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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2.12.23 07:50
기술을 부리려면, 일안이족(一眼二足)
/양선규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할 때는 반드시 “올라가서는 안 되고 내려앉아 깃드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사실, 말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비싼 수업료를 물고 여러 번 겪은 일이기도 합니다. 때를 얻어 뜻을 펼치게 되는 것은 ‘옳고 바르고 능력 있게’ 사는 일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입니다. 그것보다는 ‘좋아하는 인물이 되는 일’이 훨씬 중요합니다. 사회생활을 해나가면서 그 사실을 뼈에 새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두 가지 중 하나만 선택해야 된다는 것을 깨쳤습니다. 옳고 바른 생활을 할 것인가, 아니면 두루 사랑받는 삶을 살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에게는 앞의 삶이 맞는 것 같았습니다. 남들에게 사랑받는 일, 동지를 얻는 일는 일은 저 자신이 ‘깊은 이해’의 대상이 되고, 한편으로 마음에 없는 인내와 봉사를 꾸준히 실행해야 하는 일이므로 저와 같은 박한 심성을 가진 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만 되는 일’의 결과가 한갓 남들이 가지지 못하는 한 주먹의 권력이라면 더더욱 피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타고나지 못한 자질을 애써 구할 일도 아니었거니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욕심이 앞서 만부득이 한다는 것이 결국은 불행의 씨앗이 될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를 포기하고 나니 오히려 환경과의 불화가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만사형통(萬事亨通)’까지는 아니지만 ‘생각이 손으로 내려오는 일’과 ‘손닿는 곳에 기대를 두는 일’이 대체로 순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를테면 ‘기술을 부리는 일’이 조금은 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기술(技術)은 보통 솜씨, 재주, 기예(技藝), 기법 등의 의미소를 내장한 말로 이해됩니다. 사용되는 맥락에 따라서 그런 의미 중의 일부가 노출되거나 그 반대로 잠복합니다. 물론 은어로 사용될 때는 또 다릅니다. 도박에서는 ‘기술’이 ‘속임수’라는 말이라고 들었습니다. “기술이 들어간다.”라는 말은 “속임수를 펼친다.”라는 뜻이라는 거지요. 검도에서는 ‘기술’이 ‘실기 능력’이라는 뜻으로 곧잘 사용됩니다. “기술이 출중하다.”, 혹은 “기술이 조금 미진하긴 하지만 지도자의 품성이 돋보인다.”라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그러니까, ‘검도의 기술’이라고 했을 때의 ‘기술’은 검도의 기능적 측면으로서 검도의 ‘정신’과 한 짝을 이루는 일종의 ‘확대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기술’이라는 말의 용도를 보면서 말(단어)의 품격이나 위계가 사용되는 영역(장르)이나 문맥에 따라서 천차만별, 달라질 수 있음을 알겠습니다(사람도 그렇지 싶습니다만).
일전에 <수(守),파(破),리(離)>라는 수행의 규범을 들어 ‘글쓰기의 기술’에 대해서 몇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 모범이 되는 선례(先例)를 중시하되 그것에 끝까지 집착하지 말 것을 당부드렸습니다. 누구에게나 타고나는 것이 있으니 자신이 가진 것을 십분 발휘하는 앞날을 가져야 할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제가 해 본 바로는 그 정도만 알면 기본적인 기술의 요목은 이미 깨치는 셈이었습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구분해 내고, 자기 안에서 끌어내어 기존의 것들에 조금이라도 보탤 수 있는 것을 빨리 찾아내는 능력(순발력)이 중요합니다. 남의 것 안에서만 빙빙 돌고 있으면 볼 만한 내 것들을 발굴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글쓰기의 기술이 ‘장르적 글쓰기’ 차원을 무시해도 좋다는 말은 아닙니다. 가령, 시(詩)를 쓴다거나 시나리오를 쓰거나 논술을 할 경우라면 우선은 장르의 요구를 숙지(熟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장르의 요구’가 특별한 글쓰기에서는 그것 안에서 요구되는 ‘특별한 기술’에 정통하는 것만으로도 최소한의 성공을 거둘 수 있습니다. 굳이 ‘백치(白痴)의 문장’(천재적인 글)은 될 수 없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인정과 환대는 받을 수도 있습니다. “새로운 문장이 탄생했다.”라는 말은 우주에 새로운 공간이 창조되는 의미와 비슷한 것이기 때문에 아무나 들을 수 있는 말은 아닙니다.
