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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인문기행 님의 침묵 (신종석)
작성일 : 2025.03.11 11:57 작성자 : 김하기
백두대간 인문기행 님의 침묵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한용운-
설악 병을 심하게 앓았던 매월당 김시습(1435~1493), 조선 중기 불교의 중흥을 꾀한 보우(1515~1565) 스님, 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1879∼1944) 역시 설악 병을 앓고 머물러 치병했던 곳이 설악산이다.
웃기는 일이지만 대통령 전두환이 자신의 죄를 자청하며 스스로 유배한 곳이 백담사이다. 필자는 왜 전두환이 스스로 백담사로 들어갔는지 이유를 아직도 알 수 없다. 설악 병은 아닌듯한데? 그냥 잠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듯 도망친 것 아닌가?
男兒到處是故鄕
幾人長在客愁中
一聲喝破三千界
雪裡桃花片片飛
남아란 어디메나 고향인 것을
나그네 수심에 잠긴 이 그 몇이더냐
한 마디 큰소리 질러서 삼천 대천 세계 깨뜨리니
눈 속에 복사꽃 조각조각 날리네. - 만해 한용운의 오도송-
백두대간 설악산 백담사와 오세암은 독립운동가, 불교개혁가, 시인이었던 만해에게 정신적 고향이자 님의 침묵을 지은 곳이다.
조선의 국운이 기울어가던 187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만해는 17세에 처음 설악산을 찾았고 바로 오세암에 들어가 스스로 절 머슴을 자청했다.
1905년 백담사에서 머리를 깎은 뒤, 1910년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 발표하여 한국불교의 전반에 걸친 광범위한 개혁 방안을 제시했다. 만해의 불교 유신은 중세불교의 부조리를 탈피하고 새로운 근대불교를 맞이하기 위한 불교계의 각성과 개혁을 촉구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가운데 불교의식에 관한 개혁 논의는 〈불가에서 숭배하는 불상과 탱화에 관한 논(論佛家崇拜之塑繪)〉 〈불가의 각종 의식에 관한 논(論佛家之各樣儀式)〉의 두 항목에 집중되어 있다. 만해의 조선불교유신론은 지금도 빛을 잃지 않고 대중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3·1운동을 주도했던 만해는 강직했다. 최남선 등 친일 변절자들을 면전에서 꾸짖고, 옥살이 중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감방 내 독립운동 동지들에게 똥물 세례를 퍼부었다는 일화는 아직 우리의 귓전에 울리는 듯하다.
만해는 강인한 성품의 소유자였으나 그의 시는 한없이 부드럽고 간절하다 못해 애절하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어느날 만해는 오세암 오르는 길에 수행 중인 무연 스님과 등휴 스님을 만났다. 오세암 무연 스님은 만해의 시가 힘을 갖는 것은 올곧았던 그의 삶이 시를 뒷받침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풀이했다.
오세 동자승 같은 맑은 눈매의 등휴 스님은, 참된 '나'는 내 속에 있으므로 찾기만 하면 된다. 없는 것을 찾는 것이 아니므로 찾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짧지만 명료한 법문을 우리에게 선사해 주신 선지식이 아닐 수 없다.
친일한 육당 최남선이 만해 한용운과 가까운 사이임을 스스로 떠들고 돌아다니자, 한용운은 죽지도 않은 최남선의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소문을 듣고 최남선이 깜짝 놀라 찾아왔다.
"선생님, 접니다. 육당이 왔습니다."
"육당이 누구요?"
"아니? 선생님, 이 육당을 잊어버리셨습니까?"
"내가 알던 육당은 벌써 뒈져서 장례를 치렀소.“
한용훈의 냉대에 최남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갔다고 한다.
그럼, 친일도 우리의 역사요 사람 사는 인문이니, 그 속에 담긴 솔직한 진실을 한번 들어보자. 육당 최남선이 찬한 설악의 진실은 무엇일까?
“탄탄히 짜인 맛은 금강산이 더 낫다고 하겠지만 너그러이 펴인 맛은 설악산이 도리어 낫다. 금강산은 너무 드러나서 길가에서 술 파는 색시같이 아무나 손잡게 된 한탄스러움이 있음에 견주어 설악산은 절세의 미인이 골짜기 속에 있으되, 고운 모습으로 물속의 고기를 놀라게 하는 듯이 있어서 참으로 산수풍경의 지극한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이라면 금강산이 아니라 설악산에서 그 구하는 바를 비로소 만족할 것이다.
