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양왕용의 시 읽기
작성일 : 2022.10.23 12:12
귀여리歸歟里 1
/권 용 태
소낙비가 한 자락 스친 뒤
호수에 떨어진 햇살은 눈 부셔라
은빛 치마폭을 살짝 걷어 올린
춤사위에 정갈한 여인의 자태라 할까
겹쳐진 정암산正巖山 이
산 그림자로 느릿느릿
신령神靈으로 내려와
날개 접고 누운
짐승의 형상이라고나 할까
비단 꽃길 따라 귀여교 건너
절정의 아름다운 연꽃밭
비에 젖어도 강물은 흐르고
바람도 떠나기 싫어
잠잠히 머물러 있다
조선백자가
숨죽이고 누워 있는
팔당 물안개 공원,
탁하고 습진 풀밭에
외가리가 온종일 쪼아대고 있다
산자락에 펼쳐 놓은
낙조의 노을 길은
상등上等의 화폭畫幅인데
작은 바람에도 물살은 일고
상처 난 꽃들이 지천으로 피었다
유채꽃 길 따라
어디를 걸어도 다시 만나지는
귀여정歸歟亭*이
세상의 소란을 피해
한가롭게 서 있다
*귀여정은 조선조 중종 때 대사간을 지낸 한승정이 귀여리로 낙향하여 지은 정자임
-권용태 시집『그리하여 너의 섬에 갈 수 있다면』(2022.9)
<약력>1937년 경남 김해 출생, 부산상고(현 개성고) 중앙대학교 동 대학원 졸업, 1958년 《자 유문학》으로 데뷔, KBS 해설위원, 서라벌예대, 중앙대, 서울여대, 한국예술종합학교 ,경 주대 강사와 초빙교수 역임. 강남문화원장, 한국문화원연합회 회장, 간행물윤리위원, 방 송위원 등 역임, 시집 『아침의 반가』,『남풍에게』,『북풍에게』,『바람에게』 등이 있음. 중앙 문학상, 노산문학상, 서울특별시문화상(문학 부문), 대한민국 보관문화훈장 등 수상. 현재 <문학의 집>이사,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고문, 한국문화원연합회 상임고문,
20대 초반 대학 재학 중인 1958년 그 당시에는 《현대문학》과 쌍벽을 이루던 《자유문학》으로 데뷔한 이후 국회 문공위 전문위원, 지역 문화원과 전국문화원 연합회 회장 등 다양한 문화활동을 하던 권 시인이 데뷔 60년을 넘기고는 시작 활동만을 집중적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노익장의 현역 시인이고 시단의 큰 어른이다. 그러나 아직도 청년처럼 모든 면에서 건강을 유지하고 있으니 정말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귀여리 1」은 그의 최근 시집에 수록된 작품이다. 이 작품은 2018년 2월호 《월간문학》에 처음 발표할 때에는 「귀여리 스케치」라고 하였다가 그 뒤 연작을 쓰면서 제목을 바꾸었다. 필자는 발표 당시부터 문제작으로 주목한 바 있다.
‘귀여리’라는 지명은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에 있는 마을로 팔당호를 끼고 있는 산자수려한 마을이다. 인용한 작품의 주에도 나타나 있듯이 조선 중종 때의 대신 한승정이 ‘귀여정’이라는 정자를 지은 데서 유래하였다. 그런데 이 귀여리에 권 시인이 마치 한 대감처럼 머물고 있다. 그리고 그가 시집의 머리말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팔당호수가 보이는 툇마루 처마 밑에 떨어지는 낙수 물’을 바라보고 만감이 교차되면서 시를 쓰고 있다. 따라서 그의 시는 마치 옛 문인들의 문인화 풍의 시가 많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한 문인화가 아니라 권 시인의 오랜 삶에서의 관심사가 녹아 있다. 그러한 경향을 드러내고 있는 부분은 이 작품의 4연과 5연이다. ‘조선 백자가/숨 죽이고 누워 있는/팔당 물안개 공원,/탁하고 습진 풀밭에/ 외가리가 온 종일 쪼아대고 있다// ‘산자락에 펼쳐 놓은/낙조의 노을 같은/상등(上等)의 화폭(畫幅)인데 /작은 바람에도 물살은 일고/상처 난 꽃들이 지천으로 피었다’에서처럼 풀밭이 탁하고 습진 것이라든지 꽃들을 상처 난 것으로 인식하는 데서 다소 문명비판적인 태도가 보인다. 달리 말하면 자연은 자연이로데 문명에 탁하여 지고 상처 난 자연으로 인식한 데서 옛 문인화를 벗어나고 있다. 그러나 자연의 파괴를 크게 흥분하지 않고 ‘외가리’를 등장시켜 대비시키고 ‘풀밭’과 ‘꽃’으로 사물화 시켜서 여유롭게 바라보고 있다.
이러한 4-5연 말고도 권 시인의 역량은 첫 연부터 드러난다. 소낙비 뒤에 팔당호에 떨어지는 햇살을 ‘춤사위 정갈한 여인’으로나 ‘정암산이 산령으로 내려와 짐승의 형상을 하고 누운 것’으로 비유하는 것에서 충분히 드러나고 있다. 그러면서도 마지막 연에서는 ‘구여정’의 모습에서 세상의 소란과 거리를 두고 있는 권 시인의 삶의 자세가 형상화 되고 있다.
필자도 과연 10년 뒤에 이런 작품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해 보면서 다사 한번 「귀여리」 시편들을 읽는다. ( 양왕용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