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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 다가가기 > 가곡이야기3. 조선정악전습소와 가곡 전승

작성일 : 2022.09.06 08:04

[가곡 이야기] 3. 조선정악전습소와 가곡 전승

제민이/ 가곡전수자 겸 가수

 

 

1909915일 조양구락부(調陽俱樂部)가 설립됩니다. 이것은 한국 최초의 사립 음악 학교입니다. 예전에는 음악이 무용을 포함하고 있었으므로 조양구락부에서 춤도 가르친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1910110일 대한민보에 발표된 교사 명단을 보면, 가요(歌謠) 교사는 교사장(敎師長) 하순일(河順一), 교사 신경선(申敬善) 장덕근(張德根) 이영환(李永煥)입니다.(박은경. 167-168). 여기서 가요란 전통 성악곡인 가곡(歌曲)과 가사(歌詞)를 가리킵니다.

 

가요 교사진: 하순일, 신경선, 장덕근, 이영환

 

하순일(河順一)은 하규일(河圭一)의 종형(從兄)이며, 하중곤(河仲鯤)과 더불어 19세기 말 유명한 가객입니다. 하중곤은 하규일의 숙부(叔父)이니, 하중곤은 하순일의 아버지일 수도 있고, 백부나 숙부일 수도 있습니다. 하순일과 하중곤은 무시(無時)로 운현궁을 드나들던 운현궁 대령가인(待令 歌人)이었습니다. 운현궁(雲峴宮)은 고종의 아버지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 1820 ~ 1898)의 사가(私家)이지만, 이하응이 고종을 대신하여 섭정(攝政)을 하였으니 왕궁(王宮)이나 다름없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집권 당시 행사에 필요한 악공이나 기생을 운현궁에 상주(常住) 하게 하였는데, 그들을 대령 악사, 대령 기생이라고 부릅니다. 대령 가인은 운현궁에 상주하지는 않았지만 아무 때나 출입하여 노래를 부르는 운현궁 소속 가인이었습니다.

 

신경선(申敬善)은 고종 말년(1892-1902년 사이) 궁중 연향에 4차례나 초청받아 노래를 불렀던 가객입니다. 그의 연향 참여 기록을 당시 의궤(儀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경숙. 219-220). 의궤란 조선 시대에 왕실이나 국가에 큰 행사가 있을 때 후세에 참고할 수 있도록 일체의 관련 사실을 그림과 문자로 정리한 책입니다.

 

장덕근(張德根)1913년경 광교 기생조합(廣橋 妓生組合)에서 가사(歌詞)를 가르쳤습니다. 서울에 올라온 지방 출신 기생 즉 향기(鄕妓)는 기둥서방이 없습니다. 이들을 무부기(無夫妓)라고 부릅니다. 반면 서울 출신 기생 즉 경기(京妓)는 기둥서방이 있습니다. 이들을 유부기(有夫妓)라고 부릅니다. 1913년 하규일(河圭一)이 무부기를 모아서 다동 기생조합(茶洞 妓生組合)을 설립하자, 서울 출신의 경기(京妓) 곧 유부기(有夫妓)들이 모여 광교 기생조합(廣橋 妓生組合)을 창립합니다. 다동 조합에서 하규일은 기생들에게 가곡, 가사, 시조를 가르치고, 광교 조합에서 장덕근(張德根)은 가사를, 장계춘(張桂春)이 가곡을 가르칩니다. 1918년 다동 조합은 대정권번(大正券番)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후에 조선권번(朝鮮券番)으로 개칭되었습니다. 광교 조합은 1918년 한성권번(漢城券番)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이영환(李永煥)은 하순일과 함께 조양구락부로부터 조선정악전습소 시절까지 교사로 재직했습니다. 동료 교사들의 명성에 비추어 보면 이영환도 대단한 인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관한 여타의 활동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조선정악전습소의 목적과 전공

 

19116월 조양구락부는 새롭게 조직을 정비하여 명칭을 조선 정악 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로 바꿉니다. 장사훈 교수는 이 변화를 조양구락부는 발전적인 해산을 단행하고, 조선정악전습소의 간판으로서 재출범하게 되었다고 규정합니다(장사훈, 15). 조선 정악 전습소는 사무실과 학교 건물을 이전하거나 확장합니다. 그리고 19127월에는 기생을 가르치기 위하여 서울 중부(中部) 상다동(上茶洞)에 전세 600을 들여 조선정악전습소 여악(女樂) 분교실(分校室)을 설치합니다(신경숙, 227). 새로이 지방에서 올라오는 무부기들의 숫자가 증가하자 이들을 견습할 별도의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조선정악전습소는 총칙 제 11조에 다음과 같이 목적을 명시합니다.

