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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2.09.02 09:45 수정일 : 2022.09.02 09:49
나는 새가 떠나고 구름이 빽빽할 뿐, 비조이지(飛鳥離之)
/양선규
‘이섭대천(利涉大川, 큰 내를 건너면 이롭다)’라는 말만큼은 아니지만 주역의 저자가 즐겨 쓰는 말 중의 하나가 ‘밀운불우(密雲不雨)’입니다. ‘구름이 빽빽할 뿐 아직 비가 오지 못한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에는 두 개의 뜻이 중첩되어 있습니다. 다중의 의미가 시시때대로 경계를 다투며 제 영역을 넓히고 좁히는 것이 상징적 표현의 특징이므로 ‘밀운불우’가 행여 정 반대의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해서 하등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밀운불우’는 ①어떤 일이 성사되기 직전의 충만한 상태라는 뜻과 ②어둡고 막히고 굽은 상태가 지속되는 아주 답답한 상황을 나타내는 뜻을 동시에 나타내고 있습니다.
본디 사람은 욕심의 동물입니다. 식색(食色) 이외에도 여러 가지 욕심을 부리며 삽니다. 특히 돈 욕심이 가장 큽니다. 당장 필요한 것도 아닌데 돈으로 비축해서 과시(자만)하기를 매우 즐깁니다. 명예욕도 만만치 않아서 물불 안 가리고 이름을 알리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권세욕이나 외모 자랑은 동물들도 가지고 있다고 하니 논외로 하겠습니다. 어떻든 그런 욕심의 동물인 사람인지라 누구에게나 다 밀운불우의 시기가 있습니다. 요즘은 보통 10년의 밀운불우가 마치 당연한 통과제의처럼 적용됩니다. 특히 정치판이 그렇습니다. 대통령, 서울시장 같은 큰 자리는 거의 다 ‘10년 밀운불우’를 거쳐야 됩니다. ‘순풍에 돛 달고’는 아예 없습니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누가 10년 밀운불우를 잘 견디고 있나?”가 사람 고르는 기준이 되고 있는 느낌마저도 듭니다. 물론 제 뇌피셜입니다만.
인생에 둔 뜻이 깊어 포부가 큰 사람들에게는 주역의 ‘밀운불우’가 특히 중요한 말씀인 것 같습니다. 순풍에 돛을 달고 시원스러이 앞으로 나아가다가도 순간순간 밀운불우에 부딪혀 매사 답답할 때 어떻게 행하고 취해야 할지를 잘 일러 줍니다. 앞으로 나아갈 때는 모든 일이 선후가 분명한데 막히는 상황이 오면 매사 원인도 불투명하고 결과도 시원스럽지 못합니다. 밀운불우, 구름이 빽빽할 뿐 비가 오지 않습니다. 땅과 하늘, 아래 위가 통하지 못하여 찌는 듯 사람만 괴롭게 하고 정작 시원한 비는 오지 않는, 막히고 어두워 답답한 형국입니다. 그때 참을성을 발휘하고 주변을 계속 챙기고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합니다. 주역 예순두 번째 ‘뇌산소과(雷山小過)’, 소과괘(小過卦)의 육오(六五) 효사(爻辭)를 보면 그런 ‘답답한 때’의 전말이 상세하게 묘사됩니다.
... 육오는 빽빽한 구름에 비가 내리지 않음이 우리 서교(西郊)에 이르렀으니, 공(公)이 구멍 속에 숨어있는 것을 쏘아 잡도다(六五 密雲不雨 自我西郊 公弋取彼在穴). -- 소과는 작은 것이 큰 것보다 지나친 것이다. 육(六) 즉 음으로 오위를 얻었으니 음이 성하여서 구름이 빽빽하지만 비오지 않음이 서쪽 교외에까지 이른 것이다. 저 비라는 것은 음이 위에 있는데 양이 비벼대도 통함을 얻지 못해 찌는 듯하다 비가 된다. 지금 간괘가 아래에 그쳐서 사귀지 못하므로 비가 오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소축괘는 (아래 양효들이) 나아감을 얻어서 비가 오지 아니하고, 소과괘는 양이 위로 사귀어 통하지 않으므로 또한 비가 오지 않는 것이다. 비록 음이 위에서 성하나 아직 베풀어 주지는 못한다. 공(公)이라는 것은 신하의 끝이다. 육오는 음의 극성이므로 공이라 칭하였다. 익(弋)은 활이다. 구멍에 있는 것은 숨어 엎드려 있는 것이다. 소과라는 것은 적게 지나쳐서 난이 아직 크게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숨어 엎드린 것이다. 음의 몸으로 소과를 다스려서 조금 지나친 것을 사로잡을 수 있으므로 ‘공익취피재혈(公弋取彼在穴)’이라 하였다. 지나친 것을 제거하는 도는 잡는 것에 있지 아니하니, 그래서 구름이 빽빽할 뿐 아직 비가 오지 못하는 것이다. [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도서출판 길, 1999(2쇄), 460쪽]
한여름, ‘밀운불우(密雲不雨)’처럼 사람을 지치게 하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숨 막히게 습도는 높고 날은 더워 그야말로 진땀이 나게 합니다. 정치에 빗대자면 공경대부들은 무사한데 (그들의 무사안일로 인해) 백성들만 죽어나가는 형국입니다. 상하가 불통(不通)이어서 매사 어둡고 막히고 굽은 상태입니다. 마치 현재 우리 사회가 처한 극한의 ‘불통의 시국(時局)’을 묘사하고 있는 듯합니다(이 글은 2015년 4월 17일에 처음 쓴 것입니다만 고쳐 쓰지 않아도 될 듯합니다). 다음 효사를 보면 더 그렇습니다.
...상육(上六)은 만나지 아니하여 지나치니, 나는 새가 떠남이라. 흉하니 재앙이라(上六 弗遇過之 飛鳥離之凶 是謂災眚). -- 소인의 지나침이 드디어 상극에 이르렀으니 지나쳐도 한계를 알지 못하고 너무 지나친 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너무 지나쳤으니 무엇을 만나리오? 날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무엇에 의탁하리오?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인 것이니 다시 무엇을 말하리오! [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도서출판 길, 1999(2쇄), 470쪽]
뇌산소과(雷山小過), 소과괘(小過卦)의 효사를 다시 읽으며 4년 전의 나라 상황을 되돌아봅니다. 시국과 관련해서 밀운불우(密雲不雨)를 한탄하고 몇 달 뒤, 나라가 뒤집어지는 사건이 터집니다. 국정 농단의 실체가 드러나고 밀운불우(密雲不雨)의 극점에서 하늘에서 비가 쏟아졌습니다. 촛불정국이 도래하고 ‘비조이지(飛鳥離之)’, 나는 새가 떠나고 백성들을 숨 막히게 하던 상황이 종료됩니다.
이제 그때로부터 또 4년여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여전히 밀운불우의 계절이 다시 온 듯합니다. 누가 이 답답한 구름들을 시원한 비로 만들어줄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소설가/ 대구교대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