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회고록<등대이야기>
작성일 : 2025.03.31 08:37 수정일 : 2025.03.31 08:44
3. 파라다이스의 고독
1954년 5월
소청도 등대에서 밴 셋째 아이의 출산을 위해서 섬을 나갔던 아내가 돌아왔다. 아내는 셋째 아이를 출산하려고 충남 태안군 원북면 이곡리의 내 고향으로 갔었다. 그곳에 나의 부모님이 계셨기 때문이었다. 3년 전만 해도 다 죽어 가던 나였으나 소청도 등대는 나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고 우리 가족에게 날개를 돋아준 둥지와 같은 등대 였다. 내 인생에 가장 아름다운 무늬가 채색된 곳이었다. 그러나 등대원의 생활이 어찌 한 곳에만 머물 수 있겠는가.
6살짜리 큰애는 예동에 있는 대청도 소학교 소청도 분교에 입학하여 다녔지만 나의 다음 근무지는 옹도 등대였다. 옹도 등대에 등대원 결원이 생기면서 내가 가게되었다. 옹도는 섬의 형태가 독(항아리) 모양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섬의 높이는 80m로 바위 섬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그곳은 등대원 3명만 사는 무인도이다. 그래서 아이들 교육 문제로 가족과 이별해야 하는 시점이 다가온 것이다.
큰 아이(8세)와 둘째 아이(6세)는 아직 부모 품에 자라나야 하는 나이였지만 교육 문제 때문에 고향에 있는 부모님 집으로 보내게 되었다. 우리 부부는 셋째 아이만 데리고 태안반도 서쪽 끝자락에 있는 무인도 옹도 등대로 가기 위해 군성호에 몸을 싣게 되었다.
1) 파라다이스 옹도에서의 고독과 굶주림
1956년 9월 등대 보급선 군성호가 인천항에서 남쪽으로 향한 지 5일 만에 옹도에 도착했다. 등대장 이정근씨 부부와 등대원 조씨 부부가 우리 가족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옹도 등대는 1907년 1월 건축 점등된 등대이며, 등탑 구조는 백색 8각형 콘크리트조 14m이다. 위치는 충남 태안군 근흥면 가의도리 산 510번지이며 태안반도 안흥 신항(신진도)에서 약 12km 거리에 있다. 인천항에서 남쪽 약 60마일 거리이다.
섬 정상에 등탑과 관사, 무신호사, 동력실이 있으며 선착장에서 등대까지 진입로에는 수령 100년이 넘는 자생하는 동백나무 숲이 있다.
그리고 해안선을 이루는 섬 해변은 선박이 접안 할 수 있는 동북쪽을 제외하고는 온통 가파른 바위 절벽이다. 큰 나무라고는 동백나무와 약간의 산벚나무뿐이고 찔레와 바위틈 사이에 핀 억새가 해풍에 흔들거리며 우리 식구를 맞이했다.
옹도 등대 동쪽 앞 바다는 우리나라의 항로표지가 제일 먼저 기록에 나오는 곳이다. 옹도와 가의도 사이는 조선시대 조공 선박이 지나다니던 길목으로 안흥 앞 바다와 가의도 사이에서 수심이 낮고 암초로 조공 선박이 많이 침몰하엿던 곳이다. 세종실록(1422년)에 충남 태안군 근흥면 가의도리 앞 해상 관장목(옹도와 가의도 사이의 물 길목)에 지방 수령은 메생이(향도선)을 배치하여 조공선이 무사히 통과 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실록을 보면 그 당시에도 선박의 안전 항행을 위하여 항로표지를 이용하였다는 것을 알수 있으며, 옹도는 그러한 역사가 있는 등대이다.
그 옛날 망망한 바다 위 선박에서 등불로 항로표지 역할을 하였던 우리 선조들도 나와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나는 옹도 등대에서 등대원이라는 직업은 고독과 타협하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와 같이 근무한 동료들 중에는 등대원으로 정년을 맞이한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다. 고독과의 타협은 고난이 인성을 양성시키는 것처럼 괴로움의 허물을 하나씩 벗기는 작업과 같았따.
