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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2.10.14 10:19
34. 내가 배운 것만으로는, 음식남녀(飮食男女)
/양선규
학교에서 ‘영상매체의 문학적 이해’라는 수업을 맡고 있었던 관계로 직업적 차원에서 이런저런 영화를 섭렵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 수업은 초등학교 교육현장에서 ‘창의적 체험활동’ 수업을 진행하는데 필요한 교사 소양을 축적하는 것이 수업 목표입니다. 각 학과마다 한두 개씩 과목을 개설하여서 4학년 자유 선택 과목으로 운영합니다. 일반대학에서 교육대학으로 전출 온 뒤 제가 주로 가르치던 과목은 ‘문학의 이해’와 ‘대학국어’였습니다. 원래 ‘현대소설론’이라는 과목도 있었습니다만(제 주 전공이 그렇게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초등학생들에게 소설 가르칠 일이 어디 있나?”라는 일부 여론에 밀려 ‘서사문학교육론’(이 작명도 제가 했습니다)으로 이름을 바꿔서 동화, 우화, 소년소설 중심으로 국어과에서만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런 ‘깊이 가르칠 수 없는 상황’에서 ‘창의적 체험활동’ 수업을 위한 교과목 개발을 한 번 해보라는 공문을 받고 “판에 박힌 영화 이야기가 아니라 창의적인 문학적 발상으로 재미있고 의미있게 영화 보는 법을 한 번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영상매체의 문학적 이해’라는 과목이었습니다.
학생 반응이 의외로 좋았습니다. 제가 마음대로(?) 떠들고 학생들은 제가 한 이야기의 관점에서 영화를 보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타 수업처럼 과제를 내거나 발표를 해야 하는 수업 부담이 없어서 ‘꿀 빠는(학생들 표현입니다) 수업’으로 알려져 수강신청 경쟁이 치열했습니다. 학생들이 몰린다고 해서 따로 강사료를 더 주는 것도 아니고 강의 평가에 가점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어서 학생 모집에 그리 큰 의미를 두지는 않는 입장이었습니다만 기분은 과히 나쁘지 않았습니다. 특히 친구의 자녀들이 수업을 듣고 집에 가서 “아버지 친구 짱이다”라는 말을 한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제가 그런 기분 좋은 말을 듣는 통로가 이전에는 검도교실 하나뿐이었는데 우연찮게 하나가 더 생겼던 것입니다. 나중에는 다른 수업들이 폐강되는 경우가 속출해서 한 과목 수강 인원을 두 반으로 제한하자는 제안이 나와서(그런 제안을 잘 하는 한두 사람의 목소리 큰 ‘공평’ 교수가 있었습니다) 통과되기도 했습니다. 역시 영화로 수업을 하는 다른 학과의 교수님으로부터 “어떻게 해야 학생들을 모을 수 있는지 팁을 좀 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발견이 있어야 학생들이 좋아한다”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또 다른 젊은 분에게는 “내가 배운 것만으로 가르치려 한다면 좋은 선생이 될 수 없다”라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하여튼 원로교수가 되어서 수업 감면을 받게 될 때까지 이 수업은 저의 주 강좌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지금은 좋은 선생님을 초빙해서 더 좋은 강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때 자주 본 영화가 제가 페이스북에 한 번씩 올리는 영화 이야기의 텍스트들입니다. <써머스비>와 <글루미선데이>를 묶어서 ‘아버지의 이름’과 ‘어머니의 몸’이라는 줄리아 크리스테바 식의 ‘세계는 사랑으로 존재한다’를 설명하고, <검우강호>와 <무협> 같은 영화를 묶어서 나를 버리는 헌신적인 사랑만이 구원에 다다르는 통로가 되고 그것의 무협적 표현이 ‘불패의 가족주의’가 된다는 것을 설명했습니다. <음식남녀>, <미나미양장점의 비밀>, <세상의 끝에서 커피 한잔> <바다마을 다이어리> 같은 혼을 불태우는 직업인 영화(이른바 장인영화)나 가족 다큐멘터리식 인생 영화(이른바 휴먼 다큐멘터리 영화)들은 “무엇이 되느냐‘보다는 ’어떻게 사느냐‘가 훨씬 소중한 삶의 태도라는 것을(교사가 될 사람이니까 특히) 알게 하는 교재로 사용했습니다. 그 이외에도 <터미네이터>, <동방불패>, <천장지구>, <러브레터>, <동사서독>, <양들의 침묵> 같은 친근한 상업영화들을 그때그때 활용해서 심리학, 철학의 재미있는 화제들을 소개하곤 했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니 그 강의를 위해서 이것저것 궁리하던 때가 참 좋았습니다. 특히 아무도 하지 않았던 일을 혼자서 했던 것이 가장 좋았습니다.
