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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등대이야기 연재> 3. 2-2)바다의 둥지/조경호

작성일 : 2025.03.11 11:40 수정일 : 2025.03.11 11:44

2) 바다의 둥지

 

소청도는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으로 학계에서는 추정하고 있다. 동서의 길이가 약 9Km, 남북의 너비는 들쭉날쭉하지만 약 2Km 정도의 폭으로 가로 누워 웅크린 누에의 형태이다. 그리고 등대가 있는 앞 바다는 우리나라 5대 어장 중의 한 곳으로 우리나라 바다의 보물 창고 같은 곳이다. 일반적으로 소청도, 대청도, 백령도 부근 해역은 까나리, 홍어, 조기, 우럭이 많이 나는 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곳은 NNL 경계선이 있는 군사 통제선 상에 있다. 이러한 군사분계선만 아니라면 이곳은 우리나라 최고의 어장이 되어 어선들로 북적였을 것이다.

소청도는 경기만으로 들어와 산란하고 돌아가는 회귀성 어류들의 회유하는 기점이기 때문이다. 특히 연평도 부근에서 산란을 한 조기가 소청도 등대 앞 바다에서 회유한다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많다. 조기가 인도네시아 열대 바다에서 우리나라 서해 바다로 들어와 연평도 근해에서 산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회귀성 어류인 조기가 우리나라 서해안으로 들어오는 길은 알았으나 다시 회유하여 돌아가는 길은 알 수 없다고 한다.

소청도 등대 앞 바다에서 내가 낚시질하여 잡은 조기를 보면 수조기(수컷 조기)가 많다.

그리고 황조기(암컷 조기)도 알을 품지 않은 것을 보면 이곳을 거쳐 다시 열대 바다로 내려가는 것이 아닌가 한다.

 

셋째 아이가 2004년에 중국 절강성에 간 적이 있는데 항주시 어시장을 가보니 그곳에서 조기를 황어(중국에서 조기가 황색 빛을 띈다고 해서 황어라 한다)라 부른다고 했다. 중국 사람들도 조기를 아주 선호하는 어류이며, 값도 다른 어류에 비해 비싼 편이다.

그래서 이 조기를 어디서 잡느냐고 물어보니 항주 바다라고 했다. 그리고 한국인 식당에서 조기 매운탕을 먹었는데 조기의 씨알을 상당히 굵었는데 알이 없었다는 것이다. 맛은 우리나라에서 먹는 조기 맛이었는데 육질은 탄력성이 떨어져 물렁거렸다고 한다. 그리고 염장하여 말린 조기도 보았는데 이곳에서는 조기를 등 쪽에서 갈라서 창자 등을 빼내고 양쪽을 펴서 말린 것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말린 조기의 형태가 납작하고 원형이었는데 찐 것을 먹어 보니 맛은 우리나라 굴비 맛과 같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나라 굴비보다는 더 크다고 하는 말을 들어보면, 조기가 회귀 하는 연평도 근해에서 산란하고 소청도를 거쳐 중국 연안으로 회귀하는 것 같았다.

 

1950년대 소청 앞바다는 고등어와 아지의 어장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물범들이 백령도 두무진에서만 볼수 있지만 1950대에는 소청도 등대 해안선까지 내려왔다. 등대 앞에는 붉은 암 적색의 암벽이 바다 밑에서 속아 50m나 되는 등성이를 이루고 등대가 세워진 암벽과 붙어 있엇다. 등대가 세워진 곳은 해수면에서 83m나 된다. 등대 앞에는 암벽과 암벽 밑으로 수많은 암초들이 군집되어 있다. 이곳의 해류는 아주 세고 빠르게 흐른다. 이곳이 1950년에는 소청도 물범들이 놀던 곳이었다.

