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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기행

백두대간 인문기행

가락국기

작성일 : 2025.04.10 10:32 작성자 : 김하기

47, 백두대간 인문기행

            가락국기

 

龜何龜何 거북아, 거북아
首其現也 머리를 내어라
若不現也 내놓지 않으면
燔灼而喫也 구워서 먹으리       - 삼국유사 -

 

 

일연의 삼국유사 기이편 가락국기를 보면, 임인년 서기 423월 어느 봄날이었다.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 아홉 간 족장이 모여 흐르는 물에 계욕하고, 구지봉에 올라 하늘에 기도를 드리는데, 화창한 하늘에서 갑자기 신령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듣거라! 너희들이 간절히 소원하며 노래를 부르면 하늘에서 왕을 내려주마!”

하늘의 소리를 들은 구간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기뻐하며 구지가를 부르고 춤을 덩실덩실 추었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

그러자 꼭 거짓말같이 화창한 하늘에서 자색 줄이 내려왔고, 줄에는 금빛 상자가 매달려있었다. 놀란 구간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금빛 상자 뚜껑을 열어보니, 붉은 도자기에 쌓인 황금알 여섯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처음 구간들은 황금 알을 아도간의 집에 모셔두고, 각자 자기 마을로 돌아갔다. 12일이 지난 후 아홉 구간들이 다시 모여 상자를 열어보니, 여섯 개의 알이 모두 어린 동자들로 깨어나 있었다. 10여 일이 지나자 모두 키가 커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보름날에 즉위하였는데, 처음 나타났다고 하여 이름을 수로라 지었다. 동자들은 나날이 자라 다시 10여 일을 지나니 키가 모두 9척이나 되었다.

구간들이 먼저 알에서 깨어난 사람을 받들어서 임금으로 삼으니, 이가 곧 수로왕首露王이다. 나라를 대가락이라 하였고 또 가야국이라고도 하였다.

여기서 알에서 깨어났다는 동자를 우리는 천부인天符印 북방 철기 문화를 전수한 백두대간 환웅과 단군의 전통성으로 봐야 한다.

 

김수로

금빛 상자의 알에서 깨어났다 하여 성을 김씨라 하고, 나라 이름을 가야(가락국)라 하였는데, 신라 유리왕 18년 서41년 때의 일이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주변 다섯 가야 임금이 되었는데, 6가야는 김해의 금관가야, 고령의 대가야, 고성의 소가야, 성주의 성산가야 함안의 아라가야, 함창의 고령가야를 말한다.

수로왕이 홍익인간 재세이화로 금관가야를 태평성대로 다스리던 어느 날, 멀리 남쪽 바다에서 붉은 돛과 붉은 깃발을 단 배 한 척이 나타났다.
수로왕은 기뻐하며 유천간을 비롯한 신하들에게 나가 배를 맞이하라고 하였지만 배에 탄 여인은 대신들을 따라 나설 수 없다는 뜻을 전해 왔다. 이에 수로왕이 직접 배 앞으로 갔고, 배에 탄 여인은 20여 명의 신하들과 남방문화의 진수란 파사석탑과 금· 비단· 옥 등의 보물들을 가지고 수로왕에게 하례하였다.

 

그녀는 말하기를

妾是阿踰陁國公主也 "저는 아유타국(阿踰)의 공주인데,

姓許名黃玉 ()은 허()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年二八矣 나이는 16세입니다.

在本國時 본국에 있을 때

今年五月中 금년 5월에

父王與皇后顧妾而語曰 부왕과 모후(母后)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爺孃一昨夢中 '우리가 어젯밤 꿈에

천제가 나타나 동쪽의 수로왕을 만나 혼인하라고 전했다는 말을 하였다.


그렇게 수로왕과 허황옥은 혼인하였고, 부부는 가야의 백성들을 태평성대로 다스리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壽一百五十七 나이는 157세였다.

國人如嘆坤崩 온 나라 사람들은 땅이 꺼진 듯이 슬퍼하여

葬於龜旨東北塢 귀지봉(龜旨峰) 동북 언덕에 장사하고,

遂欲不忘子愛下民之惠

왕후가 백성들을 자식처럼 사랑하던 은혜를 잊지 않으려 하였다.

