 폴 틸리히의 이론인 ‘궁극적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을 자주한다. 즉, 시적 태도나 글 속에 등장하는 세계관이 궁극적으로 기독교적 세계관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크리스천 문인들이 형상화 시키는 문학세계나 등장하는 제재 특히 자연을 보는 태도가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들과 똑 같다든지 우리나라 사람들의 심성 속에 잠재한 샤머니즘이나 불교나 유교적 세계관으로 본다면 그것을 크리스천 문인들의 작품이라고 볼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는 말이 되겠다.
혹자는 궁극적 관심은 신앙시를 쓸 때에만 가질 태도이고 그렇지 않은 일반시를 쓸 때는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필자는 일반시와 신앙시를 구분하는 태도는 마치 교회 생활과 세상 생활을 구분하는 이중적 삶을 살아가는 크리스천들과 같은 생각이라고 본다. 이런 면에서 크리스천 시인들이 격조 높은 시를 쓴다는 것은 크리스천이 아닌 시인들보다 훨씬 어렵고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부산크리스천문학⟫2021년 후반기호(통권36호)에서 이상의 두 가지 측면에서 그 완성도가 높은 몇 작품을 발견하게 된 것은 대단히 즐거운 일이었다.
사랑
하나만 남기시고
떠난 그대
사랑만 가지시고
모두
버리라 하시네요
비워 있는 만큼
그대
마음인 것을
어제나 저제나
오신다는
황홀한 약속
오 사랑이 왔네
-류정희 「나의 사랑은 언제나 처음이다 2」전문
류 시인의 「나의 사랑은 언제나 처음이다 2」는 그의 연작시 세 편 가운데 하나이다. 연작시 1과 3의 경우는 사랑의 대상이 ‘예수’혹은 ‘하나님’이라는 점이 쉽사리 드러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중적으로 읽힐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함으로 인하여 시적 성취가 신앙 안에만 갇히고 있지만 인용한 2의 경우 크리스천이 아닌 경우에 과연 ‘그대’가 누구인가 파악하기 힘들어 시의 특색인 애매성을 획득하면서 읽힐 개연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달리 말하면 그들은 ‘그대’를 사랑하는 사람이나 존경하는 대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천에게는 ‘그대’가 시 속에는 직접 등장하지 않고 있지만 예수님으로 인식된다. 한편 직접적으로 신앙고백을 하지 않으면서 기독교 신앙의 진수이자 특히 신약성경의 가장 중요한 주제인 ‘사랑’을 형상화하고 있는 점에서 시적 기교나 궁극적 관심 두 측면에서 충분히 성공하고 있다.
1937년 대구 남성공업사에서 만든 종鐘이 녹슬어 침묵하고 있다.
십자가 첨탑에서 새벽을 깨웠던 새鳥가 목이 쉬어 울기를 그쳤다.
종지기 총각으로 불리던 노신사, 유리상자 속 박제된 종 앞에 어린
아이 손을 잡고 서 있다. 이제 무릎이 굽어 무엇 하나 할 수 없는데
누구 유리문 열고 저 종 쳐줄 사람 없느냐 묻고 있는 듯.
-송정우 「종」 1 부분
송 시인의 「종」은 산문시인데 인용한 1말고도 2와 3이 한 편으로 연결되어 있다.산문시는 원래 분석적이고 토의적으로 읽어야 하는데 우선 이 시도 그렇게 읽어야 그 의미가 완전히 파악된다는 점에서 산문시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문장 부호(마침표)도 빠뜨리지 않고 표시하여 의미파악을 돕고 있다. 이 시는 총각 시절 교회에서 종지기노릇을 한 노신시가 손자라고 여겨지는 아이의 손을 잡고 기독교 박물관이나 기념관 전시실에 1937년 만들어진 종 앞에 서 있는 것으로 시적 공간이 설정되어 있다. 실제로 이 종을 쳤는지 혹은 그 무렵 다른 종을 쳤는지는 알 수 없다. 그것에 대하여 독자들은 마음대로 상상하면 된다.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 바로 산문시의 특성이다.
십자가 종탑에 걸려 있어야 하는 종이 그 구실을 못하고 전시되어 있는 것을 앞부분에서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의 또 다른 매력은 마지막 부분 ‘누구 유리문 열고 저 종 쳐줄 사람없느냐 묻고 있는 듯’을 어느 부분과 연결시켜 읽을 것인가 하는 점에서 여러 견해가 등장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선 노신사가 무릎이 온전하지 못해 대신 종 쳐 줄 이를 기대한다는 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아니면 종의 침묵과 연결시켜 종 자체가 본래의 기능을 소망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노신사와 손자의 등장도 신앙의 삼대라는 상상을 할 수 있다. 이렇게 심층적이고 분석적으로 신앙의 전수와 신앙의 연륜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 바로 이 시이다.
