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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일현의 책상과 밥상 사이

<책상과 밥상 사이> 87.평범과 무비판, 비관론을 넘어

작성일 : 2023.01.06 10:43

평범과 무비판, 비관론을 넘어

/윤일현

 

새해 벽두 사람들은 전화나 문자로 덕담을 주고받는다. ‘건강, 행복, 행운이라는 공통 요소에 개별적 관계에 따른 한두 가지를 더 추가한다. 잘 아는 선배에게 전화했다. 통화가 끝날 무렵 난세에는 영웅도 간웅도 되지 말고, 그냥 사람들 가운데 파묻혀 평범하게 살아라. 그게 죄짓지 않고 잘 사는 거다라고 했다. 갑자기 평범이란 말이 평범하게 들리지 않았다. 내가 속한 집단의 가치관과 시스템, 지시에 묵묵히 따르는 것이 나 자신과 국가·사회를 위해 잘하는 것일까?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는 나치 독일이 유대인 학살을 위해 효율적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아돌프 아이히만을 1960년 아르헨티나에서 체포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재판받고 처형됐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재판 과정을 지켜보며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란 책을 썼다. 책의 부제 악의 평범성에 관한 보고서가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사람들은 학살을 주도한 나치 친위 대원 아이히만을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냉정한 외모를 가진 건장한 체구의 악한으로 상상했다. 실제 모습은 왜소하고 연약할 뿐만 아니라 지극히 평범해 보였다. 아렌트는 재판을 지켜보고 악과 악행은 평범과는 거리가 먼 특별한 무엇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뒤흔드는 보고서를 냈다. 아이히만은 유대인에 대한 특별한 증오심이 없었다. 그는 출세하기 위해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를 그냥 충실히 수행하려고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범죄 경위를 방청하고 악이란 시스템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라고 정의했다.

 

연초 몇몇 보도를 눈여겨보았다. 갤럽인터내셔널이 지난해 10~12월에 세계 35개국 성인 35천여 명을 상대로 ‘2023년 전망 조사를 실시했다. 한국은 새해를 낙관적으로 전망하는 사람이 12%로 체코와 공동 33위였다. 경기 낙관은 9%이고 비관이 49%였다. 기타 세부 지표도 모든 항목에서 비관론이 낙관론보다 우세했다. 다른 한편으로 US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USNWR)가 지난해 말 발표한 ‘2022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 조사에서 한국은 일본(8)을 제치고 미국, 중국, 러시아, 독일, 영국에 이어 6위를 차지했다. USNWR은 한국의 첨단 서비스 기반 경제에 주목하면서 국민총저축(GNS)과 외국인 투자 규모가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 중 하나라고 소개했다. 그런데도 우리는 새해 전망을 극히 어둡게 보고 있다. 파키스탄(60%), 케냐(53%) 같은 나라도 낙관론 수치가 우리보다 훨씬 높다.

 

비관론이 지배적인 이유는 많다. 경기 침체와 물가 상승에다 우리 특유의 극단에 치우치기 쉬운 심리적, 정서적 요인이 작용한 것이다. 나는 우리 정치가 비관론 조성에 큰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아렌트가 주장한 악의 평범성을 여야 정치인에게 적용하고 싶다. 그들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소속 정당과 정파의 지침에 맹목적으로 충성한다. 그런 행동이 결국에는 자신과 소속 집단, 국가의 발전을 저해하고 국민을 우울하게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들은 사사건건 극한 대결을 벌이며 갖가지 비관적 전망을 양산한다. 상대가 어떤 비전을 제시하든 일단 부정한다. 파괴적 행동이나 만행은 괴물 같은 인물이 자행하는 것이 아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성찰 없이 처한 상황과 시스템에 올라타고 시키는 대로 하다 보면 아이히만의 끔찍한 악행처럼 정치 혐오증과 근거 없는 비관론 같은 반사회적 악성 바이러스 생산에 일조하게 된다. 중립성을 포기한 언론과 극단을 부추기는 유튜브 같은 매체도 맹목적 비관론을 확대 재생산하며 갈등과 대결을 부추기고 있다. 혐오와 조롱, 저주가 그들의 수익 창출 수단이기 때문이다. 근거 없는 낙관론도 경계해야 한다. 불리한 출발선과 기운 운동장에 대한 성찰 없이 성실하게 노력하면 언젠가는 보상받을 것이라는 노력 보상주의를 주입하는 것도 문제다. 이는 사회적 약자에게 고통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일종의 폭력이다. 국민도 극단적인 대결을 부추기는 팬덤에 가담해 맹목적으로 충성하지 말아야 한다. 특정 조직과 집단에 대한 무비판적 광적 지지는 악마에게 관을 씌워주는 것과 같다. 진영과 입장이 다른 사람과도 머리를 맞대고 토론하며 희망의 출구를 함께 찾는 풍토를 조성해야 한다.

(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