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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록<등대이야기 연재> 1.하얀 탑과 두 개의 노을/조경호

작성일 : 2025.02.28 01:59

하얀 탑과 두 개의 노을

海星堂 조경호

 

인천 소청도등대장으로 퇴임한 해성당 고 조경호 선생의 37년간 등대의 등불을 점등해 뱃길을 열었던 등대원 시절을 회고한 기록을 연재합니다.

 

차례

사선을 넘어서

하얀 탑과 두 개의 노울

파라다이스의 고독

바다에서 일어나는 신기루

바다의 진주

 

사선을 넘어서

 

청코너 플라이급 오십 점 , 킬로 그램므 인천 권투 구락부 - !”

우로, 우로 돌아 - !”

세칸 코치를 보면 쌥쌥이 녀석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몸이 말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2라운드 끝나는 종이 울렸다.

살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도 내 입에서 헉헉거리는 뜨거운 숨소리가 연신 쏟아졌다. 흐르는 땀에 모깃불처럼 맵고 숨쉬기조차 곤란했다. 마우스피스를 집어던졌다.

불 산지옥에서 거대한 바위를 밀어 올리는 희랍의 시지피스의 숨소리가 이러했을까 지옥과 현실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목도 마르고 천정의 불빛이 빙빙 거렸다. 헉헉거리는 숨소리는 청코너에 돌아와서도 계속되었다. 상대는 나보다 훨씬 강했다. 레프트 쨉으로 견제하며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날려도 허리를 연신 오뚝이처럼 놀리며 잘도 피했다. 상대는 후드-웍이 좋았다. 허리를 좌우로 흔들고 목도 앞뒤 좌우로 씰룩거리며 잘 피했다. 그리고는 나의 옆구리를 치고 들어왔다. 그래서 내 가드가 자꾸 내려갔다. 그는 힘이 좋고 경험 많은 인파이터였다. 앞으로 2회전이 더 남아 있었다. 경기하기가 싫어졌다. 그러나 프로 데뷔 전이고 인천 권투 구락부 플라이급 대표로 나와서 경기를 지고 있다는 명예, 인천 친구들, 그리고 나에게 시집와서 몇 개월 안 된 임신중인 아내, 연로하신 아부지와 엄니도 뇌리에 어련 거렸다.

3회전을 알리는 신호가 들려왔다. 홍코너 녀석은 의자에 벌떡 일어났다.

관장님, 저 이 시합 ····, 여기서 그만 두겠어요

상대는 너보다 더해, 니 지금 죽을 것 같지. 재는 사망 일보 직전이야, , 괜찮아, 참아. 재 좀 봐라 벌써 눈탱이가 밤태이 된 것 같지 않니

그러나 상대는 말짱했다. 그리고 소금물로 가글 거리면서도 연신 나를 노려보았던 녀석이다.

경호야 3회전은 쨉만 날리고 빙빙돌아. 알았어 -! 그렇게 쉬다가 4회전에 승부를 걸자, 알지 - !“

쌥쌥이 녀석은 보통학교 동창인데 체육관에서 다시 만나 내 스파링 상대였다. 이 녀석에게 인마그럼 니가 해 면박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말할 기운도 없었다.

선배, 저 좀만 한 시-, 별거 아니 것 같은데, 붙으면 그냥 훅을 날리면서 팔꿈치로 턱주가리를 먹여요

오늘따라 후배인 짝귀까지, 얄밉게 왜 이러나 ····, 난 상대가 어떻게 나오던 경기에서 그런 비겁한 짓을 하지 않았다. 관장은 그런 방법은 가르쳐 주지도 않았지만 권투도 인격의 수련이라 생각하는 분이었다.

머리가 지근지근 아파오고 코피가 흘렀다.