 

 

고조선 선사시대부터 진한(신라)과 왜와의 관계는 매우 좋지 않았다고 필자는 본다. 그 이유를 앞에서 여러 번 밝혔듯이 경해鯨海의 고래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증거는 세계 유일한 언양 반구대 암각화에 남아있다. 경해라고 불리던 동해에는 북쪽 캄차카 반도에서부터 울산 앞바다까지 당시 가장 많은 고래가 서식했다.

반구대 암각화를 자세히 분석하면, 고조선부터 진한 사람들은 나름대로 고래 사냥에 질서와 규칙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젖먹이 새끼 고래와 산후조리로 미역을 먹는 어미 고래를 볼 수 있다.

바다 건너 왜에서도 쪽배를 타고 울산 앞바다로 고래 사냥을 왔을 것이다. 왜는 원시적인 돌도끼 돌창 등으로 고래를 사냥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35톤 이상 귀신고래는 잡을 수도 없고 잡아도 끌고 갈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손쉬운 새끼 고래의 무분별한 고래 사냥을 두고 진한 사람들과 마찰은 불가피했다.

신라의 연오랑세오녀 설화는 왜와의 문화적 차이를 잘 설명해 준다.

344(신라 홀해 이사금 35) 2, 왜국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와 신라 공주와의 혼인을 청하였으나 신라 홀해 이사금은 공주가 이미 기혼이라는 이유로 거절한다. 이에 불만을 품은 왜는 346년에 신라의 풍도로 기습하여 서라벌까지 위협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가까이 있으면 잘 지낼 수 없는 법. 적의 적은 동지라 했나. 왜와 신라의 관계가 좋지 않았으므로, 왜는 자연스럽게 선진화된 한반도 북방문화를 가야나 백제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친교를 맺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게 국제 질서 아닌가?

399, 가야· 백제는 왜국의 군사와 함께 신라를 대대적으로 침공한 일이 있었다. 신라 내물 마립간(내물왕) 급히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광개토대왕은 급히 보병과 기병 50,000명의 대군을 신라에 보냈는데, 남거성에서부터 백제 · 가야 · 왜 연합군을 몰아내며 서라벌에 들어오니 성안에 왜군이 가득하였다고 한다. 그 후 신라 서라벌에는 고구려군이 상주하였고 한동안 신라는 고구려의 속국으로 전락하는 신세가 되었다.


554, 대가야 백제 · 왜가 연합하여 3만의 군사를 이끌고 또 신라의 관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전투는 백제 성왕이 죽으며 신라의 승리로 끝이 났고, 그 결과 가야와 백제의 관계도 점점 멀어진다.

신라는 5611, 아라파사산에 산성을 쌓아 왜의 침입에 대비하며 아라가야를 정벌한다. 신라 진흥왕은 즉시 그곳을 순행하여 창녕에 척경비를 세웠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진흥왕 순수비다.
5627, 신라에서 화랑 사다함을 부장으로 삼아 군사 5,000명이 대가야를 공격한다. 사다함이 대가야로 쳐들어가 흰 깃발을 꽃으니 성안 사람들이 두려워 어쩔줄을 몰랐다고 한다.

여기서 박창화의 화랑세기 필사본에 미실이 사다함에게 불렀다는 풍랑가風浪歌를 한 번 들어보자.

 

바람이 불다고 하되 임 앞에 불지 말고

물결이 친다고 하되 임 앞 치지 말고

빨리빨리 돌아오라 다시 만나 안고 보고

아흐, 임이여 잡은 손을 차마 물리 라뇨  -미실-

 

대가야가 신라에 저항하며 백제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백제는 도와줄 형편이 되지 못했다. 9, 대가야가 계속해서 버티자 진흥왕은 신라의 영웅 이사부에게 20,000명의 병력을 주어 공격했다. 이사부가 대가야에 다다르자 도설지왕道設智王은 항복함으로써 대가야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第十 仇衡王
鉗知子母女辛丑立理四十三年中大通四年壬子納土投羅自首露王壬寅至壬子合四百九十年

10대 구형왕(仇衡王) 금관국(金官國)의 왕 김구해(金仇亥)
겸지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의 딸이다. 신축년(521)에 즉위하여 43년 동안 다스렸다. 중대통 4년 임자년(532)에 영토를 바치고 신라에 투항하였다. 수로왕 임인년(42)으로부터 임자년(532)까지 도합 490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