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인문학 수프
작성일 : 2022.08.12 08:26
28. 이마에 문신이 찍히고, 무초유종(无初有終)
/양선규
젊어서 소설은 좀 읽었습니다만 고전(古典) 공부는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본디 소설가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것저것 많이 보는 편입니다만(‘알쓸신잡’에서 소설가 김영하가 소설 공부의 진면목을 조금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박학함에 놀라는 좌중에게 “말씀도 마시라, 소설가들끼리 모인 자리에선 거의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저에게는 그런 공부다운 공부를 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황금 같은 시간에 친구들과 노는 일, 잡기를 익히는 일에 많이 몰두했습니다. 후회가 많이 됩니다. 우연히 역사 공부는 좀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군 복무 시절 교관직에서 벗어나 전쟁사(戰爭史) 도서관장 직무대리를 몇 달 하면서(사실상 대출 담당 실무직이었습니다) 그쪽 책들을 좀 읽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후속 공부가 없어서 지금은 다 까먹었습니다만 그때는 사이비 사학자 비슷한 ‘느낌적 느낌’이 들곤 했습니다. 그 덕에 대체역사소설(그 당시에는 그런 이름조차 없었습니다만)도 두어 편 쓸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박사 논문을 준비하는데 필요한 심리학 책들, 그리고 강의 준비에 필요한 전공 관련 책들밖에 읽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런 책들을 읽어야 할 필요가 없어진 다음에는 검도에 미쳐서 또 그쪽 도서(주로 일본책) 이외에는 다른 책들을 읽지 못했습니다.
나이 들면서 우연한 기회에 고전 독서 모임의 청강생으로 몇 년 보낼 수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논어와 장자 읽기를 조금 배웠습니다. 선학들의 도움으로 눈동냥 귀동냥, 동양 고전의 좋은 말씀들을 거의 소귀에 경 읽기 수준에서나마 좀 귀에 담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고 또 긴 공백기가 있었습니다. 검도교실을 운영하면서 몸공부의 교학상장(敎學相長)에 매달렸습니다. 남는 시간에는 실용적인 글쓰기 공부에 도움이 되는 책들을 짓는 일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다가 요즘은 옛날 고전 공부 때의 미련을 살려 한 번씩 주역(周易)을 펼쳐 봅니다. 거의 까막눈 처지에서 앞날을 내다볼 능력도 필요도 없지만, 때로 마음을 다스릴 일이 여즉 남은 탓입니다. 페이스북에 입문한 뒤로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신변잡기를 많이 써 올립니다. 쓸 때마다 "했던 말 또 하는 것 아닌가?"라는 자책이 들 때가 많습니다.
주역을 읽다 보면 문득문득 “또 이 말씀을?”이라는 느낌이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주역도 사람이 쓴 글이라 지은이의 체취가 물씬물씬 풍기는 특별한 단어나 구절이 있습니다. 마치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자주 쓰이는 말들입니다. 흔히 하는 말로 ‘저자의 기호’라고도 부를 수가 있겠지요. 주역의 저자는 주(周) 문왕(文王)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들인 무왕(武王)과 함께 주나라의 건국 시조로 숭앙되는 사람입니다. 특히 공자님에 의해서 많이 떠받들여지는 분입니다. 공자님이 본인 말씀의 출전을 밝히면서 ‘옛 성인의 말씀’이라고 했을 때 그 ‘옛 성인’ 중의 한 분으로 꼽히는 사람이 주 문왕입니다.
주 문왕이 즐겨 쓰는 말 중의 하나가 ‘이섭대천(利涉大川)’입니다. “큰 내를 건너면 이롭다.”라는 뜻입니다. 사용되는 맥락을 살펴보면, “수(需)는 믿음이 있으니, 빛나고 형통하며, 곧고 길하니, 큰 내를 건넘이 이로우니라(需有孚 光亨貞吉 利涉大川)’와 같은 방식입니다(주역 다섯 번째 수괘(需卦), ‘수천수(水天需)’). 보통은 큰 결단을 내려야 할 때나 새로운 시작을 도모해야 할 때 이 괘가 나오면 길조로 해석하곤 합니다(물론 반대로 읽어야 할 때도 많이 있고요). 주역의 화법은 특이해서 주(主) 문장보다 그 전 단계의 ‘조건’이, 그러니까 종속절의 내용이, 해석 상 더 중요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일상 화법의 원칙을 준용해서 결론처럼 보이는 문장에 현혹되어서는 안 되는 게 주역의 화법입니다. 우리말 화법을 두고 자주 하는 말 중에 “우리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끝에 가서 긍정도 되고 부정도 되는 게 우리말 표현의 특징입니다. 주역은 그 반대라 할 수 있습니다. 시작하는 부분의 어조(語調)가 주는 어떤 직관적 느낌을 잘 포착해야 합니다. 이른바 관(觀)부터 먼저 하고 견(見)으로 마무리해야 합니다. 주역의 화법은 보는(읽는) 이의 스키마에 따라서 다양한 코드와 맥락의 운용이 가능한 텍스트입니다. ‘언제든지 뒤집어 질 수 있는 언어의 성찬(盛饌)’의 끝판왕입니다. 일차독법, 이차독법, 삼차독법 식으로 문맥의 진의를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주역식 화법에서는 정해진 결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하는 농담으로 “결과는 언제나 변할 수 있다.”라는 게 주역의 유일한 결론이라고 말하고 싶을 지경입니다. ‘이섭대천’을 두고 봐도 그렇습니다. 그것이 주로 사용되는 맥락은 “빛나고 형통하며, 곧고 길하니, 큰 내를 건넘이 이롭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런 괘가 나왔다고 해도 육효(六爻) 하나하나가 각자의 의미와 조건을 고수하는 한 경문(經文)만 믿을 수는 없다는 게 또한 주역의 화법입니다. 그래서 본인 판단 하에 큰 내를 건널만한 전조(前兆)가 미약할 때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큰 내를 건너는 것이 결코 이롭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고 주역은 가르칩니다.
