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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야의 월광태자
작성일 : 2025.04.23 09:36
51, 백두대간 인문기행
대가야의 월광태자
가야천 지역의 논은 비옥하여 씨 한 말을 뿌리면 백이삼십 말이 산출된다.
땅이 기름져서 타지로 돌아다니는 사람이 없다. - 이중환의 택리지-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는, 삼한의 진한 마한 변한의 12작은 나라에서, 서기 42년 3월 수로왕이 철의 바다 김해 평야에 금관가야를 세우자, 나머지 다섯(간) 족장은 각각 자기 마을로 돌아가 나라를 세우니, 6가야로 김해의 금관가야, 고령의 대가야, 고성의 소가야, 성주의 성산가야 함안의 아라가야, 함창의 고령가야로 서로 연맹을 맺고 한반도 고유의 농사와 잠업으로 누에를 키우며, 북방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농기구와 우수한 무기를 생산하며 북방 낙랑과 바다 건너 왜에까지 교역하며 주변 국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했다.
가락국 초기 4세기까지는 한반도 들머리에 위치한 금관가야가 발 빠르게 남방문화와 파사석탑 불교를 받아들여 선진화된 문화를 바탕으로 낙남정맥을 타고 내려온 북방문화와 접화군생 했다.
신라 최치원의 석이정전釋利貞傳의 기록에는, "가야산伽倻山의 산신인 정견모주가 하늘의 신 이비가지에 감응하여, 대가야의 왕 뇌질주일惱窒朱日과 금관국의 왕 뇌질청예惱窒靑裔 두 사람을 낳았다. 뇌질주일은 대가야국 이진아시왕이고, 뇌질청예는 금관가야 수로왕이다." 라고 했다. "대가야국의 월광태자月光太子는 정견모주의 10대 손이며 그의 아버지 이뇌왕異腦王은 신라의 이찬 비지배의 딸을 맞아 청혼하여 태자를 낳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령에 대가야를 세운 이진아시왕의 경제적 힘은 가야산 들머리 합천 야로 지역의 풍성한 농사와 철광석의 생산이었다. 가야는 한반도에 남방문화가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풍부한 철 생산력과 벼농사· 토기 제작· 누에 등 잠업이 발달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중 가야를 대표했던 세력은 김해의 금관가야, 고령의 대가야, 함안의 아라가야였다.
한반도 들머리 황산강(낙동강) 하구 김해와 부산에 위치한 금관가야는 철의 나라, 철의 바다라고 불린 김해란 지명에서 볼 수 있듯이, 가야의 문화재 중 철기 유물이 유독 많다. 가야에는 타고 다니는 말에게도 철로 만든 갑옷을 입힐 정도로 철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났다. 질 좋은 철광석이 많이 생산돼 재련 기술이 발전했고, 무기로 활 환두대도 등이 발전했으며 괭이 낫 등 농기구의 발전은 백성에게 안정된 생활을 했다는 뜻이다.
철의 왕국 가야의 덩이쇠, 철제 갑옷 투구. 김해 우계리 제철 유적에서 볼 있듯이, 가야의 판갑옷 말갑옷은 최고의 선진화된 기술이였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 발견된 가야토기(식생활 토기)는 높은 온도에서 만들어져 옹기보다 단단하다. 가야 토기는 1200도 이상 고온 가마에서 구웠다. 가야 장인들은 불과 토기의 온도와 조화인 투각기법(구멍)을 이용. 토기를 아름다운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함안의 아라가야는 토기의 나라고 불릴 만했다, 다양한 토기로 발전했고 굽다리토기 불꽃 문양 토기, 상형토기(인물 기물 토우 )를 들 수 있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하는 도기 기마형 인문 뿔잔 국보 275호는 신라의 도기 기마 인물형 명기와 함께 고대 한반도의 기마 인물을 묘사한 대표적인 걸작 토기입니다.
특히 바다 건너 왜 각지에서 발견되는 가야의 토기와 철갑 금동장식품은 가야의 문화를 엿 볼 수 있는 기록이며 가야의 참모습이다.
