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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 등대이야기 연재 > 7. 팔미도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가 있는 섬

작성일 : 2025.04.13 12:47 수정일 : 2025.04.13 12:52

 

1)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등대가 있는 섬 팔미도

/조경호

 

팔미도의 산벚나무와 벚꽃은 육지의 다른 지방보다 늦게 핀다. 그리고 벚나무의 종류도 다양했다. 왕벚나무, 겹벚나무, 흰꽃, 연분홍꽃, 홍분홍꽃 등 다양 했다. 5월 초에 배를 타고 바다 위에서 팔미도를 보면 섬 전체가 하얗다. 연흥빛이 감도는 눈이 덮인것과 같다.

 

팔미도 동쪽 비탈 아래 진달래, 관사 울타리의 개나리, 긍탑 서쪽 해안에서부터 버티고 서서 등탑 아래까지 달려온 아름드리 붉은 해송, 섬 아래 모래사장에서 올라오는 아랫길과 윗길 사이의 밤나무 숲과 섬 중턱에 있는 관사의 남쪽 아래 아카시아가 군락을 이루고 텃밭, 관사 주변의 산벚나무, 숲속 사이사이에 끼어 있는 개옷나무, 서쪽 해면 끝 우물 터 위에 있는 머루 넝쿨 터널과 대나무 군락, 섬 아래 모래사장 윗길에서 올라오는 길의 마사 모래 등성이와 인천 쪽 딴섬 부리의 마사 모래 등성이 자리 잡은 소사나무 군락, 억새 등성이의 하늬바람, 이런 아름다운 모습은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세월과 현대식 건축물로 바꾸어 놓았다.

 

팔미도는 섬이지만 갑종지로 분류되어있다.

갑종지 섬이라는 것은 사람이 살기에 알맞는 환경의 섬이라는 것이다. 즉 식수로 사용할 수 있는 물이 나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과 환경이 되어야 한다. 팔미도는 유적 탐사에 대한 기록물은 없으나 내가 발견한 것은 조개 폐총이 있다는 것이다.

조개 폐총이 있다는 것은 이 섬에 사람이 들어와 산 것은 적어도 선사시대까지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대한제국(조선의 국호를 고종이 선포 18971012191089) 초에는 무인도라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첫 부임 하였을 때 당시에 섬 전체에 7기의 무덤이 있었다. 아마도 내 생각에는 1902년도 일본인이 등대를 건설하기 위해 살던 주민을 철수시키지 않았나 생각할 따름이다. 그러한 이유로 섬 동쪽에 있는 선착장 백사장에서 아랫길(해군 부대 정면에 있는 등대 오르는 길) 중간 지점에 아주 엄폐가 잘 된 큰 화약고가 있었다. 밤나무 숲 아래를 깊게 파고 아주 큰 화약 창고를 지워 놓았으며, 일제 강점기에 만든 것으로 생각한다.

 

지금은 등대 직원 관사가 현대식 건물로 건축된 자리이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 등대원(12) 외에 민간인 일본인도 들어와 살았던 것 같다. 지금의 현대식 등탑이 건축(2003)된 자리 밑에 절터가 있었다는 이야기만 전해져 올뿐 그 절을 우리가 지은 절 인지 일본인들이 지은 절 인지는 확인하지 못하였으며, 다만 대동여지도나 택리지에 팔미도에 절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내가 부임했던 1957년 등대 동력실 옆에 원형의 공터가 있었는데 이곳이 절터라고 했다. 그 절은 폭격으로 다 부서지고 잔해들은 다 치워 없어진 상태였다. 그래서 팔미도에 있었다는 절(신사로 추정)은 일본인이 지은 절이 아닌가 싶다. 다만 1970년대 초 물치소(창고 겸 소사 숙소 1908년 건축) 우측 아카시아 숲을 밭으로 개간하니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의 유물이 많이 나왔는데 이것을 보아 팔미도에 절이 있었다고 생각하며, 선임 등대원들이 하는 말이 사실인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내 추측일 뿐이다.

 

팔미도등대에는 흰 돌담으로 울타리를 친 창고가 따란 물치소 뒤쪽 남쪽에는 해안으로 내려가는 소로가 있으며, 두 아람 이상 되는 여섯 그루의 산벚꽃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놓았는데 아마 그곳은 평상을 두고 휴식과 유흥을 즐겼던 장소였던 것 같다. 물치소 뒤편 옆으로 아카시아 군락에 밭이 있었는데 이 밭은 일본인들이 쓰레기를 버린 곳인 것 같다.