글쓰기에도 기술이 있고, 검도에도 기술이 있습니다(제가 만약 기억에 남는 기술자(技術者)로 인정받는 일이 생긴다면 필경 이 두 영역에서일 것입니다). 천학비재, 둔한 소질을 가지고 그 두 영역의 기술 면(面)에 대해서 이런저런 잡념들을 떠올려 봅니다. 먹고 사는 일에 꼭 필요한 것들도 아닌데 때로 혼자서 아등바등 ‘기술 연마’에 매달리는 까닭을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수십 년간 그 두 가지 기술을 배우고 익히다 보니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겠는가?”는 좀 알겠습니다. 이를테면 내 기술은 현재 이 정도이니 좀더 연마하면 앞으로 어느 정도는 되겠다는 예측이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글(기술)을 쓰면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좀더 가까워지고(환영받고) 저런 부류의 사람들과는 좀 더 멀어지겠다(박대받겠다)는 예측도 가능해지고, 이런 글(기술)을 썼을 때의 완성도는 아무리 잘 되어도 5~60%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는 등의 자가진단도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그 정도면 하수이긴 하지만 ‘기술을 부리는 자’ 축에는 들 수 있을 것이라는 자만도 듭니다.
글쓰기의 기술과 검도의 기술은 대동소이합니다. 일안 이족 삼담 사력(一眼二足三膽四力)도 같고, 수파리(守破離)도 같습니다. 선의 선(先의 先, 백치의 문장)이 존중받는 것도 비슷하고 무심(無心), 명경지수(明鏡止水)의 심적인 경지를 지향해야 높은 수준의 기술이 가능하다는 것도 같습니다. 일도(一刀)가 만도(萬刀)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활인검(活人劍)의 경지, 혹은 ‘역지사지 견물생심(易地思之 見物生心)’의 경지가 아직은 만족스럽게 손으로 내려오지 않는 것이 아쉽습니다.
현재까지 제가 확인한 모든 기술의 마지막 관문은 ‘사랑’입니다. 자기 안의 신성을 끝내 포기하지 않는 일입니다.
서론이 길어졌습니다. 오늘의 주역 말씀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제 경험칙으로 미루어 볼 때 안 풀리는 사람이나 조직의 공통점은 ‘노력해야만 될 일’에 매달려 자기가 부릴 수 있는 기술을 자주 놓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작은 것이 큰 것보다 지나친’ 것을 용납할 때가 많습니다. 안 되는 일에 전력투구하고, 자기 안의 큰 것을 제대로 활용(대접)하지 못하고 작은 것들끼리만 떼를 지어 횡행하다 망하기가 십상입니다. 그런 조직에 속한 사람글로서는 매사 안타깝고 답답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 망조가 든 조직은 풍비박산이 나야 끝이 납니다. 소과괘(小過卦) 효사를 한 번 더 인용할까 합니다(“나는 새가 떠나고, 구름이 빽빽할 뿐 비가 오지 못한다”).
....상육은 만나지 아니하여 지나치니, 나는 새가 떠남이라. 흉하니 재앙이라(上六 弗遇過之 飛鳥離之凶 是謂災眚). -- 소인의 지나침이 드디어 상극에 이르렀으니 지나쳐도 한계를 알지 못하고 너무 지나친 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너무 지나쳤으니 무엇을 만나리오? 날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무엇에 의탁하리오?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인 것이니 다시 무엇을 말하리오! [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도서출판 길, 1999(2쇄), 470쪽]
조직의 망조를 걷어내는 일, ‘밀운불우(密雲不雨)’, ‘비조이지(飛鳥離之)’의 흉함을 피하는 일은 ‘옳고 능력 있지만 사랑받지 못하는 자’들부터 ‘나는 새의 욕망’을 버리고 기꺼이 조직의 선두에서 내려오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새 사람이 그 빈자리를 채웁니다. ‘세상은 넓고’ 날아오를 새들은 많습니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부터 버려야 할 것입니다. 나라를 살리고 조직을 살리고 나를 살리는 길은 오직 그것밖에 없습니다.
<소설가/ 대구교대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