‘큰 내를 건너다’가 모험과 도전의 의미를 지닌 ‘새로운 시작’을 뜻한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을 즐겨 사용한 주역의 저자가 우리네 인생에서 그 ‘새로운 시작’을 매우 중요시했다는 것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주 문왕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 주역을 지었습니다. ‘어둡고 막히고 굽고 흉’할 때에 처하였으므로 누구보다도 ‘이섭대천’을 많이 생각한 것 같습니다. 당연히 그 말이 ‘저자(나)의 기호’로 돌출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 말을 쓸 때는 항상 조심스러웠습니다. 일단 한 번 강을 건너면 다시 돌아올 길이 없는 절박한 상황이라는 것은 본인 스스로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저도 비슷한 상황을 겪어 본 바가 있고, 어느 정도 살 만큼 살아본 입장이기에, 이섭대천을 언급할 때의 문왕의 그 조심스런 어조가 충분히 공감이 갑니다. 주 문왕이 그렇게 ‘섭대천(涉大川)’의 절대 필요조건을 하나씩 심사숙고했던 것이 결과적으로 그의 성공적인 ‘이섭대천(利涉大川)’을 이루게 한 한 결정적 요인이기도 했을 거라는 생각도 해 봅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이섭대천(利涉大川)’이라는 주문왕의 ‘나의 기호’가 제게는 특히 남다른 느낌을 줍니다. 문왕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처럼 저도 말년에 들어 ‘어둡고 막히고 굽고 흉’한 가운데 처해 있다고 스스로 느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한때 저의 심금을 울렸던 문왕의 또 다른 ‘나의 기호’, “적중불패(積中不敗) - 가운데에 쌓아서 실패하지 않는다.”와는 또 다른 느낌입니다. ‘적중불패’는 이미 ‘막히고 굽은’ 상황에서 벗어난 때의 ‘나의 기호’입니다. ‘이섭대천’에 비하면 아주 작은 반성과 다짐의 말이라 할 것입니다. 심사숙고해서 ‘큰 내를 건너는’ 타이밍을 제대로 찾고 과감히 실천에 옮겨 ‘어둡고 막히고 굽은’ 상황을 타개한 연후에 필요한 덕목이기에 비중이 그만큼 감소되는 것입니다. 건너기에 성공한 연후에는 중용의 도를 잃지 않고 ‘섭대천’의 전과 후를 잘 갈무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입니다. “큰 수레는 가운데에 쌓아서 실패하지 않는다(大車以載 積中不敗).”라는 ‘화천대유’ 괘는 문왕의 심사(心事)가 어느 정도는 안정감을 회복한 뒤의 표현일 것이라 짐작됩니다. 주역에서 만나는 아름다운 문장 중의 하나가 그것이라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라 짐작합니다.
오늘은 주역 서른여덟 번째 규괘(睽卦)를 읽습니다. 현재까지 본 주역 괘 중에 ‘화택규(火澤睽)’, 규괘(睽卦)만큼 살벌한 괘가 없었습니다. 단전(彖傳)이든 상전(象傳)이든, 그 해석이 종횡무진 난해합니다. 위로는 불길이 치솟고, 아래로는 물길이 준동하니, 일이 모두 서로 어그러져 보기 흉할 뿐입니다. 이 역시 주역의 화법입니다. 앞부분의 살벌함이 뒷부분에 약간씩 첨부된 ‘위무(慰撫)’를 허언으로 들리게 합니다. ‘허물이 없으리라’, ‘도를 잃지 않음이라’, ‘마침은 있느니라’, ‘뭇 의심이 없어짐이라’ 등으로 효사의 말미가 장식됩니다만 크게 울림을 주지 않습니다. 경문에는 (전체적으로 흉하니) 오직 작은 일에만 길함이 있을 뿐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흉하기만 한 전체적인 괘의 아우라를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습니다. 육삼의 효사 한 구절만 인용하겠습니다.
...육삼(六三)은 수레가 당겨지고 그 소가 끌리며, 그 사람이 이마에 문신이 찍히고 또 코를 베이니, 처음은 없으나 마침은 있느니라. (六三 見輿曳 其牛掣 其人 天且劓 无初有終) [왕필, 임채우 옮김, 『주역왕필주』, 도서출판 길, 1999(2쇄), 295쪽]
일이 모두 어그러지면 흉한 일만 생깁니다. 수레를 끌고 가던 소가 오히려 뒤로 끌려 나가고(뒷걸음치고), 수레 옆에 섰던 사람들은 참혹한 형벌에 노출됩니다. 본디 흉한 일에 당면해서는 그 ‘처음’이 어딘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법입니다. 마치 작금의 정치판이 연상되는 대목입니다. ‘이마에 문신이 찍히고’, ‘코를 베인’ 정치 그룹들은 반드시 ‘처음’에 대해서 명료한 자의식이 있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물론 시절을 잘 만나 ‘이섭대천’을 꿈꾸는 반대 그룹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기분에 들떠 ‘적중불패(積中不敗)’를 도모하겠다는 다짐을 남발할 때가 아닙니다. ‘이섭대천’이든 ‘적중불패’든 ‘마침’의 필수조건들은 자기 반성이 절절히 이루어진 자들에게만 자신의 결론을 보여주는 주역의 화법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소설가/ 대구교대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