 

1970년에 그곳에서 일본인들이 쓰던 자기류가 많이 나왔다. 그리고 일본인들이 시신을 화장하고 뼈가루 담는 토기가 많이 나온 것을 보면 팔미도에 있었다던 절은 일본인들이 지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나라의 처음 등대 운영은 일본인 기술자에 의해서 운영되었다. 그리고 팔미도 등대 건축은(대한제국 탁지부 총해관 인천해관 등대국에서 사업)일본인 회사에서 하였으며, 등명기는 프랑스 제품, 등롱과 등타 내 주물 사다리는 영국 제품이다. 19025월부터 공사에 착수하여 1903526일 준공하고 시험을 거쳐 190361일 점등하였으며, 일본인 간수 2명이 배치되어 운영하고 관사는 일본식 가옥 2동이 있었다.

 

팔미도의 면적은 0.076이며, 인천항에서 남서쪽 해상 13.5km에 있는 섬으로 유인 등대가 있다. 긴 자루가 달린 듯한 사가 주머니형의 섬 형태는 인천항 쪽(자루에 해당하는 작은 섬)과 덕적도 쪽으로 향한 본섬과는 모래 등성이로 이루어져 있다. 이 두섬을 잇는 모래 등성이는 사리때가 되면 바닷물로 덮인다. 15일마다 23일은 바닷물로 인해 두 섬이 떨어져 분리된다.

 

팔미도의 등탑이 있는 정상은 해발 고도 73m이다. 팔미도(八尾島)의 유래를 보면, 청구도에는 八米, 대동여지도에는 八山이라는 기록이 보이고 ‘1872년 지방지도에는 八味島라 되어 있으나 대부도 지도에는 八米島라 되어 있다. 무의도와 팔미도가 어우러진 모습이 마치 모양 이어서 지명이 유래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지 자는 변치 않고 지금의 이름으로 정착된 것은 8개의 꼬리를 가진 섬인 八尾島이다.

 

팔미도의 등탑 높이는 7.9m, 직경 2m, 광원의 밝기는 90촉광이며, 처음에는 석유등으로 등대불을 밝혔다.

 

 

2) 나의 사랑, 팔미도등대

 

(1) 미스터리

 

내가 19575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등대, 팔미도등대에 부임하였을 때 일이다. 등대장 곽춘만( 1917년 출생, 1940, 510일 체신국 표지과 인천 감시소 격렬비도 등대 용원 입사1977630일 인천지방해운국 표지과 부도 등대장 퇴임) 등대수 정인근, 윤중길과 같이 근무하게 되었다.

 

등대장 곽춘만은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과 함께 등대에 근무하였으며, 광복 후 일본인 등대원으로부터 등대 업무를 인수 받았다. 나에게 일제 강점기 등대원의 생활 등 등대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1958년 봄쯤이었을 것이다.

 

팔미도등대에 난처한 일이 발생했었다. 아내가 허겁지겁 등대 남쪽 뾰족 바위에서 가파른 오솔길을 타고 창고 관사 아래로 올라왔다. “여보- 여보 뾰족 바위 뒤편 서쪽에 송장이 떠밀렸어요. 아내는 정씨 부인과 함께 남쪽 길로 내려가 남쪽 암초 바위에서 굴을 땄던 것이었다. 아내가 허리를 펴고 자리를 이동하려고 발걸음을 옮겼는데, 송장이 바위에 엎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아내의 말을 듣고 곽대장을 찾아서 아내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했다.

 

그래요, 송장이 바다에 떠다니다 섬으로 밀려드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닌데 ···· 그런데 송장의 머리가 어느 쪽으로 향해 있다고 하던가요?

아내가 너무 놀란 것 같아 그건 물어보지 못했는데요. “

그래요, 그럼 윤씨와 정씨도 불러서 함께 가봅시다

송장이 엎어져 있으면 남자이고, 젖혀져 있으면 여자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송장의 머리의 방향을 물은 것은 바다에 떠 있는 송장은 머리 쪽으로 향해 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머리가 등대 쪽으로 향해 있으면 우리가 있는 팔미도로 들어오게 된다고 했다. 섬사람들과 바다 사람들의 모두가 다 같은 이야기를 한 것을 나도 들어서 알고는 있었다. 섬으로 떠밀린 송장은 그 섬에다 묻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섬사람들의 불문율이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사람도 몇 안 되는 작은 섬에서 그런 일을 할 수가 없다. 그리고 송장의 머리가 우리 등대섬을 향해 있다면, 틀림없이 팔미도를 택한 것이기 때문에 매장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척 난처한 상황이 전개될 것 같아 걱정되었다. 곽대장의 말은 뱃사람들과 섬사람들에 의해서 예로부터 구전되어 오는 이야기라는 것이었다.