 

[예로부터 전래(傳來)하는 가악(歌樂)을 유지(維持)하며, 시의(時宜)에 적용(適用)할 조율(調律)도 이를 증보(增補)하여 사람의 전진(前進)하는 용기(勇氣)를 고발(鼓發)하여 교제(交際)하는 심정(心情)을 통창(通暢)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

 

조선정악전습소의 목적은 첫째 전통 가요와 음악을 전승하고, 둘째 시대에 맞게 현대적 음악을 만들어서, 인간의 용기를 격려하고 심정을 밝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조선정악전습소는 조선악과 와 서양악과 를 두고 그 아래에 여러 개의 전공을 배치합니다. 조선 악과는 歌曲, 玄琴, 가야금, 양금, 단소, 생황, 기타 취악(吹樂)으로, 서양악은 성악, 악리(樂理), 창가곡조(唱歌曲調), 풍금(風琴오르간), 사현금(四絃琴바이올린)으로 전공이 나뉩니다. 수업연한은 전공마다 조금씩 다릅니다(장사훈, 20). 조선악과에서 가곡과 현금은 1, 가야금과 단소는 6개월, 양금은 3개월입니다. 서양악과에서 성악, 풍금, 사현금은 1년입니다.

 

조선정악전습소 교사진

 

조선정악전습소의 교사 명단을 보면 191110월에 전() 군수(郡守) 하규일(河圭一)이 학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91212월 남창, 여창 교사는 하순일과 이영환인데, 하순일은 여악 분교실 감독을 겸하고 있습니다. 조양구락부에서 가곡을 가르치던 신경선과, 가사를 가르치던 장덕근(張德根)이 교사 명단에서 빠졌습니다.

 

현금 교사는 김경남(金景南) 조이순(趙彛淳), 가야금 교사는 명완벽(明完璧) 함화진(咸和鎭) 한규우(韓圭祐), 양금교사(洋琴 敎師)는 백용진(白鎔鎭), 김상순(金相淳), 단소 교사는 이춘우와 조동석, 서양악 교사는 김인식(金仁湜)입니다. 이들은 조양구락부 시절과 같습니다. 명완벽(明完璧)은 가야금 교사로 소개되어 있으나 가곡 여창의 명인이며, 3대 아악사장(雅樂師長)을 지냈습니다. 아악사장은 이왕직 아악부의 책임자입니다. 가야금 교사 함화진(1889-1948)은 함재운의 큰아들입니다. 함화진는 제5대 아악사장(1932-1939)를 지냈습니다. 함재운(1854-1916)은 조양구락부에서 교감에 해당하는 각과 감독이었습니다. 그는 2대 아악사장을 역임했습니다.

 

조선정악전습소 졸업생

 

19132월 서양악 보조 교사 명단에 염광섭(廉光燮)과 하대홍(河大泓)이 보입니다. 서양악 보조 교사 염광섭과 하대홍은 1913년 제2회 서양악과 졸업생입니다. 염광섭은 풍금, 하대홍은 성악을 전공했습니다. 하대홍은 하규일의 아들입니다(박은경, 174). 하규일은 가곡의 명인이고 조선정악전습소의 학감이었지만, 그의 아들은 전통 가곡 대신 서양 성악을 전공한 것입니다. 홍영후(洪永厚)는 서양악과 제2, 3회 졸업생입니다. 그는 2회 때는 성악, 3회 때는 사현금을 전공했습니다. 홍영후는 홍난파(洪蘭坡)의 본명입니다.

 

가곡을 오선보로 채보하다.

 

조선정악전습소의 가곡 전공 학생은 한 사람만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19134, 2회 졸업생, 이상준(李尙俊, 1884~1948)입니다. 조선악 가곡은 수업연한이 1년이니, 그는 19125월에 입학하였습니다. 입학 당시 이상준은 보성고등학교 창가 교사였습니다(신경숙. 228-229). 조선정악전습소에는 보성의 동료 교사인 김인식이 서양악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정악전습소의 가곡 교습은 남창 한바탕입니다. 남창 교본은 1910년 하순일이 가곡원류에서 악곡별로 대표곡 1곡씩을 골라 거기에 연음표(連音標)를 표시하여 만들었습니다. 연음표는 노랫말 가사에 표시했던 연음 부호인데, 조선 후기 가객들이 창안했습니다. 가곡원류(歌曲源流)는 고종 13(1876) 박효관(朴孝寬)과 안민영(安玟英)이 편찬한 가집(歌集)입니다. 이 책은 당시 유행하던 노래 가사를 수록하고 있으며, 가객들이 쉽게 부를 수 있도록 노랫소리의 높낮이, 선율의 연결 등을 연음표(連音標)로 표시해 두었습니다.

