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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2.08.27 10:31
<가곡이야기 한국> 2. 최초의 사립 음악학교, 조양구락부
/제민이 가곡전수자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음악학교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언제 생겼을까요? 전통사회에서 음악 교육은 늘 국공립 기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서울의 중앙정부는 장악원(掌樂院), 각 지방 정부는 교방(敎坊)을 운영하여 기녀(妓女)와 악공(樂工)을 양성했습니다. 오늘날의 정부 기구에 비유하자면 장악원은 서울대학교 국악과와 국립국악원, 국립무용단을 통합한 기관이며, 교방은 지방 국립대 국악과와 시립 또는 도립 국악 관현악단과 무용단을 통합한 조직에 해당합니다. 이런 사정은 고려 시대도 동일하였습니다. 조선의 마지막까지 우리나라에는 사립 음악학교는 없었습니다.
최초의 사립음악 교육기관은 1909년 9월 15일 발족한 조양구락부(調陽俱樂部)입니다. 조양구락부는 이름만 보면 학교라기보다 동호회처럼 보입니다. 이 단체는 처음에 동서양의 음악 교육뿐 아니라, 음악 연구와 악보편찬을 추진하기 위해 조직되었기 때문에 학교를 의미하는 명칭을 쓰지 않았습니다. 2년 후 조양구락부는 음악 교육에 중점을 두면서 1911년 6월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로 이름을 바꿉니다. 오늘은 최초의 사립 음악학교가 어떻게 탄생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조양구락부의 존재는 1974년 장사훈(張師勛,1916 ~ 1991)교수의 논문을 통하여 널리 알려졌습니다. 장 교수는 논문의 서두에서 사립 음악학교가 등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회적 분위기를 설명합니다. 조선 말기 국공립 음악학교가 폐지되거나 쇠퇴하였습니다. 지방의 교방은 점점 축소되다가 일제의 조선 병합과 함께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1910년까지 지방의 공립 음악학교는 모두 폐교,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중앙의 음악학교는 다른 운명을 맞이합니다.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할 때, 장악원은 교방사(敎坊司)로 이름을 바꾸고 규모를 확대합니다. 교방사에 소속된 기녀와 악공은 772명입니다. 1907년 순종이 즉위할 때 교방사는 장악과(掌樂課)로 이름이 바뀌고 그 인원은 305명으로 줄어듭니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병합할 때도 장악과는 폐지되지 않았습니다. 일제가 조선 왕실은 살려두었기 때문입니다. 일제는 조선의 왕에게 이왕(李王)이라는 작위(爵位)를 내리고, 조선 왕실을 일본 황실 가문에 편입하였습니다. 조선 왕실은 사라지지 않았으므로 중앙정부의 음악학교는 폐지되지 않고 이왕가 (李王家)의 음악학교로 존속했습니다. 규모는 매우 축소되었습니다. 1911년 장악과는 아악대로 이름을 바꾸고 인원을 계속 줄입니다. 1915년 아악대가 이왕직아악부로 이름을 바꾸는데, 1917년에는 이왕직아악부에는 겨우 57명의 악원(樂員)만이 남았습니다.
이렇게 국공립 음악학교가 폐지되거나 기능이 쇠약해지는 상황에서 조양구락부가 탄생합니다. 1909년 9월 15일 유지(有志) 10명이 사립 음악학교를 창립한 것입니다. 창립 취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근래에 공명(功名)과 이욕(利慾)이 성행하고 풍속이 쇠퇴(衰退)하여 문란(紊亂)해 가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가악(歌樂)의 청취(淸趣)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여, 수천 년의 유산이 거의 사라질 지경이다. 이를 오래도록 개탄하던 유지들이 단체를 만들어 명칭을 조양구락부(調陽俱樂部)라 한다. 이 단체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가요歌謠, 음률音律 , 악기樂器를 모으고, 옛것을 연구하고 새것을 탐구하여, 진정한 멋과 청취(淸趣)를 계승하고, 그것을 가르치고 익힌다.”
換近 以來 功利盛行 風俗頹敗 歌樂之淸趣 世人 全眛其味 抛擲於蕩淫俗流 數千載遺來古蹟
幾至湮滅無餘 故慨然者久矣 何事有志紳士 集合團錫 其嘉名曰調陽俱樂部 募集遺來古蹟 其歌謠 音律 樂器 究舊硏新 繼述其眞味淸趣 使且敎授肄習.]