 

나는 정인근씨와 윤중길씨를 찾아서 곽대장하고 남쪽 길로 내려가 송장이 떠밀렸다는 곳을 찾았다. 엎어져 있는 송장은 바다물에서 불어 엄청 크게 보였으며, 검은색 계통의 옷을 입었으나 머리는 등대섬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 큰일인데

 

곽대장은 머리가 등대 쪽으로 향해 있기 때문에 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틀림없이 우리 섬으로 들어올 것이라는 것이다.

 

그럴리 가요 ?”

이런 일은 옛사람들의 경험으로 내려오는 말이니 틀림없을 것이네

등대장님 밀물이 되어 송장이 물에 뜨면 장대로 밀어서 먼바다로 띄워 보내지요

저 송장이 이곳을 택했으면, 그렇게 해도 어려울 것 같은데 ····”

 

윤씨는 곽대장의 말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곽대장은 이러한 경험이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도 우리가 송장을 묻어줄 수 있는 형편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송장을 들어 옮길 수도 없고 매장할 수 있는 상황은 더욱 아니었다. 다만 화장시켜야 하는데 물에 불은 송장을 어떻게 태울 것인가?

 

그리고 표지과에 보고하여 절차를 받고 상부의 지시를 받는다는 것은 무전기도 없는 당시로서는 송장을 섬에 방치하고 얼마를 기다려야 하는가 하는 것 때문이다.

 

논의 끝에 일단은 윤씨 말대로 긴 장대를 준비하고 우리는 송장이 걸쳐 있는 암초보다 더 높은 바위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밀물이 되어 송장이 물에 뜨기를 기다렸다.

 

밀물이 되기를 한참 기다렸더니 드디어 송장이 물에 떴다. 우리는 번갈아 가면서 장대로 송장을 밀어 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송장과 밀물에 밀려 자꾸 뒤로 후퇴해야 했다.

 

내가 머리를 돌려서 섬 바깥쪽을 향하게 놓아보았다. 그러나 묘하게도 송장은 머리를 다시 우리에게 돌려 자꾸 섬 안쪽으로 들어왔다. “아 곽 대장님 말이 맞구나

 

우리는 밀물에 밀려 해변의 바위에서 섬의 절벽 바위 위로 올라왔다. 송장은 우리가 올라가는 해안으로 머리를 쳐박고 따라 들어 왔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섬의 절벽 오솔길로 접어드는 오르막길 중간쯤에 올라가 송장의 방향을 살폈다. 송장의 머리가 묘한 방향으로 틀어져 있었다.

 

그곳은 제주도의 외돌기 같은 바위가 있는 곳이다. 그 바위 정상에는 아름드리 소나무 한그루가 있었는데 물이 들어오면 그 바위는 아주 작은 섬이 된다. 그래서 긴 골짜기 절벽 아래 바닷물 위에 오뚝 솟은 바위섬이 된다. 그리고 석양을 맞으면 아름다운 절경을 이루는 곳이다. 송장도 자기가 묻힐 곳을 고르고 들어오는 모양 같았다.

 

그리고 물길이 들어오는 긴 암벽의 골짜기는 폭이 좁아 무엇이든지 한번 밀려 들어오면 빠져나가지 못하고 그 해변에 걸리게 된다. 그래서 가끔 밀려 들어온 나무나 쓰레기를 치워야 하는 곳이다. 송장이 이곳으로 들어오게 되면 썰물에 돌아 나가기가 불가능 한 곳이다.

 

기적 같은 일이 발생 한다면 왼쪽으로 들어온 송장이 그 바위섬을 돌아서 오른쪽으로 썰물을 타고 나가야 한다. 이러한 일을 두고 불가능 한 일이라 할 것이다. 전혀 그럴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이제는 밀려 들어오는 송장을 떠밀어 낼 수도 없다. 절벽이 너무 높아서 장대로는 어림없는 거리이기 때문이었다. 송장은 자꾸 들어와 암벽에 머리를 박고 출렁거렸다. 이제 물이 빠져나가면 그대로 눌러앉을 판이다.

 

그때였다. 곽대장은 100환짜리 지폐를 나무막대기에 묶더니, “우리가 그대의 입장을 알 수는 있으나, 여기서는 그대를 묻어 줄 수 있는 섬이 아니요, 그대를 묻어 줄 수 있는 큰 섬으로 들어가시오. 미안하오하고는 100환짜리 지폐가 묶인 나무토막을 물에 잠기어 출렁거리는 송장에 던졌다.