오늘은 그때 본 <음식남녀> 영화이야기로 도입을 삼을까 합니다. <음식남녀>의 도입부의 요리 장면은 눈에 띄게 화려합니다. 감독이 그 장면에 기울인 정성이 화면에 넘쳐납니다. 가볍고 명랑한 소리들과 함께 하는 빛나는 요리의 영상미가 눈부십니다. 가슴까지 설레게 합니다. 먹기 위한 살생(殺生)이 저렇듯 아름답게 묘사될 수 있구나라는 탄성이 절로 터져 나옵니다. 요리가 그 자체로 하나의 미학이라는 것을 제대로 보여줍니다. 요리하는 장면 장면이 일절 다른 생각이나 느낌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오직 “아름다움을 느껴라”라는 감독의 의도만 존재합니다. 그런 수준에서는 영화가 일종의 마술입니다. 관객의 시각을 희롱하고 사람의 마음을 쥐었다 폈다 합니다. 등장하는 여배우들도 요리만큼 아름답습니다. 오래 전의 인물들이지만 실제보다 훨씬 젊어 보입니다. 아마 그 부분은 (영화 외적인) 시간의 마술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그만큼 늙었다는 거겠지요. 주인공 주사부(師父)가 아마 제 나이 정도일 것 같습니다.
남녀 불문, 나이 불문, 직업 불문하고 ‘음식남녀’를 도외시하고 살아가기는 힘듭니다. 음식남녀, 식색(食色)은 존재의 기본 조건입니다. 그것과 멀어지면 이미 사는 의미와 사는 재미의 절반은(거의 모두?) 잃는 셈입니다. 그렇게 보면 주역은 인생의 절반에 대해서만 이야기합니다. 실패하지 않는 법, 후회하지 않는 법, 허물을 남기지 않는 법, 싸워서 이기는 법, 동지를 간별하는 법, 나갈 때를 아는 법, 상황을 파악하는 법 등을 주로 이야기하지 그 중요한 식색(食色)에 대해서는 거의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식색 이외의 것들에는 관심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사실 무용지물입니다(그래서 앞에서 주역은 ‘백성’들에게는 무용한 책일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것들이 필요한 세상에서 살면서, ‘승리의 징표’로 남다른 식색을 누리고 싶어 하는 이들도 다수 있기는 하겠습니다만 소수라도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거룩한’ 주역의 가르침도 한갓 주사부의 생선요리 한 점에도 못 미치는, 영양가 없는 말장난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초구는 앞발꿈치에 힘을 주니, 가면 이기지 못하며, 허물이 되리라. (初九 壯于前趾 往不勝 爲咎)
상전에서 말하기를, 이기지 못하는데 가는 것이 허물이라. (象曰 不勝而往咎也) [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도서출판 길, 1999(2쇄), 333쪽]
주역 마흔세 번째 ‘택천쾌’(澤天夬), 쾌괘(夬卦)에서는 초구(初九) 효사(爻辭)가 눈에 들어옵니다. ‘앞발꿈치에 힘을 주다’(壯于前趾)가 인상적입니다. 앞으로 나가려는 의욕이 과하여 자신을 돌아다보고 때를 살피는 기회를 잃게 되는 ‘실패하는 형국’에 대한 이야기로 이해됩니다. 검도 수련에서도 ‘앞발꿈치에 힘을 주다’(壯于前趾)는 절대 금물입니다(물론 최고의 경지에 다다르면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앞발은 방향만 잡고 체중을 뒤에 싣는 ‘뒷발에 힘주기’가 강조됩니다. 앞발에 체중이 실리면 적기에 몸을 실어서 앞으로 치고나가기가 어렵습니다. 우족우수(右足右手), 중단세, ‘까치발’을 기본으로 하는 검도의 기술 패턴 상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상대를 먼저 치고 나가는 데에는 그것 이상의 방법이 없습니다. 펜싱도 마찬가지고요. 전심전력 자신의 몸을 던져서 상대를 치려면 ‘장우전지(壯于前趾)’는 절대 금물입니다.
선공후사(先公後私)를 내세우지만 그 내막은 ‘장우전지(壯于前趾)’에 불과한 것이 정치의 속살이라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때로는 한 나라의 정치가 <음식남녀> 영화 한 편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정치도 영화처럼 편집된 장면만 잘라 보여주는 눈속임 마술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멋진 요리처럼 식재(食材)들의 조화로운 결합을 만들어내는 ‘불의 예술’이기도 하다고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만 요즘은 그런 멋진 장인(匠人) 정치인, 예술가 정치인들이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감쪽같은 마술이나 불의 예술은커녕, 마치 하루하루를 연명하기 바쁜 서민들에게 자릿세나 뜯는 양아치들의 놀음터 같습니다. 주사부 같은 요리 예술가나 이안 감독 같은 영상의 마술사까지는 바라지도 않겠습니다. 앞발꿈치에 힘이 잔뜩 들어간 못된 소인배들이라도 우리 눈앞에서 좀 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소설가/ 대구교대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