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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2.11.26 10:54
다양성의 가치와 변화
/윤일현
만추의 산길을 걷는다. 꽃보다 고운 단풍에 취했다가 무심코 양지바른 비탈로 눈길을 돌린다. 잔디와 무수한 잡초들도 연하고 진한 갈색으로 바뀌고 있다.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푸르고 구름은 유유히 흘러간다. 문득 모든 초목이 다 빨갛게 물든다면 가을 풍경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상상의 문턱에서 이미 끔찍하다. 다행스럽게도 자연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계절의 순환에 순응하면서도 항상 서로 다른 모양과 빛깔을 유지해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고 있다. 붉고 노란 나뭇잎에 눈길이 머물다가 갈색의 잡초로 시선을 돌려본다. 그들 역시 다채로운 모양과 색상으로 대자연이란 화폭 한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다. 다름과 차이는 우주의 구성 원리이기도 하다.
식물학자 이나가키 히데히로의 ‘전략가, 잡초’에 나오는 몇 대목들을 다시 음미해 본다. 영국에서 밀밭을 조사했는데 1제곱미터당 7만5천 립의 잡초 씨앗이 땅속에 묻혀 있었다. 이렇게 많은 씨앗이 숨죽이고 땅속에 있으면서 발아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 잡초는 가소성이 크다. 살아남기 위해 바꿀 수 있는 것은 적극적으로 바꾼다는 말이다. 잡초는 스스로 환경을 바꿀 수 없다. 바꿀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뿐이다. 이게 잡초의 놀라운 생존 비결이다. 잡초에는 확고하게 변하지 않는 존재 이유가 있다. ‘꽃을 피워 씨앗을 남기는 것’이다. 이 목표를 위해 추호의 흔들림도 없다. 어떤 환경과 상황에서도 씨앗을 생산하려고 잡초는 크기, 생활 패턴, 자라는 방법까지도 바꾼다. 잡초는 조건이 나빠도 씨앗을 남기지만, 조건이 좋으면 더 많은 씨앗을 생산한다. 저자는 잡초를 이야기하며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우리 삶에는 바꿔도 좋은 것과 바꾸면 안 되는 것이 있다. 바꿔도 되는 것을 고집스럽게 붙잡는데 에너지를 낭비하기보다는 바꾸면 안 되는 것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저자는 말한다. “인간은 각자 지켜야 할 원칙 한두 가지만 가지면 된다. 다른 것들은 재깍재깍 타협하라.”
시선을 돌려 우리 정치판과 주말마다 벌어지는 보수·진보 집회를 바라본다. 여야 의원들과 거리로 뛰쳐나온 사람들은 단일대오와 한목소리를 좋아한다. 지도부의 방침과 지침에 어긋나는 말과 행동은 용납하지 않는다. 대열에서 이탈하거나 다른 목소리를 내면 배신자로 낙인찍혀 무수한 문자 폭탄과 욕설을 감수해야 한다. 모든 국회의원이 말로는 국가 안보와 경제발전, 국민의 행복이 그들의 존재 이유라고 말한다. 카메라와 대중 앞에서는 이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겠다고 외친다. 속마음은 다르다. 보스와 지도부에 충성해 공천받는 것이다. 그들에겐 국가가 처한 누란의 위기도 강 건너 불이다. 보수·진보 시민단체들 또한 순수하지 않다. 소속 집단과 패거리의 이익을 위해 아스팔트 위를 떠도는 낙엽처럼 생각 없이 우르르 몰려다닐 따름이다.
1840년대 아일랜드에서 갑자기 감자 역병이 유행했다. 기록적인 굶주림이 발생했다. 백만 여 명이 아사했다. 이백만 여 명이 나라를 등졌다. 수많은 사람이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들은 미국의 국가 기반 조성에 크게 기여했다. 현재 전체 미국인 중 4천만 여 명이 아일랜드계 후손이다. 아일랜드 대기근의 원인은 감자 때문이었다. 당시 아일랜드에서는 한 품종의 감자만 재배했다. 그 품종이 특정 병에 약하니 온 나라 감자가 치명상을 입게 됐고 결국은 모든 감자가 순식간에 멸종할 수밖에 없었다. 감자의 원산지 안데스에서는 다양한 품종이 재배되고 있었다. 한 품종이 병에 걸려도 모든 감자가 전멸할 위험은 없었다. 인간 사회도 마찬가지다. 여야 정당과 다양한 시민단체가 있는데 그들은 서로 다른 정강 정책을 가지고 다른 목표를 지향한다. 이를 ‘집단 간 다양성’이라고 한다. 같은 정당과 단체 안에는 다양한 개성을 가진 구성원이 함께 활동하고 있다. 이는 ‘집단 내 다양성’이다. 집단 안팎에서 다양성이 사라지면 결국은 아일랜드 감자처럼 공멸할 수밖에 없다.
일찍이 다윈은 적자생존을 말하며 “가장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도 아니고 가장 현명한 자가 오래 사는 것도 아니다. 변하는 자만이 유일하게 살아남는다”라고 했다. 정당이든 기업체든 시민단체든 구성원들이 다양한 목소리를 낼 수 있고, 그것을 경청할 분위기가 조성돼야 생존과 발전은 지속된다. 시드는 초목을 바라보며 다양성의 가치와 변화의 필요성을 다시 생각해 본다.
(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