 

얼마 후 정말 기적이 일어났다. 100환짜리 지폐가 묶인 나무토막은 오른쪽 암벽 밑 바다로 떨어졌다. 그러니까 나무토막은 송장의 머리 우측에 떨어진 것이었다. 송장의 머리는 그 나무토막 쪽으로 머리를 틀더니 바위섬을 돌아서 그 좁고 긴 암벽을 따라 썰물에 나가고 있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죽은 송장도 우리들의 심정을 이해 한 것인가?

 

곽대장은 옛사람의 말을 실천에 옮겨 보았다고 했다. 노자 돈을 주어야 한다고 들었다는 것이다. 돈은 산 삶뿐이 아니고 죽은 사람에게도 필요한 것인가 보다.

 

우리는 다음날 물이 썼을 때 섬 주위를 네 사람이 10m 정도로 상하 간격을 벌려서 거리를 두고 섬 한 바퀴를 돌았다. 그렇게 3일을 둘러보았다. 그 시체가 팔미도 다른 곳으로 떠밀렸나 해서 살펴보았다. 그러나 발견할 수 없었다. 역시 지폐가 묶인 나무토막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한 달 정도 뒤에 그곳에 강치가 떠밀렸다. 또 같은 상태로 그 긴 암벽의 물골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강치는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었다. 다만 물속으로 깔아 앉지 못하고 몸이 빙글빙글 돌았다. 물이 빠지자 암초에 걸려 있어 가서 보았다. 수조기를 거꾸로 삼키다 수조기가 목에 걸린 것이다. 그 수조기를 뽑아주었지만 결국 강치는 죽고 말았다.

 

그래서 강치를 목도해서 섬 위로 가지고 올라왔다. 그런데 강치는 먹을 수 있는 바다 포유류가 아니었다. 기름이 너무 많았다. 강치를 땅에 묻었다. 송장이 댓가를 준 것 같았다. 자기를 묻어주지 않은 댓가 인지 아니면 자기에게 저승 갈 노잣돈을 준 댓가 인지 우연인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하면 인간이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인간의 시체가 아닌가 한다. 그리고 강치가 떠밀렸던 것은 그 송장이 우리에게 보답으로 그랬는지 우리를 고생시키려 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신기한 일이라 글로 옮겼다.

 

(2) 수십 년 만에 딱 한 번 열린 보물 창고

 

그때의 팔미도 여름은 국제 관광지 같은 곳이 되어 부산하다. 팔미도는 19501970년 중반까지 관광지로 개방되어 있었다. 미군사령부에서도, 이탈리아 대사관에서도 즐겨 찾던 명승지였다. 그들은 수영도 하고 수상 스키도 탔다.

 

팔미도등대는 물이 쓰면 섬 주위의 바다 속살이 드넓게 드러낸다. 그리고 섬 전체를 한 바퀴 돌 수 있는 몇 안 되는 등대섬 중의 하나이다. 기록에 의하면 서해 연안에서 바닷물이 제일 맑다고 하는 곳이다. 그래서 수많은 관광객이 몰려들었다.

 

팔미도 바다 밑에는 해산물의 종류가 아주 풍부한 곳이다. 특히 조개류가 다양하다. 키조개, 피조개, 백합 등과 이름 모르는 조개의 종류들이 많다. 고둥의 종류도 많았다. 소라(참고둥), 모라, 개양 고둥, 삐둘이 고둥 등 그런데 조개가 분포하는 지역은 전부 다르다.

 

키조개는 본섬과 딴섬 사이, 용유도 쪽으로 모래 갯뻘에서 분포하고 있었다. 그리고 매일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아니고 수십 년에 한 번 정도이다. 그러나 양이 어마어마했다.

 

내가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팔미도에는 키조개가 나온다는 말만 있었을 뿐이었다. 내가 팔미도등대에서만 9년을 근무하였지만 딱 한 차례 보았을 뿐이다. 내가 1989년 정년 할 때까지 팔미도에서 키조개를 캤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아빠 엄마

 

5살 난 셋째 아이가 숨이 다 넘어가며 나와 아내를 불렀다. 녀석이 바닷가에서 관사까지 뛰어서 올라온 것이다. 키조개를 보았다는 것이다. 나도 말로만 듣던 조개였다. “아니 이 녀석이 나도 모르는데 어떻게 알고 그러느냐? 했다. 녀석은 그 당시 팔미도에 있었던 자기 또래와는 어울리지 않고 항시 어른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어떤 때는 귀동냥을 했으리라.

