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백두대간 기행

백두대간 기행

백두대간 인문기행 비목

비목 (신종석)

작성일 : 2025.03.28 10:47 작성자 : 김하기

백두대간 인문기행

           휴전선의 비목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 타고 달빛 타고 흐르는 밤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울어 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퍼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한명희-

 

 

비목의 노랫말을 지은 한명희는 비목이 아무에게나 불리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는 이런 사람은 제발 비목 노래를 부르지 말았으면 하고 말한 적이 있다.

"숱한 젊음의 희생 위에 호사를 누리면서도 순전히 제 잘난 탓으로 돌려대는 한심한 사람. 시퍼런 비수는커녕 어이없는 우격다짐 말 한 마디에도 소신마저 못 펴는 무기력한 인텔리. 풀벌레 울어대는 외로운 골짜기의 이름 없는 비목의 서러움을 모르는 사람. 고향 땅 파도소리가 서러워 차라리 산화한 낭군의 무덤가에 외로운 망부석이 된 백목련의 통한을 외면하는 사람. 겉으로는 호국영령을 외쳐대면서도 속으로는 사리사욕에만 눈이 먼 가련한 사람. 국립묘지의 묘비를 얼싸안고 통곡하는 혈육의 정을 모르는 비정한 사람. 숱한 싸움의 희생 아닌 것이 없는 순연한 청춘들의 부토 위에 살면서도 아직껏 호국영령 앞에 민주요, 정의요, 평화의 깃발을 한 번 바쳐보지 못한 못난 이웃들."

 

필자도 군 복무를 중부 전선 DMZ에서 근무해 한명희 선생을 백번 이해하는 편이다. 당시만 해도 휴전선 안에는 지뢰가 여기저기 묻혀 있었고, 6·25 때 버려진 실탄이나 녹슨 탄창이나 철모 · 군화 짝· 심지어 유골까지 심심찮게 눈에 띄었던 시절이었다.

필자가 아직도 잊지 못하는 것은 19768·18 도끼 만행의 밤이었다. 북은 대남 심리전의 하나로 휴전선 일대에 밤새 탱크 가속페달 밟는 소리를 확성기에 틀어, 겁을 주며 금방이라도 몰고 내려올 듯 대한민국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정말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날이 밝고 진지에서 데프콘DEFCON 2(전쟁준비 완료)가 해제되었다는 명령을 하달받고, 필자는 안도하며, 진지에서 몸을 일으켜, 나도 몰래 가곡 비목을 흥얼거렸던 일이 있었다.

 

38선 분단의 시작

일본 패망과,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백두대간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에 의해 임시로 북위 38도선을 그으며 분할된다.

오호통재! 백두대간에 38도 선이란 게 있었던가? 기원전 2457(上元 甲子) 103, 환웅桓雄천왕이 이 땅에 자리 잡고 아무도 긋지 않았고 없었던 38도 선이 아닌가?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소련군이 들어와 서로 경계로 삼았던 선이다.

처음에는 38도선의 경계가 느슨하여 남북으로 서로 왕래할 수 있었지만, 북한에 김일성 정권이 들어서면서 38선의 경계가 더욱 강화되고 사람의 왕래를 막았다. 38도 선은 백두대간 분단의 선이며, 대한민국과 북한의 경계로 중요한 지점이 되고 말았다.

 

김일성의 폭풍 224 작전

폭풍 작전은 김일성이 '남조선 해방'을 명분으로 조선인민군을 38선 이남으로 진군시켜 1950625일 일요일 새벽 4, 대한민국을 기습 침공하며 벌어진 6·25 동란의 첫 번째 작전명이다.

 

폭풍 224작전의 계획은 침공 50일째이자 광복절 5주년인 1950815일까지 한반도 들머리 부산까지 점령하고, 수도 서울에서 인민군 열병식을 만천하에 대대적으로 연다는 계획이었다.

북한은 폭풍 224작전 계획에 따라 19503월부터, 소련이 지원해 준 탱크· 야포· 전투기 등 무기를 전방에 배치하며 서울을 단 3일 만에 점령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고 실현되는 듯했다.

결국, 유엔 16개국이 참전하고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국제전으로 비화되며 한반도 역사상 가장 처참한, 2백만 명 이상 사망 실종한 6·25 한국동란으로 기록되었다. 역사상 이전에 일어난 신라· 백제· 고구려 삼국전쟁은 비교할 수 없는 민족 동란에 외세가 개입한 국제전이었다.

6·25 동란의 마지막 전투인 ‘425고지 전투를 한번 보자.

425고지 전투는 6·25 동란 막바지인 1953720일부터 27일까지 국군 7사단 8연대가 중공군 135사단과 강원도 철원군 원남면 일대 425고지에서 벌인 전투다.