 

소청도 동네사람들은 등대 앞 붉은 암벽을 당한리 코빼기라 불렀다. ’코빼기라는 말은 그대로 암벽 형태가 코빼기 같은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고 당한리라 하는 것은 등대 밑의 은 굴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은광석이 나오는 굴은 채굴로 형성되었으며, 아마 채굴은 고려 말엽쯤으로 생각된다. 굴의 끝은 바닷속으로 들어가 그 끝을 알수가 없다. 바닷물이 솟아나자 은광석의 채굴을 그만둔 것일 거다. 은광석의 채굴이 고려말 쯤으로 생각되는 것은 대청도와 소청도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살았던 시기와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이다. 소청도는 고려말까지 소암도(小岩島 : 암초와 해안선이 대부분 암벽으로 절벽을 이룬 섬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라 하였고 대청도와 소청도에 사람이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도경에 대청서(大靑嶼)는 멀리서 보면 울창한 것이 마치

눈썹을 그리는 푸른 먹과 같다고 하여 고려인들이 붙인 이름이다.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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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1051pixel, 세로 503pixel

소청도 등대 앞 암초에 서식하는 물범

 

또는 암도(岩島)라 한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이곳에 사람들이 왕래하였다는 뜻이고 사람이 살았기에 고려 충숙왕 5(1318)에는 원나라 발라 태자(浡喇太子)가 대청도로 귀양 왔다가 송환했다는 기록이 동국여지승람에 보인다. 또한 충숙왕 17년에는 도우첩목아(陶于帖木兒)를 대청도로 귀양 보냈다가 2년 후(1332) 소환했다는 기록이 있다.

섬에 주민들이 없다면 태자를 귀양지로 보냈는가그러나 소청도와 대청도에 사람들이 들어와 살게 된 것은 고려의 수도가 개경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조에는 수도가 한양으로 결정되면서 대청도와 소청도는 수도와는 자연히 멀어져 사람이 많이 사는 도시 위성의 섬으로서 기능이 떨어졌을 것이다. 조선 초기에는 해적들이 섬 주민들을 약탈하니 피해가 많아 주민들을 철수시켜야 한다는 장계도 있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쯤에 들어와 두 섬에 사람이 살지 않아 문제가 제기된다. 타국 사람들이 이 섬에 들어와 살게 된다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책적으로 주민을 이주시켜야 한다는 장계도 있었다.

 

정조 17(1793)에 대청도와 소청도에 주민들의 입도와 경작이 허락되고 정조 23(1799)에 두 섬을 수원부로 편입시켜 각각 진(군사를 주둔 시킨 진)을 설치한다.

또한 소청도에 고려 말까지는 주민들이 많이 살았다는 증거는 부처를 모신 당이 잇었기 때문이다. 소청도의 큰 선착장에서 보면 둥근 원형의 만()끝 남쪽에서 서쪽으로 길쭉하게 돌출된 암벽이 나온다. 마치 성벽의 치 모양으로 돌출된 곳이다. 소청도 작은 동네 노화동(갈대꽃 동네라는 뜻)에서 70m 정도 오르면 넓은 들이 나오는데 이 들판을 아나루(’는 끝 또는 가장자리, ’나루는 뱃터를 이르는 말)라고 한다. 아나루북쪽 끝의 암벽이 길게 돌출하여 나온 곳이 바로 큰 선착장에서 보이는 암벽이 돌출된 곳이다. 여기에 고려시대에는 부처의 당집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곳에는 당집 자리 흔적이 있으며, 주추돌과 가왓장이 나온다. 그런 이야기를 유추해 보면 등대가 세워진 암벽 자리에 당집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은광석을 등대 바로 아래에서 채굴하여 뭍으로 실어 나르려면 은광석을 실은 배는 바로 은광석 채굴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하고 은광석을 실어 나르는 배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서는 당집도 은광 채굴터에서 가장 가깝고 바다가 잘 들어나 보이는 높은 곳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당한리라는 말 역시 이 등대의 터에 당집이 있었다는 근거가 아니겠는가. ’은 당집에서 나온 말일 것이고 은 크다는 뜻이며, ’는 터라는 뜻이다. 그리고 고려말 당시 대청도에는 중국 원나라 마지막 황제 순제(토곤타므르/13201370/ 재위기간 13331370)가 귀양 와 있을 때 소청도 분바위에 와서 주악(酒樂)을 즐겼다는 기록도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고려 말에는 소청도에 주민이 살았다는 근거가 된다. 그러나 조선조 초부터 중기까지는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였다가 정조 때부터 다시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는 기록(택리지)이 있다.

