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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수프 /재미로 보는 주역> 38.나그네 설움, 고향무정(故鄕無情)

작성일 : 2022.12.01 06:34

나그네 설움, 고향무정(故鄕無情)

/양선규

 

타관살이 안 해 본 자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이 눈물과 함께 빵을 먹어보지 못한 자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와 비슷한 무게감을 가지고 제게 다가온 것은 서른 살 즈음이었습니다. ‘눈물의 빵이 제 곁을 떠날 무렵 나그네의 설움이 제게 닥친 것입니다. 타관 땅에 직장을 얻어 무사히 정착하나 싶었는데 날이 갈수록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고향생각이 났습니다. ‘고향이라고 따옴표 속에 묶은 것은 그곳도 실은 제 고향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곳으로 그저 고향처럼 느껴지던 곳이었습니다. 결국은 몇 번 이사를 오고 가다가 아예 그곳으로 솔가해서 눌러 앉아 버렸습니다. 다행히 고향에 자리가 하나 나서 좌고우면하지 않고 얼른 직장을 옮겼습니다. 그렇게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나그네 설움은 많이 가셨지만 그 사이에 지불한 기회비용이 만만찮았습니다. 경제적으로도 학문적으로도 여타의 그 나머지 직장생활이나 사회생활에서도 중심부 진입을 하지 못하고 늘 아웃사이더로 살았습니다. 얻은 것도 있습니다. 덕택에 페이스북 글쓰기에 몰두해 책은 몇 권 가지게 되었습니다.

일전에 장소애(場所愛, topophilia)’에 관해 말씀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장소애에 사로잡혀 사는 이들은 어디에서 살든, 무엇을 쓰든, 결국 타관살이의 애틋함을 토로할 뿐이라고 했습니다. 어디서나 나그네 처지로 살아간다는 것은 낯설고 불안정한 일입니다. 언제나 서러운 감정을 예비하고 사는 일이지요. 고향 산천이 애틋한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러한 절절한 나그네의 설움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이곳저곳 타관살이에 익숙해져야만 했던 처지에서(정작 고향 산천이랄 것도 없는 형편입니다) 굳이 장소애에 사무치는 것은 또 무슨 까닭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나이 들수록 젊어서(어려서) 떠나온 곳들이 분별없는 짝사랑의 대상이 되곤 합니다. 아마도 말 못할 속병이라도 든 모양입니다.

 

나그네 처지도 사실은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같은 나그네라도 자신을 나그네로 인식하는 정도에 따라 그 처지가 많이 달라집니다. 스스로 나그네를 자처하고 지나가는 자의 역할에만 머무는 자에게는 그만큼 갈등의 소지가 줄어듭니다. 안팎으로 감정의 소비가 한결 적습니다. 이해(利害)를 함께 하는 자들과의 갈등도 한결 가볍습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의 나그네 신세를 부정하고 매번 주인의 자리를 넘보게 되면 항상 불화가 싹틉니다. 그런 역할 놀이에서의 게임룰은 크게는 한 나라의 대통령 선거에서부터 작게는 한 개인의 정체성 확정에까지 끈질기게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특히 우리처럼 지역 연고와 문화적인 전통을 중시하는 사회에서는 어디든 나그네/주인의 이분법이 엄존합니다. 그런 이분법의 세상에서 나그네와 주인의 자리가 바뀌는 일은 아주 드뭅니다. 주역에서도 그런 이분법을 사용하는군요. 주인되지 않은 자의 일거수일투족에서 흉()을 읽습니다.

 

....초육(初六)은 나그네가 자질구레하게 하니, 이는 재앙을 취하는 바이니라.

육이(六二)는 나그네가 머물 숙소에 들고 노자를 가지며, 어린 종의 바름을 갖추도다.

구삼(九三)은 나그네가 그 숙소를 불사르고 그 어린 종의 바름을 잃으니 위태하니라.

구사(九四)는 나그네가 처한 데에서 그 도끼를 얻으니 내 마음은 불쾌하도다.

육오(六五)는 꿩을 화살 한 대로 쏘았으나 없어졌느니라. 마침내 영예스러운 명을 받게 되리라.

상구(上九)는 새가 그 집을 태우니, 나그네가 먼저는 웃고 뒤에는 울부짖느니라. 소를 쉽게 잃으니 흉하니라. [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도서출판 길, 1999(2), 426~431]

 

주역 쉰여섯 번째 화산려’(火山旅), 여괘(旅卦)의 효사는 보시다시피 나그네에 관한 것입니다. 타관살이에서 지나치게 나서는 것을 경계합니다. 두어 번의 인정을 받기는 하나 종내는 울부짖을것이라고 처신에 조심할 것을 당부합니다. 사실 저에게는 이 당부 말씀이 아예 뼈에 새겨져 있습니다. 오늘 제 뼈에 새겨진 갑골문자를 주역에서 이렇게 만납니다. 고향이라 여기고 돌아왔지만, 이미 고향은 없었습니다. 그저 나그네 처지를 잊지 않고, 장소애를 함부로 남발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자중자애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한 번 흩어지면 다시는 모을 수 없는 것이 나그네로 타고난 자의 신세입니다.

 

()라는 것은 크게 흩어지는 것이니, 사물이 다 그 거하는 바를 잃는 때이다. 다 그 거처를 잃으면 사물이 기댈 바를 원하니 어찌 지혜 있는 자가 유위할 때가 아니리오?”(426)라고 경문의 해설에서는 때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이는 주인된 자들’, ‘군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이지 나그네에게 해당되는 말은 아닙니다. 나그네들은 그런 를 오해하지 말라는 것이 주역의 당부입니다. “타관살이 하는 몸으로 아래에 베푸는 도를 행하니 대권을 침탈하는 싹이 동하는 것이다. 주인이 의심하므로 숙소가 불타고 어린 종을 잃으며, 자신은 위태롭다.”(428)라고 구삼(九三)의 효사에서 경계합니다.

 

한 번씩 드는 생각입니다만, 나그네를 자처하며 살찌는 도망에 충실한 것이 꼭 올바른 생활일까라는 자책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근심을 덜고 집을 태우는재앙을 면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인생살이의 전부가 될 수는 없는 것이 남아로 태어난 자의 숙명이 아닌가라는 잡념도 종종 듭니다. 죽을 자리를 일부로 찾아들 수도 있고, 열 두 척으로 삼백 척을 향해 일자진을 펼칠 수도 있는 게 남아의 운명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특히 내 집을 태워서라도 후손들에게는 훨씬 더 좋은 새 집을 물려줘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 들 때면 더 마음이 흔들립니다. 오늘 아침이 특히 더 그렇습니다. 며칠 몸살기가 돌던 몸 상태가 맑은 햇살에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문득 두꺼비에게 헌집 줄 게 새집 다오.”를 본격적으로 한 번 빌어볼까라는 망상이 쳐들어옵니다. 분명 오래된 나그네의 망령입니다.

<소설가/ 대구교대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