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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석탑과 허황옥
작성일 : 2025.04.14 12:20 작성자 : 김하기
48, 백두대간 인문기행
파사석탑과 허황옥
탑을 실은 붉은 배의 가벼운 깃발
덕분에 바다 물결 헤쳐왔구나
어찌 언덕에 이르러 황옥만을 도왔으랴
천년 동안 왜국의 침략을 막아왔구나 -삼국유사-
금관金官 호계사虎溪寺의 파사석탑婆娑石塔은 옛날 이 고을이 금관국일 때, 시조 수로왕의 황후 허황옥許黃玉이 후한 건무建武 24년 무신(48년 7월 27일)에 서역 아유타국阿踰陁國에서 싣고 온 것이다.
처음 아유타 공주가 부왕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해 뜨는 동으로 향해 나아가는데, 바다신의 노여움을 사서 가지 못하고, 돌아가 부왕에게 아뢰니 아버지는 파사석탑을 싣고 가라 했다. 그제야 순조롭게 바다를 건너 금관국의 남쪽 해안에 와서 정박했다. 라는 삼국유사의 기록이다.
필자가 백두대간 인문기행을 들어가면서부터 한반도 북방문화와 남방문화의 접화군생을 주장하면서, 북방문화의 근거는 환웅의 삼위태백 신단수 천부인(기원전 2457년(上元 甲子) 4482년 전, 10월3일)이고, 보다 확실한 남방문화는 허황옥의 파사석탑(초전불교, 48년 7월 27일)을 근거로 삼았다.
물론 이전 수천 년 전 남방문화의 들머리 부산 절영도 패총과 가덕도 장항 유적을 분석하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떡일 수 있는 일이며 낙동정맥 고현산 반구대 암각화까지 연관이 된다.
낙남정맥 가락국의 쌍어와 신어
앞에서 설명했다시피, 가락국 수로왕 납릉納陵에는 남방문화 흔적이 뚜렷한 모양의 문양이 있다. 문양 위쪽은 인도의 상징 코끼리가 그려져 있고 아래쪽에는 물고기 두 마리가 중간에 돌로 쌓은 파사석탑을 향하고 있는 모습인데, 우리는 쌍어문雙魚紋이라고 한다.
인도 드라비다 고어로 물고기를 ‘가락’이라 하고 드라비다 현대어로는 ‘가야’라한다. 두 단어 모두 남방 물고기와 관련 있다.
쌍어문은 김해 은하사 대웅전 신중 불단에도 있는데, 가야불교 또는 가야와 인도 아요디아국과 교류의 증거가 확실하다.
허왕후의 고향인 인도 아요디아에서는 지금도 지역을 대표하는 상징이 쌍어문이며 관공서나 행정 서류 또는 오래된 건물 등 시내 곳곳에서 쌍어문을 볼 수 있다.
수로왕의 후손인 김해 김씨 종친들은 납릉 정문의 쌍어를 신어神魚라고도 부르며 태초부터 전해 내려오는 한반도 들머리 낙남정맥 가야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다.
한반도 종교와 문화도 백두대간 13 정맥을 따라 매우 순리대로 자연스럽게 전해졌다고 앞에서 필자가 누차 강조했고, 백두대간 인문기행을 연재하는 목적이기도 하다.
역사는 한반도 불교의 전래를 공전에 두고 국가가 불교를 공인한 해를 기준으로 삼는다. 그러나 나라에서 종교를 공인하게 되는 것은 이미 민간에 널리 전파되어 국가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뜻이 아닌가. 뜻있는 학자들은, 한반도 불교 전래는 초전初傳과 공전公傳으로 나누어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이 보다 설득력을 얻고 있다.
특히 홍익인간 재세이화의 대혁명으로 선진화된 한반도의 종교 전파는 처음 전달 과정인 초전과 문화적인 변용(metamorphosis,)을 수반하는 공전의 두 단계를 거쳐 점진적으로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초전은 주로 민간에서 토속 신앙과 서서히 접화接和하여 이루어지는 전파이며, 공전은 일정한 초전 과정을 거친 후 국가나 권력의 공식적인 허용으로 광범위하게 퍼지는 전파다.