화천발전소를 지키기 위해 치러진 425고지 전투는 6·25전쟁의 마지막 승전으로 기록됐으며, 이 전투의 승리로 인해 휴전선이 35나 북상했다.

19537월 휴전을 앞두고 북한의 김일성은 직접 전방을 시찰하며, 동무들 화천발전소만은 넘겨줄 수 없소.” 하며 사수를 지시했다. 질세라 이승만 대통령 역시 화천발전소는 반드시 탈환해야 하오.” 며 절대 탈환 명령을 내렸고 1953719일 직접 최일선까지 방문해 장병들을 격려했다.

 

<휴전선>

6.25 전쟁을 휴전하기 위해 유엔군(총사령관 마크 클라크)과 조선인민군(최고사령관 김일성), 중국 인민지원군(사령원 펑더화이) 간에 1953727일 체결된 협정에 따라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휴전 상태로 대치하는 군사적 경계선 일명 휴전선(休戰線, Armistice Line)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대한민국과 북한이 각각 1991년 유엔에 가입하면서 사실상 '국경선'처럼 되어버렸다.

1953727일 발효된 한국 전쟁의 정전 협정 체결 당시 임진강에서 동해안까지 총 1,292개의 말뚝을 박고, 이 말뚝을 이은 약 238km의 가상의 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설정했다. 군사분계선에서부터 남북으로 각각 2km 범위에는 군사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완충 지대인 비무장 지대DMZ가 설정되어 있다.

 

처음 DMZ가 설정되고 주간에 남북 군인들이 수색을 하다 마주치는 경우도 있었으나, 서로 못 본체 했고, 가끔 인사나 짓궂은 농담도 오갔다. 군인들 간에는 서로 동족 의식과 정이 남아 있었다.

북한군 역시 분계선 근처 수색시 도발 행동을 하지 말라고 주입 시켰다. 피아 모두 수색 출동시 GP에서 관측하여 서로 마주치지 않게 알려주기도 했다. 분계선이 분명하지 않을 경우 서로 월경을 하게 되는데 묵인했다. 그러나 밤에 매복조에 걸리면 무조건 사살할 수밖에 없었다.

교전을 피하려고 서로 오발 사고 때 방송으로 오발이라고 통보했다. 아군이 북한쪽 GP근처로 수색들어간 경우도 있었는데, 북측은 우리보고 "동무 넘어오라우~"라고 장난식으로 소리치기도 했다.

처음 필자가 DMZ에 배치를 받아 받은 교육은 근무 중 졸면 북한군이 목을 베간다는 소리를 고참들에게 수시로 들었다.

하지만 8.18 도끼 만행 이후 남과 북은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 서로 먼저 보이면 서로 먼저 사격하는 철천지원수가 되어버렸다. 남북한 모두 사살하면 포상을 내걸고 독려했다.

우리 GP를 마주 보고 있는 북한 522 GP는 구역은 북한 특전사 소속으로 야간에 자주 우리 GP까지 침투해, 돌멩이를 던지는 등 무력시위를 했다. 우리 쪽 GP 주변 50m 전방까지는 불모지 작업을 해서 야간이라도 50m 가까이 접근하면 야간근무병에게 발견된다.

북한 특전사들은 아마 50m 밖에서 새총이나 기구를 이용해 돌을 던져 교란하는 듯했다.

필자의 주 임무는 관측병으로 북측 522 GP 특이 상황이나 북한군의 이동 상황 등을 기록 보고하는 임무였다. 얼마나 가까우면 망원경으로 북한 군인들의 배구 시합을 심판할 정도이다. 그러니 북한 522 GP 군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측할 수 있다.

우리는 식수 및 부식 등을 등짐을 지고 매일 같은 시간에 산 아래에서 운반하는데, 북한 군인들은 단 한 번도 등짐으로 물건을 나르는 것을 목격하지 못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북쪽으로 정찰을 나갔다 온 대원의 목격담은 북은 산 뒤쪽 은폐된 곳에서 케이블카로 물자를 수송한다고 했다.

필자가 복무할 때만 해도 북한의 전력 사정이 좋았던 것 같다. 그런 북한이 왜 저렇게 되었는가? 위정자 한 사람의 판단이 전 인민을 등 따시고 배부르게 만들 수 있다는 진실.

 

필자가 백두대간의 꽃 진달래에서 서술했듯이 백두대간 DMZ에는 봄이면 큰 집채만 한 진달래가 만발하고 그 밑에 지뢰가 묻혀 있었다고. --

 

* 백두대간 인문기행 상권 - 중권 백두대간 낙남정맥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