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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남정맥의 의병
작성일 : 2025.04.23 09:41 작성자 : 김하기
백두대간 인문기행
낙남정맥의 의병
필마로 옛 싸움터 지나노라니 / 匹馬經過舊戰場
강물은 한을 품고 유유히 흐르네 / 江流遺恨與俱長
지금 그 누가 왜적과 주화하려 하는가 / 於今誰唱和戎說
장군과 사병은 이미 원통하게 죽었는데 / 將士當年枉死亡 - 정인홍 -
단재 신채호는 한반도 백두대간의 삼걸로 을지문덕, 이순신, 정인홍을 꼽았다.
다 아시다시피 을지문덕과 이순신은 언급할 필요도 없지만, 그럼 정인홍은 누구인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선의 의병장으로 처음 궐기한 영웅이다.
한반도 의병은 환웅이 이 땅에 나라를 세운 후, 나라가 위급하면 백성 스스로 궐기하여 일어나는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우리나라와 민족을 상징하는 국민성으로 나라를 지킨 위대한 정신이 면면히 일만 년을 이어왔고 이어갈 것이다.
백두대간 지리산 영신봉에서 낙남정맥을 타고 벋은 가야의 산 합천 가야산, 의령 한우산은 여름에도 찬비가 내리고 백두대간의 호랑이가 자주 출몰한다는 산세가 깊은 곳이다. 옛날부터 일찍이 대가야와 아라가야가 터를 잡은 곳으로 봄이면 백두대간의 진달래가 만발하고 가을이면 억새가 휘날려 아주 한국적 정서가 깊은 곳이다.
못난 임금 선조의 정책을 비판하는 글을 올려 등용되지 못하자, 불혹의 나이 의령의 곽재우는 평생 고향에서 시골 서생으로 고기잡이 낚시하면서 은거 생활을 하고 있었다.
1592년 선조 25년 음)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18,700 왜군에게 동래성이 단번에 함락되자, 조선 각도의 지방 수령들은 모두 제 한 몸 먼저 사리며 무기를 버리고 산으로 도망가기에 바빴다.
왜군은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하여 아무 저항 없이 진군해 들어갔고, 못난 임금 선조는 평양에 이어 의주로 몽진을 계획한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소식이 한반도를 뒤흔들었다.
한낱 시골 합천 서생 정인홍은 분통을 터트리며 붓을 들었다. 남명 조식학파의 선임으로 동문수학하며 벼슬도 버리고 낙향하여 주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후배 곽재우 · 성천희 · 김면 · 변연수에게 글을 보냈다.
“오호통재라!
조선이 이렇게 무너질 수 없는 것 아닌가!
벗님들이여 의병으로 봉기하라!
조선의 의병은 환웅천왕이 이 땅에 나라를 세운 후, 나라가 위급하면 백성 스스로 궐기하여 일어나는 우리의 위대한 정신이었다.
신라의 3만이 당나라의 20만을 이 땅에서 쫓아냈고, 몽골의 침략을 의병 승병의 저항으로 지켜냈다.”
정인홍의 글을 받은 곽재우는 단번에 곡간을 열어 군자금을 풀자, 의병 2천 명이 따랐고, 창녕의 성천희도 일천 명의 의병을 모았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고 했던가? 육지에서 왜군에게 연패를 거듭했지만, 조선 수군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1592년 음)5월 7일 옥포해전에서 아군의 피해 없이 완승했다는 소식에 정인홍과 곽재우 조선 의병는 환호를 지르며 용기백배했다. 이제 조선 땅에 의병이란 한낱 희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곽재우는 붉은색으로 철릭을 해 입고,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적은 깃발을 높이 매달았다. 붉은 옷을 입고 앞장서면 사람들 눈에 금방 띄고 자신이 앞장서야 의병이 따른다는 생각이었다. 또 왜군에게 혼란을 준다는 뜻도 있었다.
곽재우는 2천 명에 이르는 의병을 이끌고 지형을 이용한 치고빠지는 전략으로 의령·창녕 등지의 산악에 매복해 신출귀몰하게 왜군을 혼란에 빠뜨리는 작전으로 병사와 무기의 열세를 극복했다.
정인홍은 곽재우에게 전령을 보냈다.
“곽 공, 호남지방으로 진출하는 왜군을 막아야하오. 왜군은 7월 의령 남강 정암진에서 뱃길을 이용한다는 정보를 입수했소!”
15만 8,800명의 왜군은 9군으로 나누어, 고니시 유키나와小西行長를 선봉으로 1군 1만 8,700명,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 가 2군 2만 800명,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3군 1만 1000명은 돌격부대로 한양을 점령하여 선조를 사로잡고, 나머지 군은 각 도를 점령한다는 전략을 세워 조선으로 쳐들어왔다.