청코너 어서 나와

나비넥타이를 한 심판이 링 중앙에서 나를 보고 손짓한다. 그 자식이 그렇게 미웠다. 안 나가려고 링 로프를 잡고 버티고 있었는데 ····,

그런데 어느 자식인지 내 등을 떠밀쳤다. 그놈이 누구인가 보려고 했지만 엄겁결에 링으로 나온 나에게 상대가 급하게 다가왔다. 그래서 심판보다 더 얄미운 그놈을 확인하지 못했다. 그 순간이었다. ‘했다 상대의 라이트 훅이 내 왼쪽 옆구리에 꽂혔다.

 

-!

비명을 지르며 내 의식이 돌아왔다. 꿈이었다.

군사훈련 중에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면서부터 의식을 잃으면, 지난 19495월달에 경성 프로 복싱 체급별 챔피온 예선전, 시합하던 상황이 영화처럼 계속 재연되었다. 17세부터 했던 프로 권투는 194911월 인천 항로표지관리소 창고직으로 입사하면서 그만두고 195018일 고원 28(표지선 선원)으로 정식 공무원으로 발령되었기 때문에 마음을 굳혔다. 배가 덜 고팠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1950625일 새벽 북괴군의 침범으로 한국 전쟁이 떠졌다. 가족을 고향인 충남 태안군(당시는 서산군) 원북면 이곡리 큰 누님 집으로 피난시키고 19513월 중순 쯤 부산 해운국을 찾아갔다. 그때 부산 해운국 공고판에 게시물이 있었다. 195132일자였다. 195131일까지 미등록한 교통부 해운국 직원들은 조국 수복 후 서울 교통부 해운국이나 각 지방 항로표지관리소에 재 이력서를 제출할 것이었다. 그리고 나의 봉급은 누군가가 타 타 먹었다. 그래서 나는 부산 지방에서 제2국민병으로 군사훈련을 받던 중이었다. 복통과 뜨거운 열로 갑자기 쓰러졌다.

나의 병명은 장티푸스로 인한 이질과 장출혈 이었다.

조장정 입원한지 몇일 짼가

“19일쨉니다

가망이 없어 귀가 조치시켜

난 담당 군의관과 간호우넝의 대화를 더 자세히 들으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지러웠다. 침대 파이프를 대를 잡고 겨우 일으선 내가 비척거릴 때마다 병동안의 때 묻은 흰 벽이 흔들거렸다.

병명으로 인해 귀가 조치한다는 병원장의 퇴원 증명서 한 장과 군용 담요 한 장, 미제 아스피린 스무알을 받고 부산에서 인천으로 발길을 옮겼다. 이때가 19516월 달이었다. 전선은 중공군을 격퇴시키면서 3.8선 근처에서 치열하게 격전 중인 때였다.

나와 동갑인 아내, 두 살 된 큰 녀석과 태어난 지 3개월 된 작은 녀석, 14살인 여동생, 아부지와 엄니가 피난처에서 돌아와 있을것이라 생각되는 인천 숭의동 집으로 내 발길은 향하고 있었다.

병원에서 준 아스피린을 먹으면서 고열을 견디며 걸었다. 그러나 인천까지 갈 숙박비와 식비가 없었다. 언제 어떻게 될 운명인지는 모르지만 이미 한번은 결정되었던 몸이었다. 그래서 살 가망이 없다고 진단되었기에 귀가조치가 취해지는 것이아닌가.

난 역시 집에 도착해서 죽고 싶었다. 그러나 인천까지 어떻게 가야 하나 했다. 며칠이 걸릴지 모른다. 귀가 중에 나 같은 포병객을 받아줄 민가는 없을 것 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산속은 더 위험했다. 이미 남쪽은 빨치산이 조직화 되어서 산에 숨어 있는 상태였다. 다행인 것은 6월이라 나무 아래서 유숙할 수는 있엇다. 비 오는 날이 두려웠다.