일본 곳곳에서 발견되는 대가야의 대표적 유물 장경호(목이긴 항아리) 철제 제품 대가야 금동관 등은 고령 지산동에서 발견된 금동장식품과 매우 유사하다. 일본과 교역의 증거가 아닐 수 없다. 또 일본 오키나와에서만 나는 야광조개국자는 지산동 고분군에서 발견됐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김해의 금관가야는 마지막 왕의 후손들이 신라 왕실에 협조해 많은 공을 세운다. 김유신 등 후손들이 신라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대가야는 왕의 후손들이 신라에 귀속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신라 김알지의 후손 신라의 30대 문무대왕릉비에는 '秺侯투후 祭天之胤제천지윤이라는 문구가 있다. 투후는 오르도스 지역의 제후 즉 김일제로 제천지윤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흉노 왕족(김일제)의 후손, “신라 김씨의 조상은 북방 유목민 흉노의 왕손” 이라는 내용이다.
흉노 휴도왕의 태자 김일제金日磾의 5대손이 경주 김씨 시조 김알지金閼智이고, 김일제의 동생 김윤의 5대손이 김해 김씨 시조 김수로라고 주장한다.
뒤를 이어 발전한 대가야는 소국에서 벗어나 국가로서 꾸준히 성장해 나갔다. 고령, 합천을 중심으로 서쪽으로 뻗어나가 낙남정맥과 백두대간 지리산을 넘어 전라도로 장수, 남원, 순천, 여수로 세력을 확장했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의 사이에서 끊임없는 영토 전쟁을 하였다. 대가야는 서기 400년쯤 왜와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 내물 마립간은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고구려 5만의 정예군이 남하하자 대가야는 서서히 사분오열되고, 서기 562년에는 신라에 의해 정복되며 아침이슬처럼 사라져 버렸다.
고령군에는 낫고개의 유래에 대한 이야기가 내려온다. 대가야 마지막 왕인 도설지왕이 모듬내(합천에서 내려오는 내)에서 신라 이사부장군 화랑 사다함과 격전을 벌였다. 치열한 전투 끝에 도설지왕이 전사하고 가야는 전쟁에서 패하게 된다. 모듬내에서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도설지왕의 아들인 월광태자와 아내인 무후왕후는 피난을 가게 되었다. 이들이 도성을 떠나면서 피난 갔던 길을 ‘낫질’이라 한다. ‘낫질’은 비단의 한자음인 ‘나(羅)[비단]’와 ‘길’의 방언형인 ‘질’에 ‘ㅅ’이 들어간 합성어이다. 월광태자가 비단 용포를 입고 이 길을 걸었다는 말이다. 피난길에 넘었다는 고개가 바로 ‘낫고개’이다.
월광태자와 무후왕후가 피난길을 떠나던 도중 도설지왕이 전사 소식을 듣게 되고, 눈물을 흘리며, 그 자리에서 용포의 허리띠를 풀어 비단옷을 벗어 버렸다고 한다. 허리띠를 풀어 옷을 벗어버린 곳이라는 의미로 이곳을 ‘나대리羅帶離’라고 한다.
가야의 멸망으로 월광태자는 결국 가야산 입산 수도하고 만다. 낫질에서 나대리를 거쳐 500~600m를 가면 해인사의 입구가 나오는 월광사가 있는데, 이곳에는 아직도 월광사 터와 탑이 남아 있다.
가야산 주변에 많은 설화를 남긴 월광태자, 해인사 창건 신화의 가야산 산신 정견모주.
한반도 법보 사찰 해인사를 창건한 신라 순응順應의 가계는 정견모주에서 이어진 대가야의 마지막 태자인 월광태자의 후손이었다. 순응이 신라 왕실의 후원으로 해인사를 창건할 수 있었던 까닭은 선조인 월광태자가 대가야와 신라의 결혼 동맹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월광태자는 법흥왕 때 대가야의 이뇌왕과 신라의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딸 사이에서 출생하였기 때문에, 그의 후손인 순응은 신라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가야는 신라에 합병 통합되어 버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