그중 6군 1만 5,700명은 호남을 점령하여 식량을 확보한다는 전략과, 7군 3만명은 경상도를 점령하여 인력을 납치한다는 계획이었다.
왜 제6군 1만 5700명은 부산 동래에서 함안을 거쳐 호남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임진년 7월 정암진 나루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의병장 정인홍은 입수했다.
정인홍의 전령을 받은 곽재우는 의령 남강 정암진 부근의 지형지물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바른말을 한 곽재우가 과거 합격에 취소된 후 벼슬을 버리고, 낚시하며 세월을 보내던 바로 그 남강 지역이다.
왜군 제6군 선발 정찰대는 정암진 일대가 늪지이기 때문에 안전한 곳을 찾아 미리 표시기를 세우는 작업을 엄밀히 하고 있었다.
곽재우는 왜군 정찰대의 행동을 숨어서 지켜보다, 밤에 다시 몰래 왜군 표시기를 뽑아 왜군이 늪지대로 들어가게 바꾸어 놓았다.
곽재우는 정암진 언덕에 활을 잘 쏘는 50여 명의 의병을 매복시킨 뒤 말했다.
“우리의 화살이 왜놈의 조총보다 발사 속도도 빠르고 정확도도 높다. 왜놈들은 늪지대에 빠져 분명 허둥대며 조총 조준도 못할 것이다.
나의 명령에 따라 일제히 화살을 퍼부어라!”
“예, 장군.”
다음날 2,000명의 왜군이 잘못된 표시기를 따라가다 늪지대에 빠지자,
곽재우는 언덕에 숨어있던 의병 50여 명에게 일제히 화살 공격령을 내렸다.
“사거리에 들어왔다. 쏘아라!”
의병의 활 기습 공격을 받은 왜군 2,000명을 늪지대에서 총 한번 못 쏘고 몰살당했다.
곽재우의 정암진 전투에서 왜군이 전멸했다는 소문은 일파만파로 퍼져나갔고, 너도나도 앞다투어 곽재우 휘하에 의병이 되기를 지원하여 순식간에 3천여 명으로 불어났다.
연일 후퇴만 하던 조선 관군에게 임진왜란 초기 정암진 대첩으로 왜군 6군의 전라도 진격을 막아 호남의 곡창을 지킨 것은 임진왜란 승리의 작은 실마리가 되었고, 이순신 장군의 전라 좌수영이 육지로부터의 왜군의 공격 없이 싸울 수 있었다.
정암진 전투의 승리는 아무 저항 없이 북상만 하던 왜군들의 기세가 약해지고, 재정비된 조선 관군과 명군의 공격을 못 견디고 후퇴하는 계기가 된다.
곽재우는 10여 명의 부하에게 같은 홍의를 입히고 치고빠지는 신출귀몰 작전으로 왜군을 혼란하게 만들었다. 비가 오면 약점을 보이는 조총의 단점을 이용, 비 오는 날 기습 공격, 왜군의 식량 탈취, 횟불 · 징 소리 · 심지어 말벌을 이용하는 등 소란작전으로 왜군의 후방 교란으로 천강홍의장군이란 소리를 들었다.
정인홍은 1592년 5월 합천에서 승병장 휴정(서산대사)과 의병장 김면과 함께 승병 의병을 이끌고 가야산 합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지켜냈다. 왜는 고려 때부터 고려대장경판을 무척 탐냈다. 왜는 몇 번 팔만대장경판 판각 작업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조선이 억불숭유정책을 쓴다는 것을 알고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팔만대장경판을 요구했지만 조선 조정에서는 응하지 않았다. 결국 임진왜란때 무력으로 팔만대장경판을 빼앗으려고 했지만, 승병장 서산대사 · 사명당에게 막혀 실패한다.
정유재란 왜는 임진년 패인을 전라도 함락 실패로 보고, 초전부터 전라도를 통해 북상하는데 총공세를 펼친다. 바다로는 이순신 때문에 갈 수 없고, 경상도 육지를 거쳐 12만 공격계획을 세웠다.
승병장 휴정(서산대사) 휘하에 사명당과 1천의 승병과 의병장 곽재우 휘하의 지방 수령 성안의 · 이영 · 장웅기 · 전제 · 신초 · 이숙 · 성정국 · 신방로 · 김충민과 의병 990명, 총 2천 여명의 의승병이 창녕 화왕산성에서 가등청정의 왜 우군 6만 의 길목을 막아섰다. 30:1의 싸움이었다. 하지만 왜 가등청정은 몇 번이나 화왕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자,
“누가 화왕산성을 막고 있나?”
“장군, 조선의 곽재우와 서산대사가 막고 있다고 합니다.”
곽재우가 화왕산성을 막고 있다는 소리에 물러섰다고 한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의병 승병은 한반도 백두대간 낙남정맥을 지켜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