수렴동이란 것이 금강산· 설악산 다 있지만, 금강산의 수렴은 오막살이집 쪽들 집 창에 친 발쯤 된다 하면 설악의 수렴은 경회루 넓은 일면을 가린 큰 발이라 할 것이다. 이밖에 옥련을 널어 세운 듯한 봉정과 석순을 둘러친 듯한 오세와 같이 봉만과 동학의 유달리 기이한 것도 이루 손을 꼽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설악의 경치를 낱낱이 세어보면 그 기장함이 결코 금강의 아래 둘 것이 아니었다는, 워낙 이름 높은 금강산에 밀려서 세상에 알려지기는 금강산의 몇천 분에 일도 되지 못함은, 아는 이로 보면 도리어 우스운 일이다.”
필자가 설악의 백담사를 처음 찾았을 때가 1973년 늦가을 해거름 녘이었다.
그때 백담사에는 노스님 한 분과 갓 군을 제대한 젊은 스님, 두 분이 백담사를 지키고 계셨다. 스님에게 받은 저녁 공양 바루에는 잡곡밥 한 줌과 소금에 절인 짠지뿐이었다. 당시 절집이나 속세 모두 어려운 시절이라 진수성찬이 아닐 수 없었다. 황태마을 용대리에서 백담사까지 두 시간 걸어서 허기가 졌고, 저녁 공양은 꿀맛이었다.
백담사 절집 옆에 박 씨란 땅꾼이 살았던 것을 기억한다. 뒤늦게 합류한 땅꾼 박씨는 젊은 시절 설악산에서 유명한 포수였다고 자신의 과거 사냥 담을 밤새 늘어놓았다.
남한 제일의 명산 설악이 품은 대표적 사찰 백담사의 또 다른 암자인 봉정암은 백담사百潭寺에서 수렴동 계곡을 타고 백 개의 담百潭을 지나 해탈의 고개에 올라 높고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뒤로는 소청· 중청· 대청을 등지고 용아장성과 만경대를 거느리며 사자후를 토하듯 내다보고 있는 곳에 자장율사가 644년 부처님의 진신사리(불뇌사리보탑)를 모셨다.
한반도의 불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에서 '기도발'이 가장 잘 받는 적멸보궁이라고 입을 모은다. 이유는 1,244m의 기암 용아장성 바위를 뚫고 솟은 불뇌사리보탑에 있다고 하지만, 필자가 해마다 봉정암은 올라 보고 얻은 결론은 불심으로 오르는 곳이지 다리심으로 오르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체투지에 버금가는 불심이 있어야 오를 수 있으니, 기도발이 안 받을 수 없지 않은가.
어느 해 한겨울, 무릎까지 빠지는 적설. 고무신을 새끼줄로 감싼 노보살이 공양미를 이고 나무 지팡이 하나에 의지해 봉정암을 오르는 것을 보고 내린 결론이다.
적멸보궁 봉정암 원주실에 걸린 현판이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는다.
去者不追거자불추 來者不拒내자불거
“가는 사람 붙들지 말고 오는 사람은 막지 않는다”
'go man go, is man is'
절집뿐만 아니고 맹자 ·공자 술이편에 나오는 문구다.
세상을 얼어붙게 할 듯 춥고 캄캄한 한겨울 밤, 촛불 아래 흩어지는 복사꽃 꽃잎처럼 백발의 노보살이 밤새워 참회하는 염불 백팔대참회문 소리는 낭랑하다.
대자대비로 중생들을 어여삐보사
대희대사 베푸시어 제도하시고
수승하온 지혜덕상 장엄하시니 저희들이 정성다해 절합니다.
지극한마음으로 금강상사에게 절합니다.
지극한마음으로 부처님과 법과 스님께 귀의합니나.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다하고 중생업이 다 하고 번뇌다함은 넓고 크고 가이없고 한량없으니 저희들의 회향도 이뤄지이다.
노보살의 백팔대참회 기도는 108배를 시작으로 날이 새니 3천 배, 하루 24시간이 지나 일만 배로 이어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