 

귀가 조치한다는 군병원장의 증명서로 부산에서 대전까지 기차를 타고 왔다. 대전 위쪽은 아직 철로의 안전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운행이 안 되었다. 대전에서 부터는 걸어야 했다. 기운이 없어 걸어갈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검은색으로 U·S라고 찍힌 국방색 군용 담요를 팔았다. 그리고 쉰내가 나고 검은 곰팡이가 선 기와 조각 같은 딱딱한 떡으로 사흘을 견디며 수원까지 왔다. 그런데 이 돌같이 딱딱하고 손바닥만한 팥고물 시루떡은 사연이 있다.

 

시루떡은 사흘 전 대전에서 주울 때부터 팥고물은 다 떨어져 나가고 검은 곰팡이가 핀 것이었다. 대전역 광장에서 네거리의 골목으로 접어드는데 뻐쩍 마른 누릉이가 무엇을 물고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작은 검은 개가 누렁이를 따라 가고 있었다. 누렁이는 골목 담장 밑에서 입에 문 것을 놓고 킁킁거렸다. 그 때 검둥이가 그것을 잽싸게 물고 달렸다. 그러자 누렁이가 쫓아가서 검둥이를 물어 버렸다. 두 개가 싸우다가 작은 검은 개는 줄행랑을 치고 누렁이는 다시 그것을 물고 삼키려고 했다. 그런데 목에서 안 넘어가는 모양이었다. ‘’ - 하며 뱉아버리고 누렁이도 사라졌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가 궁금했다. 가보니 손바닥 만한 시루떡이었다. 나는 망설였다. 그리고 배가 고팠다. 배가 고프다 못하면 아프다. 나는 개도 먹지 않고 버린 것을 하며····“ 돌아서려고 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충남 땅에서 인천으로 이사를 와 떡 장사를 한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없으니 지금도 떡 장사를 할 것이 생각했다. 집어들었다. 그랬더니 개가 뱉아 놓은 이유를 알 것 같다. 기와 조각 같았다. 하고 팽개쳤다. 던진다는 것이 힘이 없어 바로 내 앞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또르르 굴렀다. 그러더니 우물가에서 팽이처럼 쓰러졌다. 나는 우물로 가서 두레박으로 물을 겨우 퍼서 물을 마셨다. 그리고 나니까 그 떡이 다시 보였다. 아쉬움도 있었다. 떡을 주어서 물에 씻었다. 개의 침을 씻는다고 씻었다. 그렇게 윗도리 호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던 것이었다. 그랬더니 하루가 지나자 물에 씻은 덕분인지 딱딱한 기운이 좀 덜했다. 팥고물은 다 떨어져 나가고 겉표면에 검게 핀 곰파이가 쉰 냄새를 피웠다. 그러나 병원에서는 링거 덕분에 살 수 있었지만 이제는 힘이 없어 걸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조금씩 그 시루떡과 사투를 하면서 씹기 시작했다. 기운이 없으면 눈물도 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울고는 있는데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떡 덕분에 내가 살아야 한다는 이유도 알게 되었다. 왜 살아야 하는지 뚜렸해졌다. 다 죽어 가는 병자도 뚜렸한 목적이 있으면 삶의 의지가 생긴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권투경기는 죽는 것도 아니었는데 힘들다고 기권을 했다. 그때는 단순히 시합만 치룬다는 목적뿐이었다. 그래서 상대가 나보다 강해 싸울 의욕이 없었다. 지면 창피할 뿐이고 그동안 쌓았던 명예가 빛을 잃으면 그뿐이다. 그러나 작은 고통 때문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결과는 내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제 다시 내 목숨을 이어준다면 최선을 다하며 살리라. 그리고 지금 여기서 내가 죽으면 아내, 자식, 부모님, 여동생의 인생을 망쳐 놓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죽기 위해 집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집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원역에서 헌병들이 찝차와 군용 트럭을 대 놓고 젊은 사내들을 모두 검색하고 있었다. 그들은 군 탈영자와 군 기피자를 색출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 옆을 지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보고도 부르지도 않았다. 그래서 이발소 앞을 지나가다가 열린 문틈으로 벽에 걸린 거울을 보여 내 모습을 보았다.

