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윤일현의 책상과 밥상 사이

윤일현의 책상과 밥상 사이

<책상과 밥상 사이 > 74.가을의 길목에서

작성일 : 2022.09.15 10:52

 

 

가을의 길목에서

/윤일현

 

20세기 가장 위대한 종교 사상가 중 한 명인 마르틴 부버의 저서 나와 너는 현대사회의 인간 상실, 인간소외 문제를 다룬 책이다. 세상에는 나와 너(I-You), 나와 그것(I-It)의 관계가 있다. ‘나와 너의 관계는 대상과 인격적으로 대등하게 서로 마주한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유일한 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가 깊은 신뢰 속에서 상생하고 공존하는 관계다. ‘나와 그것의 관계에서는 세상 모든 것을 수단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나 외의 모든 것이 소유와 소비, 욕망 충족의 대상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버리고 대체할 수 있어 그 관계는 일시적이고 기계적이다.

라고 부르며 진정한 로 만나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부버는 인과율의 공간을 단호하게 넘어서라고 말한다. 인과율의 공간이란 집이 있나 없나, 몇 평짜리 아파트에 사나, 타는 차종은 무엇인가 같은 정량적 측정이 가능한 기하학적 공간을 지칭한다. 이 공간에서는 가깝고 멀고, 좁고 넓다가 분명하게 구분된다. 이런 상태에서는 모든 대상이 그것으로 전락한다. 대부분의 타자는 그것으로 물화되고 익명화되기 쉽다. 모든 만남은 일시적이고 일회적인 스침에 불과하다. 상대가 마음의 문을 열어도 보이지 않고 느끼지 못하니 는 없고, 소유하고 이용하다가 버리고 교체할 수 있는 그것만 있다. 부버는 진정한 를 만나기 위해서는 공간이 필요 없다고 말한다. ‘관계의 세계’, ‘상호성의 공간에서만 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공간에는 안과 밖을 가르는 벽이 없고, 내 편이 아니면 가차 없이 그것으로 밀치고 배척하는 금긋기도 없다. 여기서는 내가 바라보며 관심을 가지는 모든 것들이 소중하게 빛나는 로 눈부시게 부활한다. 그는 참다운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나와 너의 관계를 맺으라고 말한다. 그는 사람은 나와 너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너와 더불어 현실에 참여한다. 나는 너와 더불어 현실을 나눠 가짐으로써 현존적 존재가 된다라고 주장한다. 그는 진정한 관계를 위해서는 진실한 대화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인간으로서의 가치와 존엄성을 상실한 현대의 비극은 참된 인간관계와 진실한 대화의 상실 때문이라고 했다.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의 관계를 회복해 점점 심해지고 있는 나와 그것이란 물신(物神)의 세계를 극복하고 따뜻한 인간성을 회복하자고 호소했다. 부버를 이야기할 때 자주 인용하는 김춘수의 시 을 다시 읽어본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그에게로 가서 나도/그의 꽃이 되고 싶다//우리들은 모두/무엇이 되고 싶다./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부모·형제, 친구와 동료, 사랑하는 사람조차도 이용하고 버리는 그것이 될 수 있다. 반면에 이름 모를 들꽃, 나무, 돌멩이, 구름, 길고양이, 개미 한 마리도 일 수 있다. 너 없이는 나를 알 수 없다. 나는 너와의 관계 속에서 성장하고 완성돼가는 존재다.

여름이 힘을 잃고 길모퉁이를 돌아가고 있다. 상생보다는 사생결단의 싸움질만 하는 정치인들,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젊은이들, 끝이 보이지 않는 불황의 터널에서 한숨짓는 자영업자들, 치솟는 물가를 온몸으로 실감하며 두부 한 모를 쥐었다 놓았다 하는 주부들,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에게 가을이 왔다.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우리는 모두 늘 외롭고 쓸쓸하다. 이런저런 이유로 소식을 전하지 못 한 사람들에게 사무엘 울만의 시 청춘몇 구절을 적어 보내며 안부를 묻고 싶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이다. 장밋빛 볼, 붉은 입술, 부드러운 무릎이 아니라 강인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오르는 열정을 말한다. 청춘이란 인생의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신성한 정신이다. 영감이 끊어져 정신이 싸늘한 냉소의 눈에 덮이고 비탄의 얼음에 갇힐 때 스물이라도 인간은 늙는다. 머리를 높이 쳐들고 희망의 물결을 붙잡는 한, 여든이라도 인간은 청춘으로 남는다.” 세상 모든 것을 소중한 로 만날 수 있는 가을이면 좋겠다.

(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