그럼 왜 뭍(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오지의 낙도에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았을까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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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331pixel, 세로 217pixel

대청군도 지도

 

물론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필수적인 자연조건이 갖추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곳은 식수가 나고 해산물이 풍부하다. 소청도 바다 밑은 많은 암초가 있고 이 암초는 물고기들의 안식처를 제공한다. 바다 밑에는 숲을 이루고 있는 미역과 톳, 우무가사리 등은 전복의 좋은 먹이고, 물고기들의 산란처이다. 그리고 암초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손바닥 크기의 홍합은 꺽주기의 산란처다.

 

꺽주기라는 고기는 크기가 35Cm 정도이고 생김새가 험상궂다. 등쪽은 황갈색이고 배쪽은 밝은 노란색이다. 우리나라 해안가 부두 선술집이면 겨울철에 매운탕 안주로 으레 등장하는 물고기이다. 학명은 조기강 쏨뱅이목 삼세기과의 어종이다. 분포지역은 한국 연안, 일본 북부, 오호츠크해, 베링해 등 북서 태평양에서 사는 한류성 어류이다.

 

삼세기는 우리나라 연안 어디에서나 사는 토종 물고기로 지방마다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 포항에서는 수베기강화도에서는 꺽지전라도에서는 삼식이경기도에서는 꺽주기강원도에서는 삼수기충청도에서는 꺽쟁이경남에서는 탱수라 부른다. 그리고 못생기고 바보 같다는 뜻의 전라도 말의 삼식이는 이 물고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삼세기는 겨울철에 얕은 물가로 올라와 산란하는데 소청도에서는 10월 중순부터 11월 초까지이다.

 

소청도에서는 약 2주일 동안만 이 물고기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근거리에 있는 대청도에서는 이 물고기를 볼 수가 없다고 한다. 10월 중순에서 11월 초까지는 소청도 등대 앞 해안에는 온통 삼세기 밭이다. 마치 서해안의 삼세기가 다 몰려든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물 반 고기 반이 아니라 전부가 삼세기 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 밑 암초에는 삼세기가 붙어 있다. 삼세기는 홍합과 홍합 사이에 산란하는 알을 접착시키려 암초에 빽빽하게 붙어 있다. 그런데 물속에서는 삼세기 등 껍질 색이 홍합과 구별이 잘되지 않는다. 이 시기가 되면 소청도 예동(큰 동네), 노화동(작은 동네) 사람들이 등대 밑 바다의 암초 위에 서너명씩 웅크리고 앉아 있다. 꺽주기를 잡기 위해서다. 이곳 사람들은 삼세기를 꺽주기라 부른다. 그들은 이 꺽주기를 갈고리로 찍어서 잡아 배를 갈라 말리고 창자는 백숙탕으로 먹고 알은 소금에 절여 젓갈을 담는다.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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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761pixel, 세로 291pixel

삼세기(꺽주기) 모습

 

꺽주기 알로 담근 젓갈은 대청도 주민들과 쌀로 바꾸어 먹는다. 소청도는 벼농사를 지을 땅이 없으며, 대청도는 벼농사를 짓고 있다. 그리고 꺽주기를 맨손으로 잡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은 차가운 바닷물 속으로 들어가 꺽주기를 한 손으로 움켜 지어 한 번에 세마리씩 잡아 던진다. 손가락 사이 사이에 꺽주기를 끼어서 움켜잡는 방식이었으며, 그는 세마리씩 잡은 꺽주기를 몽돌 해변으로 집어 던졌다.

 

 

우리 식구는 첫 부임지였던 소청도에서는 6·25 전쟁 중에는 말린 꺽주기로 연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뿐만이 아니라 소청도 등대 직원들의 식구들도 모두가 그랬다. 마른고기를 찌면 꽉-하고 쏘는 탁하고 비릿한 냄새, 지금도 그 냄새는 내 곁에서 떠나질 않는다. 등대의 등탑 위로 지나가는 쌕쌕이(6·25 전쟁 당시는 전투기를 그렇게 불렀다) 소리와 관사 부엌에서 나는 꺽주기의 냄새 이것이 그 아득하게 멀어진 1950년대 초의 소청도에서 기억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