일연의 삼국유사에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년)에, 백제는 그로부터 8년 뒤인 침류왕 1년(384년)에 불교를 공인했다. 이처럼 고구려와 백제의 공전이 4세기에 이루어진 반면, 신라는 한참 늦어 6세기인 법흥왕 14년(527년)에 가서야 이차돈 異次頓의 순교를 기화로 불교를 공인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필자는 한반도 불교의 초전은 공전보다 훨씬 이전에 이루어졌다고 본다.
가야의 경우, 삼국유사 기이편 ‘가락국기’, 탑상편 ‘금관성과 파사석탑’ ‘어산의 부처 영상’ 기록을 보면 앞에서 여러번 설명한 김수로왕이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을 맞이할 때(무신년 48년), 이때 공주가 배에 싣고 온 보물 중 파사석탑과 일행 중 허황옥의 오빠인 장유화상이있다.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이 파사석탑과 장유화상은 한반도에 처음으로 초전불교를 전한 명확한 인물이며 증거다.
파사석은 우리나라에는 거의 나지 않으나 인도 남부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질의 돌이며, 허황옥이 배에 싣고 왔다는 파사석탑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27호로 현재 김해시 구산동에 세워져 있다.
신라의 전불시대 이야기도 일맥상통하지만 뒤늦은 감이 있는 것을 보상하기 위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 삼국유사 흥법 興法 제3 아도기라조阿道基羅條 에 의하면, 신라에 불교를 전래한 아도我道는 고구려인인 그 어머니로부터 신라의 서라벌에는 전불시대의 일곱 개의 가람터가 있으며, 앞으로 3,000개월이 지나면 성왕이 나와 크게 불교를 일으키게 될 것이니 그곳에 가서 불교를 전파하라는 당부를 받는다.
허황옥의 사찰 ‘왕후사王后寺’
삼국유사 ‘가락국기’ 중 김질왕(金王)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시조 수로왕의 8대손 질지왕은 시조모 허황후를 위해 명복을 빌고자 원가 29년 임진(452년)에 수로왕과 허황후가 혼인한 곳에 절을 세우고 ‘왕후사王后寺’라 했다.
김수로왕이 당시 불교를 봉행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기사가 삼국유사 탑상편에 실려있다.
앞 46화에서 언급했다시피, 못된 독룡과 나찰녀를 주술로 다스릴 수 없어, 부처님의 오계로 다스렸다는 이야기다. 이 기록에 보이는 ‘왕이 부처를 청하여 설법을 했다’는 것은, 가락국 초창기에 이미 김수로왕은 불교를 신봉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한반도의 불교 문화 전래는 대체로 북방(고구려 소수림왕 375년)에서 왔다는 것이 학계의 주장이다. 하지만 필자는 꾸준히 남방(파사석탑 48년 7월 27일)해양 문화와 북방 문화의 백두대간 접화군생을 다시 한번 주장한다.
그 옛날 가야의 영역이었던 지리산 화계골에 있는 칠불암도 허황옥과 얽힌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절은 허황옥이 일곱 아들을 성불시킨 원찰이다. 김해의 은하사, 녹산의 명월사, 장유의 장유암, 삼랑진의 부은암, 밀양의 만어사, 금정산의 범어사 등도 남방불교의 특성을 잘 보이고 있다.
특히 김해 신어산에 있는 은하사銀河寺는 김수로왕 때 인도에서 온 승려 장유長遊가 창건했다. 장유화상은 허황옥의 오라버니로 인도불교가 들어온 것을 기념하여 은하사를 창건했으며, 신어산 동쪽에는 동림사東林寺를 지어 가야국의 번영을 기원했다고 한다.
‘元祖 페미니스트’ 허황후
허황옥은 김수로왕과의 사이에서 10명의 아들을 낳았다. 맏아들 거등居登은 김씨로 왕통을 이었으며, 둘째와 셋째 아들은 허황옥의 요구대로 허씨許氏를 물려받았다. 그리고 나머지 일곱 아들은 지리산 칠불암 전설에 나오는 것처럼 불가에 귀의하여 성불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김해 허씨의 시조인 허황옥은 한반도 북방 마고할미와 접화군생하여 백두대간에 자주적인 여성관을 지켜나갔다.
근래 들어 페미니즘이 일반화되면서 남녀가 결혼하면 남편과 아내의 성을 함께 쓰는 사례가 늘고 있는 것처럼, 이미 허황옥은 약 2000년 전부터 아들에게 자기 성씨를 남겨 줌으로 세계적 성평등의 원조 페미니스트로 한류가 다시 한번 각광받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