조양구락부의 발기인은 10명입니다. 김경남(金景南), 이병문(李秉文), 하순일(河順一), 백용진(白瑢鎭), 한규우(韓圭祐), 한용구(韓鎔九), 조남승(趙南升). 한석진(韓錫振), 고우경(高禹敬). 김현주(金顯炷). 이 중 김경남(金景南)과 이병문(李秉文)은 조선 말년에 거문고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습니다. 당시 거문고 3절(三絶)은 함재운咸在韻(1854 ~ 1916), 김경남(金景南,) 이병문(李秉文)입니다. 하순일(河順一)은 전(前) 高城郡守(고성군수)인데, 하규일(河圭一, 1867-1937)의 종형(從兄)입니다. 하순일(河順一)은 가곡 남녀창의 권위자입니다. 백용진(白瑢鎭)은 양금(洋琴), 한규우(韓圭祐)는 가야금, 한용구(韓鎔九)는 생황笙簧과 거문고 전문가입니다.
조양구락부는 1909년 9월에 발족했지만, 그 한해 전, 1908년 11월부터 설립에 관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백용진은 부유하고, 양금에 조예가 깊었습니다. 백용진을 중심으로 몇몇 국악 애호가들은 다동(茶洞) 소재 백용진의 집에서 모임을 갖고, 귀족회 회원들을 끌어들이기로 결정했습니다. 귀족회는 일제의 귀족을 말합니다. 조선은 귀족(貴族)이 없습니다. 조선의 신분은 양인(良人)과 천민(賤民) 밖에 없습니다. 양인 중에서 과거 시험에 급제하거나 추천으로 관직을 얻으면 양반이 됩니다. 양반의 아들이라고 저절로 양반의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의정의 아들이라도 과거 시험에 합격을 하거나 추천으로 관직을 받아야 양반이 되는 것입니다. 일제는 조선 병합 무렵에 조선의 고위 관리에게 작위를 수여했습니다. 조선인이 수작(受爵)한 작위(爵位)는 후작, 백작, 자작, 남작이었습니다. 작위는 아들에게 상속됩니다. 작위를 계승하는 것을 습작(襲爵)이라고 합니다. 양반은 습작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양반 제도와 귀족 제도는 매우 다릅니다.
1910년 일제의 조선 병합 당시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사람은 76명입니다. 이 중 8명은 수작(受爵)을 거부하거나 작위를 반납하였습니다. 1911년 조선 귀족회가 설립되어 박영효가 회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귀족회는 1911년에 정식 발족되기 전에도 조직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랬으니까 1908년 백용진과 유지들이 조양구락부 설립을 논의할 때 귀족회와 접촉하려고 시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조양구락부 발기인들이 귀족회를 끌어들이려는 이유는 귀족회를 활용하여 후원금을 확보하기 위헤서 일 것입니다. 1909년 1월부터 조양구락부의 발기인들은 박영효을 통하여 이왕가와 후원금 교섭을 벌여,
1911년 6월 18일 이왕가로부터 일시금(一時金) 2400圓을 하사받고, 그 후 매달 200圓씩 보조받게 되었습니다.
2400圓이나 200圓이 얼마나 큰 돈일까요? 1908년 쌀 한 되 가격이 5전(錢) 정도입니다. 100錢(전)이 1圓이므로 200圓은 20,000錢입니다. 200圓은 쌀 4,000되 가격입니다. 요즘 쌀 한 되 가격을 3,000원 정도로 본다면, 200圓은 현대 가치로 환산하면 천이백 만원 정도입니다. 돼지 가격으로 계산해보면 옛날 200圓은 지금 가치로는 천오백 만원 정도입니다. 소 가격으로 계산해보면 옛날 200圓은 지금 가치로는 3천만이 넘습니다. 옛날 200圓을 지금 돈으로 2천만원이라고 환산한다면, 이왕가(李王家)가 조양구락부에게 후원한 일시금 2400원은 4억 8천만원정도입니다. 그리고 조양구락부의 교사 월급은 20圓입니다. 그것은 현대 가치로는 200만원 정도입니다.
조양구락부의 발기인은 조양구락부의 사업 종목을 다음과 같이 결정합니다.
[본소(本所)는 명치(明治) 42년 9월 15일에 발기회(發起會)를 본소(本所) 사무원(事務員) 백용진가(白鎔鎭家)에서 개(開)하고 명칭(名稱)은 조양구락부라 하고, 구가악(舊歌樂)을 전습(傳習)하며 신악(新樂)을 조직(組織)하니, 구가(舊歌) 남창(男唱)과 여창(女唱)의 우조(羽調), 계면조(界面調), 가사(歌詞) 등이오. 구악(舊樂)은 현금(玄琴), 가야금(伽倻琴), 양금(揚琴), 생황(笙簧), 단소(短簫)와 기타 각종(各種) 음악을 포함하며, 신악(新樂)은 풍금(風琴)과 사현금(四絃琴)으로 주장(主張)하여 병악리(并樂理)의 서면(書面)으로 겸(兼)하여 교수(敎授)하며 음악보(音樂普)를 편집(編輯)하기로 하다. (1913년 10월 현재 조선정악전습소 一覽 制一 剏立 略條 原文, 장사훈. 7.)]