 

하규일이 편찬한 가곡 교본을 일년 동안 이상준이 다 배웠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상준은 졸업하기 한달전, 19133, 가곡 우조 초삭대엽과 편, 그리고 시조 한 곡 등 총 3곡을 오선보로 채보합니다. 이 악보는 조선속곡집(俗曲) 상권에 실려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나라 가곡의 역사에서 최초의 일입니다. 이상준은 역사상 처음으로 가곡과 시조를 오선보로 채보한 것입니다.

 

이상준의 가곡 공연

 

조선정악전습소를 졸업한 지 20년 후 1933년 이상준은 배반(杯盤)을 치릅니다. 배반이란 가곡 한바탕을 다 배우고 나서 그것을 전문가 앞에서 발표하여 실력을 인정받는 일종의 졸업 연주회 같은 것입니다. 1933910일 경성 방송국은 명월관에서 벌어진 이상준의 배반 공연을 중계합니다(신경숙. 234-235)

 

중계방송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습니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경성방송국국악방송곡목록(민속원, 2000), 152-153.)

 

1. 가곡

) 남창 우조 초삭대엽

) 여창 우조 이삭대엽

) 남창 삼삭대엽

) 여창 우조 두거

) 남창 우조 소용

) 여창 반엽

) 남창 계면 삼삭대엽

) 여창 계면 두거

) 남창 언락

) 여창 우락

) 남창 편락

) 남창 편

) 태평가

2. 가사 춘면곡

3. 시조

이비취, 이수완, 안진동, 정채홍, 신화선(여창)

반주: 현금, 가야금, 양금, 해금, 대금, 세적, 장고

(1933. 9. 10() 12:30~ ‘朝鮮券番杯盤자리(敦義洞 明月館本店에서 中繼)’

 

프로그램에는 남창과 여창이 섞여 있습니다. 남창 가곡은 이상준이 부르고, 여창 가곡은 조선권번 기생들이 불렀습니다.

 

배반을 치른 1년 후 193455일 이상준은 명월관에서 첫 연주회를 갖습니다.

조선 중앙일보는 다음과 같이 그것을 보도합니다.

 

[신라시대부터 전하여 오든 우리의 정악이 이제 와서 이를 아는 이는 겨우 하규일 단 일인 사람뿐임으로 장차 그 후계자가 업시 결국 영명할 불운에 잇든 바 삼십년간을 교육계에 종사하든 리상준(李尙俊)씨가 이십여년을 두고 남모르게 연구를 거듭하다가 남창(男唱)을 완전히 배호고 오일 오후 오시 시내 명월관에서 피로연을 성대히 개최하고 각 방면 인사를 초대 하얏는데, 휘문고보 교장 리윤주씨의 개회사가 잇슨 후 우조(羽調) 계면(界面) 편악(編樂) 등 문외한으로는 일홈도 알기 어려운 유창한 남창 녀창이 잇서 만당을 도취게 하엿고(조선정악연주회의 성황, 悠長한 남창과 여창으로, 조선중앙일보, 1934. 5.7.2. 신경숙. 236)]

 

이 보도는 몇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첫째, 가곡을 신라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정악(正樂)이라고 규정합니다. 둘째, 가곡을 계승하는 사람은 하규일 단 한사람밖에 없었다는 점입니다. 셋째, 가곡의 우조, 계면조, 편악 같은 명칭을 일반인은 이름조차 모른다는 점입니다.

 

가곡의 전승 사정은 1934년보다 2021년 현재가 좀 나은 듯합니다. 가곡을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그때보다 다소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가곡을 일반인이 전혀 모른다는 점은 1934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다를 것은 없습니다. 가곡은 1934년 그때부터 침체(沈滯) 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조선정악전습소와 가곡 전승을 토론하였습니다.

 

박은경(Eun Kyung Park). 2001. 논문 : 한국최초의 민간음악교육기관 조선정악전습소 연구. 음악과 현실, 21(0) : 161-182. 164-165.

 

신경숙 ( Kyung Sook Shin ). 2007. 근대 초기 가곡 교습 -초기 조선정악전습소를 중심으로-. 민족문화연구, 47(0) : 213-244. 216-217.

 

장사훈 ( Sa Hun Chang ). 1974. 한국최초의 민간음악 교육기관. 민족문화연구, 8(0) : 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