인천항로표지관리소(후에 인천지방해운국, 인천지방 해운항만청)에서 관리하는 섬에 설치된 유인 등대는 전부 다 근무하여 보았지만 섬의 구석구석이 절경이 아닌 섬이 없다. 혼자 감상하기가 아쉬울 뿐이다. 그러나 등대가 있는 섬의 아름다움의 취기는 약 한 달 정도 간다.
사시사철 변하는 생명의 신비로운 빛깔, 장렬하는 태양의 노을과 시시각각 색깔을 달리하는 천의 얼굴을 가진 바다, 바닷새들의 군무, 강물처럼 흘러가는 해류의 숨소리, 소리 없이 다가와 섬 전체를 가려놓는 해무, 깊은 바다의 심연에서 울부짖는 포세이돈의 물거품, 푸른 잎새에 부드럽게 내려앉은 하늬바람(동풍), 죽음의 신도 싫어한다는
북서풍의 곡소리, 천상의 얼굴에 피어난 별들과 노란 외눈박이 달이 자맥질하는 짙푸른 밤바다, 바다 멀리 사라지는 선박의 맥박 소리는 뭍에서 느낄 수 없는 풍광인지 모른다.
그러나 늘 이러한 풍광 속에 묻혀 살다 보면 신비로움도 사라지고 아름다움도 잊고 산다.
옹도 등대의 겨울은 추위와 배 고품 과 싸움이었다. 그 당시의 등대 관사의 방은 온돌로 마른 나무나 마른 풀을 아궁이에 태워서 온돌을 뎁혀야 했는데, 옹도에는 풀(주로 억새)이 얼마 없는 작은 바위섬이다. 등대원 세 가구의 연료로 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인근의 가의도, 태안에서 땔감을 사 와야 했다. 겨울이 되면 옹도를 찾는 사람들이나 선박도 없었으며, 등대 보급선도 풍랑으로 연락이 오랫동안 되지 않는 형편이다.
1956년 겨울은 아궁이에 불씨가 끊인 채 며칠씩 되었고, 곡식이 떨어져 홍합죽이나 무릇죽(무우, 나물)을 먹을 때가 많았다. 세 살 난 셋째 아이는 그런 환경으로 이유식을 못하고 백일해라는 독감에 걸려 약도 없이 그해 겨울을 넘겼다. 겨우 살아간다는 겨우살이라는 말이 정말 실감 났다. 자연환경에 던져지면 짐승들뿐 아니라 인간도 겨우 살 수 있다는 것을 ·····, 옹도의 겨울은 잔혹했다.
어느 날에는 섬 전체에 눈이 온통 쌓여 해안가에 내려가지도 못하고 등탑의 등롱 창가에 매달려 쌓이는 눈을 밤새 치워야 했다. 옹도 등대 등명기는 4등급 대형 등명기로 프리즘 렌즈(유리 재질)에 백색 석유 백열등(15초에 1섬광)으로 불을 밝혀 43km의 광달거리였지만 눈이 내리면서 유리창에 얼어붙기 시작하면 눈이 유리창에 서엣장 처럼 붙어 두께가 20cm 이상 될 때도 있다. 이 서엣장 처럼 붙은 눈 때문에 등명기 불빛의 광달거리가 짭아 진다. 등대 직원 조씨와 나는 밤새 등롱 유리창에 얼어붙은 눈의 얼음을 떼어 냈다. 새벽이 되어도 눈은 계속 내리면 유리창 붙는 눈을 게속 치워야 했다. 눈이 얼어붙으면 녹아 얼음으로 굳기 때문이다. 등명기가 있는 등탑 안은 석유 증발식 광원을 사용하여 불꽃으로 훈훈한 온도이기 때문이다. 등탑 안과 등탑 밖의 온도 차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이다.