조양구락부의 사업 종목은 4개입니다.
1. 구가(舊歌)의 전습(傳習). 구가(舊歌)는 남창과 여창의 우조와 계면조 및 가사(歌詞)입니다.
2. 구악(舊樂)의 전습(傳習). 구악(舊樂)은 현금, 가야금, 양금, 생황, 단소와 그 밖의 각종 음악을 포함합니다. 현금은 거문고입니다.
3. 신악(新樂)의 조직. 신악(新樂)은 풍금, 사현금(四絃琴)을 주로 하되 악리(樂理)도 서면(書面)으로 가르칩니다. 풍금은 오르간이고, 사현금(四絃琴)은 줄이 넷인 바이올린입니다.
4. 음악보(音樂譜) 편집. 음악보 편집은 악학궤범의 복간, 구 악보 발간. 영산회상을 서양 악보로 채보하여 발간하는 작업을 포함합니다.
1909년 12월 29일 조양구락부는 교사와 직원을 처음 임명합니다. 남녀 창 교사는 하순일(河順一)과 이영환(李永煥)입니다. 이들이 구가(舊歌) 즉 남창 가곡과 여창 가곡, 그리고 가사(歌詞)를 가르칩니다. 구악(舊樂)을 가르치는 교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현금 교사(玄琴敎師) 김경남(金景南), 조이순(趙彛淳), 가야금교사(伽倻琴 敎師) 명완벽(1842-1929, 明完璧), 함화진(咸和鎭), 한규우(韓圭祐), 양금교사(洋琴 敎師) 김상순(金相淳), 단소교사(短簫 敎師) 이춘우(李春雨), 조동석(趙東錫).
조양구락부가 발족(發足)한 지 한 달 후 1910년 1월 20일에 교사 명단이 대한민보에 발표됩니다. 교사진이 충원되어 늘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도동(刀洞)에 재(在) 조양구락부(調陽俱樂部)에셔 각과(各科) 교사(敎師)를 선정(選定)한 씨명(氏名)이 좌(左)와 여(如)다더라.
각과 감독(各科 監督) 함재운(咸在韻),
가요부 교사장(歌謠部 敎師長) 하순일(河順一) ,
가교사(歌敎師) 신경선(申敬善) 장덕근(張德根) 이영환(李永煥),
무교사(舞敎師), 이병문(李秉文), 함화진(咸和鎭).
음악부 교사장(音樂部 敎師長) 김경남(金景南).
현금 교사(玄琴 敎師) 이병문(李秉文), 조이순(趙彛淳).
휘금 교사(徽琴 敎師) 고익상(高益相).
가야금 교사(伽倻琴 敎師) 김종석(金鍾錫), 이병문(李秉文).
양금 교사(洋琴敎師). 백용진(白瑢鎭), 김현주(金顯炷).
풍금 교사(風琴敎師) 김인식(金仁湜).]
교사진은 크게 가요부와 음악부로 나뉩니다. 가요부 교사진은 교사장과 평교사, 음악부 교사진도 교사장과 평교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교사장은 부장 교사에 해당할 것입니다. 가요부 부장 교사와 음악부 부장 교사 위에 두 과를 감독하는 각과 감독이 있습니다. 각과 감독은 교감 정도의 자리일 것입니다.
조양구락부의 교감은 함재운입니다. 가요부 교사 부장은 하순일이며, 가요 교사는 신경선(申敬善), 장덕근(張德根), 이영환(李永煥)입니다. 가요는 가곡과 가사입니다. 이것(가요)을 가르치는 교사가 한달전에는 하순일과 이영환 두 사람이었는데 2명이 추가되어 모두 4명으로 늘어났습니다. 학교가 설립된 후 가곡과 가사를 배우려는 학생들이 늘어나서 교사 2명을 더 초빙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요부에 춤을 가르치는 교사 둘이 보입니다. 이들 중 이병문은 현금 교사를 겸임하고 있습니다. 당시 춤을 추는 사람은 기생입니다. 춤 교사가 있었다는 것을 보면, 조양구락부에 기생이 춤을 배우러 왔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음악부 부장 교사는 김경남입니다. 휘금은 어떤 악기인지 알지 못합니다. 풍금 교사 김인식이 임명되었습니다. 김인식은 보성학교의 현직 음악 교사입니다. 풍금 교사가 조양구락부에 있다는 것을 보면, 조양구락부가 전통 악뿐 아니라 서양악도 가르치는 기관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11년 6월 조양구락부는 명칭을 조선정악전습소라고 바꿉니다. 조양구락부와 조선정악전습소는 이름만 다를 뿐 동일한 기관입니다. 조선정악전습소 시대는 다음 시간에 다룰 것입니다. 오늘은 조양구락부에 대해 토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