망망한 바다에
외로운 점 하나
아프면 섬이 된다.
아무도 오지 않는 그 섬에
아무도 올 수 없는 그 섬에
그윽한 눈빛으로
흰 옷자락을 드리우며
당신은 말없이 찾아 오셨다
아무도 오자 않는 그 섬에
아무도 올 수 없는 그 섬에
그렁그렁한 눈물로
당신은 조용히 찾아 오셨다
그 섬에
-감윤옥 「 그섬에」 전문
감 시인의 「 그 섬에」는 시 밖에 있는 시적화자에게 주님이 임재하심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시이다. 우선 첫 연에서 시적화자의 외롭고 고통스러운 심리적 상황을 ‘외로운 섬’으로 사물화 한다. 그러면서 고독하고 절망적인 화자의 심리적 상황을 둘째 연에서 ‘아무도 오지 않는’ 혹은 ‘아무도 올 수 없는’ ‘섬’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다음 셋째 연과 넷째 연에서는 주님을 ‘당신’이라고 표현하면서 주님의 임재하심의 양상을 ‘그윽한 눈빛’과 ‘그렁그렁한 눈물‘로 제시하고 있다. 주님은 우리 삶에서 때로는 그윽한 눈빛처럼 혹은 그렁그렁한 눈물처럼 임재할 수 있다는 진리를 형상화한 부분이 바로 이 곳이다.
감 시인이 지칭하는 ’당신‘은 크리스천 시인들이 주님을 다소 객관화 하여 부르는 극존칭으로서의 당신으로 단순한 2인칭이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은 신앙인들에게만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보편성을 가지고 있는 존칭대명사이다. 따라서 비기독교인 독자들에게도 그들 나름의 독법으로 충분히 읽힐 수 있다.
날아오르려니
너무 무겁군요
내 목숨의 중량
몸을 떠나는 숨결
붙잡아 보았더니
21g었다는데
볶아낸 커피콩
135알 무게
실없는 짓을 한 정신과 의사는 그날부터
아구벌린 호주머니 따내고
주저앉아 있는 책들 내다 버리고
소금물로 가슴 속에 눌어붙은
욕망의 찌꺼기를 토설했다네요
가을 잡목숲은 야위어 가는데
다시, 가난해질 수 있을까요
-이창희 「목숨의 중량」 전문
이창희 시인의 「목숨의 중량」은 크리스천 시인은 ‘궁극적 관심’을 시적 주제로 해야 된다는 것에 합당한 작품이다. 시 밖에 존재하는 시적화자가 이 세상에서 삶을 다하고 ‘날아오르기’를 소망하는 자로 설정되어 있다는 것 , 즉 즉음 이후의 세계를 시적 공간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궁극적 관심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첫째 연과 둘째 연을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날아오른다’는 시어를 기독교적으로 해석하면 천국으로 올라가고 싶은 소망인데 그 소망의 걸림돌이 되는 것이 비록 21g 으로 커피알 135알의 무게에 지나지 않지만 목숨의 중량이다. 그런데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서의 욕망의 찌꺼기이기 때문에 버려할 대상인 것이다.
셋째 연에서 지금까지 시 밖에 있는 시적화자가 정신과 의사로 등장한다. 그래서 그는 욕망의 찌꺼기 버리는 행위를 하게 된다. 말하자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부와 명예나 지식 등을 모두 버려야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 넷째 연에서 가을 잡목숲을 등장시켜 나이가 들수록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로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잡목처럼 여름의 풍성함을 즉 부와 명예 권력 등을 버리고 가난해져야 된다는 것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이 시인의 시는 앞의 세 편과는 다른 방법으로 읽어야 궁극 적관심의 실체가 드러날 것이다.
앞으로 다음 호에는 더욱 더 많은 궁극적관심이 시적으로 형상화 된 작품을 만나기를 기대한다. 이 시평이 크리스천 시인들은 크리스천이 아닌 시인들과는 어떻게 다르게 시를 써야 하는가 하는 점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는 계기가 된다면 하는 작은 소망을 가져본다.
<양왕용/ 시인/ 부산대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