배가 고프다 못해 아팠다. 몇 년 전 군대에 입대하여 병에 걸려 귀향길에서 개가 버린 쉰 팥고물 떡을 먹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나 지금은 쉰 떡 조각도 없었다.
해가 뜨면서 눈발이 자자 들었다. 등롱 유리창 물기를 닦아내자 온도가 좀 올라갔다. 그리고 등명기 관원을 끄자 등탑 안 온도는 떨어졌다. 유리창이 마르고 습기 없는 작은 눈발이 유리창에 부딪히자 눈발은 달라붙지 못하고 미끄러졌다. 조씨와 나는 등탑 위에서 매섭게 몰아치는 북서풍을 피해 등탑 안으로 들어와 콘크리트 바닥에 주저앉아 멍-한히 돌지 않는 프리즘 렌즈를 바라보았다. 직업의 사명감이란 무엇인가‽
아마 그땐 본능이라 해야 할 것이다.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누구한테 호소할 때도 없었다. 방에 군불도 지피지 못하고 어제 저녁밥도 먹지 못한 아내가 생각나서 일어니 조씨도 따라 일어나 등롱 유리창에 가림막(주간에 태양과 중앙렌즈 초점이 맞으면 석유백열등의 유리구가 녹거나 화재가 발생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함))을 쳤다. 가림막은 외부는 흰색, 내부는 검은색 융단으로 이중 제작된 것이다. 이 사실은 후에 팔미도등대에서 해가 뜨면 등롱 유리창을 가려야 했는데 그것을 하지 않아 등명기의 프리즘 렌즈 초점 안에 있던 백열전구가 녹아 흘렀다.
조씨네는 내 셋째 아이보다 세 살 많은 아들과 부인 세 식구로 나와 같다. 둘이서 등탑을 내려오자 아내가 아이를 업고 등탑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가 등대장님이 부른다고 하여 등대장 관사로 들어갔다. 조씨 부인도 아이를 데리고 함께 와있다. 등대장님 댁에는 아침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찐 감자와 무릇과 홍합을 넣고 끊인 죽이었다. 언 몸을 녹이기에 충분했다. 등대에서 등대원 가족들은 한 식구였으며, 모든 것을 함께 했다.
등대장은 해가 떠 바다가 열리자 망태기와 갈고리를 들고 바다로 내려갔다. 옹도는 썰물이 되어도 암벽 높이만 올라간다. 다른 섬처럼 썰물이 되어도 바다 밑바닥을 들어내지 않는다. 그만큼 섬 주위의 몰골이 깊다는 것이다.
그래서 겨울철에 홍합을 따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 등대장은 굶고 있는 등대 가조들을 위해서 홍합을 따려고 목숨을 건 것이다. 홍합은 물 빠진 절벽 바위에 붙어 있어 외발은 밧줄로 묶어 바위에 걸어 두어야 한다. 벽 아래 바다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난 다음 바위 바닥에 엎드려 가슴 절반은 철썩거리는 바위 아래로 숙여야 겨울철 옹도의 홍합을 딸 수 있다. 만약 바다로 빠진다면 섬으로 올라오기가 어렵다. 헤엄을 잘 친다고 해도 절벽에 오를 수 없고 섬의 절반을 돌아서 선착장까지 와야 하기 때문이다.
등대장 아주머니는 섬의 작은 밭뙈기에서 수확한 비상식량인 감자를 내놓고 직원들에게 나눠 주었다.
2013년인 올해는 옹도 등대가 점등한 지 106년이 되는 해이다. 대산 지방해양수산청에서 올해부터 옹도를 개방했다고 한다. 아주 오래된 동백나무가 등대로 올라가는 길초입에서 나무숲을 이루고 있으며, 섬 정상에 군락하는 동백나무 숲이 옹도의 자랑이다. 그것은 오랫동안 등대를 지켜온 등대원들의 사명 의식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아궁이에 뗄 나무가 없었던 시절에도 동백나무를 보호하고 관리했던 결과이다.
나의 옹도 등대에서 생활을 몇 개월 하지 못하고 팔미도등대로 전근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