 

곽 대장님네 아이들은 7살 난 부수(부도 등대에서 낳았다고자를 넣어 이름을 지었다), 5살 난 승수 그리고 그 밑으로 3살 난 딸아이가 있었다. 그리고 정인근씨네는 큰아들 7살 난 필모, 그 밑으로 5살 난 완자, 그리고 3살 난 딸아이가 있었다. 윤중길씨는 혼자 사는 노총각 이었다

 

그런데 나의 셋째인 이 녀석은 혼자 바닷가를 쏘다녔다.

 

나는 셋째를 앞세우고 아내와 같이 해변으로 가 보았다. 아이가 딴 섬 부리가 보이는 바람맞이 언덕에 서더니 용유도 쪽을 향한 해변을 가리켰다. 바람맞이 언덕에 서면 정면 동쪽은 딴 섬 부리가 있고 그 뒤로 멀리 인천항이 보인다.(지금은 인천대교가 보인다.) 그리고 오른 편으로는 대부도 쪽 해변이 보였다. 1만톤급 이상의 화물선은 대부도 쪽의 팔미도 앞 해변에서 2마일 정도 거리에 있는 항로로 운항하여야 한다. 용유도 쪽은 수심이 낮아 500톤급 이하 선박만 다닐 수 있다.

 

그날은 사리때인 여덟 물 때였다. (음력 18) 썰물을 맞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른 봄에는 바닷물이 많이 빠져나가는데 평상시의 봄철 사리 때의 썰물보다 엄청나게 바닷물이 밀려나 있었다. 섬 바닥이 전부 다 들어 난 상태였다.

 

용유도 쪽으로 물이 빠지면 팔미도 해변의 얕은 물골이 나오고 물골 넘어서 긴 모래 등이 나온다. 이 모래 등은 팔미도에서 용유도 쪽 해변에서 1Km 정도의 거리에 있다. 물속에서 나온 모래등을 팔미도 바람맞이 언덕 위에서 보니 한걸음에 건너 뛸 수 있을 정도로 가깝게 보였다.

 

서해의 섬들은 썰 물때에 서풍이 불게 되면 바닷물이 더 빠진다는 말이 증명된 셈이다. 그때가 썰물에 팔미도 바닷속 해변의 밑바닥을 가장 많이 들어낸 것이었다.

 

팔미도에서 용유도 쪽의 해변은 여름철에는 소라고둥이 많이 나는 바닷속 뻘밭이다. 그쪽 해변은 팔미도 본섬과 자루의 꼬투리 쪽에 해당하는 딴 섬 부리와 연결되는 모래 등성이 아래의 해변을 말한다. 즉 용유도 쪽을 바라보는 해변이다.

 

경사진 모래사장(30m) 아래는 몽돌 자갈 밭(20m)이 나오고 그다음에 굴 껍질이 다닥다닥 붙은 작은 바윗돌들이 나온다. 그다음에는 모래 뻘에 듬성듬성 박힌 파래가 붙은 작은 바윗돌이 나온다. 그곳까지는 물이 많이 빠지는 사리 때가 되면 나오는 곳이다.

 

파래가 붙은 바윗돌이 나오는 곳에서 모래 뻘에 조개가 나오고 소라고둥이 나오는 곳이다. 그리고 간혹 물이 더 빠지면 듬성듬성 뻘 속에 박힌 붉은 바위가 나온다. 이 바위가 붉게 보이는 것은 돌김과 우무가사 등 붉은 해초가 붙어서이다. 이곳은 소라가 산란하는 곳이다.

 

소라고둥은 여름철에 산란한다. 소라의 알을 섬사람들은 이라 부르는데 이 쫌을 만나면 소라고둥을 무더기로 잡을 수가 있다. 보통 20여개 이상이다.

 

그런 현상을 볼 수 있는 것도 일 년에 서너번 뿐이다. 그런데 그날은 그곳을 드러내고도 더 멀리 모래 뻘밭을 드러냈다. 수천평쯤 되는 모래 뻘 속에 칼날 같은 조개의 입이 들어 나 있었다. 빽빽하게 모래 뻘에 박혀 있었다. 조개의 모양이 꼭 곡식 알맹이와 껍질을 분리하는 키 모양이었다.

 

지금이야 양식 키조개가 나와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조개지만 나도 처음 보았던 조개였다. 양식 키조개와 다른 점은 더 크고 표면에 날카로운 돌기가 책책이 돋아나 있다는 점이다.

 

지게로 한 섬을 지고 관사로 올라왔다. 등대 가족들이 전부 모였다. 그리고 말로만 듣던 키조개를 보았다. 그다음 날은 당직자만 빼고 모든 등대가족들이 다시 가보았다. 하지만 썰물은 그곳까지 빠지지 않았다. 서풍이 불지 않은 탓이다.

 

그리고 그 후로 팔미도에서 키조개를 캐 보았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