-, 송장 -! 눈이 횡 하고 새까만 거죽만이 뼈대에 붙어 있는 해골이 나를 보고 있었다. 그 거울에 비쳐진 해골이 나였다. 머리와 수염은 봉두난발이었다. 그들이 왜 나를 붙잡지 않았는지 알았다. 나는 저승사자의 부축을 받으면서 저승으로 끌려가는 송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먼저 이발부터 했다. 집으로 가기까지는 구걸도 해야 하고 남의 집에서 기숙도 해야 한다. 이런 몰골로는 안되겠다 싶어서였다.

 

겨우겨우 걸어서 인천 숭의동 집에 다달았다. 병들어 다 죽어가는 몸으로 문을 열고 들어섰다. 부산을 떠난지 7일만 이었다. 내가 다시 집으로 들어서자 모두 깜짝 놀라는 눈치다. 예상치 않았던 나를 보자 식구들은 한동안 말을 못하고 그저 멍했다.

열린 방안에서 아버지는 다리 정강이에 붕대가 감긴 채 겨우 몸을 일으켜 앉으시고 어머니는 달려와 내 가슴을 치며 울었다. 아내는 2살된 작은 아이를 업고 나를 뻔히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네 살된 큰 녀석은 아내의 다리를 잡고 무서운지 꽁무니를 빼고 있다. 식구들 모두 굶고 있었던 것을 알수 있었다. 눈이 횡- 하니 검은 피골이 나와 진배없었다. 나는 댓돌을 딛고 마루로 올라와 그대로 쓰러졌다.

 

얼마 만에 정신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아내가 내 옆에서 기도하고 있었다. 내 기억에는 아내의 이런 기도문도 있었다. ‘ 이 분이 일어나 다시 살 수 있다면 평생 싸우지 않고 알콩달콩 살겠다고 했던 말그래서 나도 그땐 정말 다시 살아난다면 싸우지 않고 알콩달콩하게 살겠다고 했다. 그러나 살고 보니 평생을 싸우면서 살아왔다. 지금 86세 동갑내기 우리 부부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싸우고 있다. 아직도 살아 있다고 하늘에 감사하다는 기도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도 아내의 정성은 변함이 없다.

그때 아내의 정성 어린 간호 덕분에 살아났다. 집에 온지 7달만에 일어 났다고들 했다.

 

19522월 말경에 누어있던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다.

나는 인천 항로표지관리소를 찾아갔다. 하인천역에서 월미도로 접어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적산가옥인 인천 항로표지관리소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항로표지관리소의 아주 커다란 창고가 딸려있었다. 내가 근무하였던 곳이다. 195132일자 부산 해운국의 공고대로 다시 인천 항로표지관리소에 이력서를 재출 했다. 인천 항로표지관리소에서는 3월 중순쯤에 다시 나오라고 했다.

 

1952318일 인천 항로표지관리소 표지선 군성호를 탔다. 인천 항로표지관리소에서 관리하는 유인등대(팔미도, 부도, 옹도, 격렬비도, 선미도, 목덕도, 소청도)를 견학하기 위해서이다. 당시는 등대에 근무하려는 등대원이 부족하여 원하는 등대를 선택하면 등대원으로 근무하도록 하였다.

군성호는 일제강점기에 건조하여 항로표지관리소 관내 무인등대 점검 순시와 유인등대 등대원 및 보급품을 수송하는 항로표지 관리선이며, 목선으로 발동선이었다.

군성호에 몸을 실었다. 연안부두(현재의 인천역 부근)에 출항하여 폐허 된 소월미도 등대(190361일 건립 석조 원형 무인등대)를 거쳐 인천항의 관문인 팔미도 등대(190361일 건립 혼용토조 원형 유인등대)에 들렸다. 그다음은 영흥도와 무의도 사이 물골에 있는 북장자서 등표(190361일 건립)와 백암 등표(190361일 건립), 승봉도 옆에 있는 부도등대(19044월 건립 석조 원형 유인등대), 덕적도 북단에 선미도 등대(1934년 건립 콘크리트조 원형 유인등대), 황해도 해주항의 관문인 연평도 등대(무인등대), 우리나라 최북단 소청도등대(19071217일 건립 콘크리트조 원형 유인등대),를 거쳐 선수를 남쪽으로 돌려 덕적도 서쪽의 목덕도 등대(19091215일 건립 콘크리트조 원형 유인등대), 충남 태안 반도 앞바다 가의도 서남쪽 옹도등대(19071월 건립 콘크리트조 팔각형 유인등대) 우리나라 최서단 격렬비도등대(190961일 건립 하부 철조 육각형 유인등대)를 전부 들러봤다. 유인등대를 가면서 부근의 안도 등대 (1911년 건립 철조) 등 무인 등대도 들러 점검정비 업무를 하였다.

 

그런데 소청도 등대에 들렸을 때의 일이었다. 키가 후리후리하고 삐쩍마른 29세의 노총각인 황여중씨가 나에게 조용히 말을 걸어 왔다. ” 조형, 소청도로 오시오. 이곳이 최전방인 것 같지만 인천관할 등대치고 전선이 아닌 곳이 어디 있겠소, 조금 더 북쪽이면 어떻소

그리고 지금처럼 전시에는 무인도에 있는 유인등대 보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섬의 유인등대가 낫다는 것이었다. 소청도에서 마을을 형성하여 살고 있는 주민은 조선시대 정조때 이주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6.25 한국 전쟁 당시 피난 온 피난민이 부락 (예동, 노화동)을 이룬 섬이다.

 

황여중씨는 개성사람이다. 서울 경성제대 출신이고 토목기사였다. 북한군이 인천을 점령하자 송도중학교 교감으로 임명되었으나 생리적으로 공산주의 사상이 맞지 않앗다고 한다. 그래서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있을 당시 남으로 도피했다가 인천이 수복되자 개성으로 들어가고자 인천으로 왔다고 한다. 그러나 개성은 수복되지 않고 전선이 시간을 끌자 군 입대를 보류할 수 있는 등대원이 되기로 했던 사람이다. 그는 1951년 항로표지 요원양성소 4기생으로 졸업하고 소청도 등대로 발령받았다.

하지만 나는 소청도를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것은 항로표지 요원 3기생인 나상용씨 때문이다. 당시 그는 소청도 등대 등대장이었다. 그가 나의 둘째 매부였기 때문이다. 보성전문대를 나오고 경험과 지식이 많은 식자였는데 나와는 나이 차가 많아 이것 저것 간섭을 많이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낯선 곳에서는 아는 사람이 있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했다. 그리고 내가 본 소청도 등대는 천하절경이었다. 또한 황여중씨가 아주 호의적으로 대해 준 것이 소청도 등대를 첫 부임지로 택하게 된 이유였다.

 

전선은 개성을 탈환하려고 국군과 유엔군이 파주에서 접전을 벌리고 있을 때 였다. 나는 바다의 최전방 소청도로 아내와 어린 아들 두 녀석을 데리고 부임하였다. 소청도 더 북쪽으로 대청도, 백령도가 있다. 그 섬에서 함께 살았던 주민들은 6.25 전쟁이 발발하였으나 피난을 가지 않고 섬을 지킨 관계로 지금의 NNL(북방한계선, Northern Limit Line), NLL1953 830, 당시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마크 클라크가 설정한 경계선으로, 대한민국과 북한의 서해 및 동해 접경 지점의 한계선이며, 해상경계선이자 군사 분계선)으로 휴전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