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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2.07.08 10:59
浿江無情
조지훈
平壤을 찾아와도 平壤城엔 사람이 없다.
大同江 언덕길에는 왕닷새 베치마 적삼에 蘇式長銃을 메고 잡혀오는 女子 발치산이 하나.
스탈린 거리 잎지는 街路樹 밑에 앉아 외로운 나그네처럼 갈 곳이 없다.
十年前 옛날 平元線 鐵路 닦을 무렵 내 元山에서 길떠나 陽德 順川을 거쳐 걸어서 平壤에 왔더니라.
주머니에 남은 돈은 단돈 十二錢, 冷麵 쟁반 한그릇 못 먹고 쓸쓸히 웃으며 떠났더니라.
돈 없이는 다시 안 오리라던 그 平壤을 오늘에 또 내가 왔다 平壤을 내 왜 왔노.
大同門 다락에 올라 흐르는 물을 본다 <浿江無情> 十年 뒤 오늘! 아 가는 자 이 같고나 서울 最後의 날이 이 같았음이여!
-1950.10
-시집 『역사 앞에서』에서
<시작의 배경>
조지훈(1920-1968) 시인은 1948년부터 고려대학교 문과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하다가 6·25 전쟁이 발발하자 곧 발족한 문총구국대의 기획위원장을 맡았으며, 대구에 머물 때에는 공군종군문인단의 부단장을 맡았다. 그리고 앞에 언급한 것처럼 대구에서 부산으로 내려와 유치환 시인의 부산 집을 방문하기도 했으며 그 때의 소회를 「 靑馬寓居有感」(1950.9.5. 부산)이라는 시로 남겨놓고 있다. 조지훈 시인은 1950년 9월 최태응, 오영진, 박화목 등과 평양방면으로 종군하였다고 회고되고 있으나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한 것이 1950년 10월 1일이었고, 유엔군 3개 사단이 대동강을 도하한 날이 10월 20일이며 미 제1군단이 평양에 군정을 실시한 날이 10월21일인 점을 감안하면 9월이 아니라 10월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는 대구에 머물며 9월에는 대구근교와 경북의 격전지도 종군하였다. 그리고 1951년 4월에는 여의도 공군기지에 최인욱과 함께 7-8일 머물면서 전투상황도 취재하고 조종사들과 좌담회도 하였다.
그러나 조지훈 시인은 종군시를 재빠르게 시집에 수록하지는 않았다. 그의 제2시집 『풀잎 斷章』(1952, 창조사,이 시집은 1946년 에 발간한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발간한 3인집『靑鹿集』에 이은 실질적으로는 첫 개인시집임)에도 한 편도 실려 있지 않고, 이어서 발간한 『趙芝薰詩選』(서울, 정음사,1956)에도 수록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59년 발간한 제3시집 『歷史 앞에서』(서울, 신구문화사)에 비로소 수록한다. 이 때문에 그 스스로 종군시를 일종의 경우의 시(Occasional Poem) 즉, 행사시로 평가절하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종군시를 결코 과소평가를 할 수 없으며 몇 편은 그의 대표작으로 평가하기에 부족함이 전혀 없다. 종군시는 이 시집의 3부 <戰塵抄>에 17편이 수록되어 있다.
<작품 분석>
「패강무정」은 그의 종군시 가운데 평양행이 제재가 된 작품이다. 그는 박화목, 오영진, 최태응과 같이 북진히는 국군을 따라서 평양까지 종군하였다. 일행 4명 가운데 오로지 조지훈 만 경북 영양 출신이고 나머지 셋은 (박화목;황해도 황주, 오영진;평양, 최태응;황해도 장연) 북한 출신이다. 다만 초대 국회의원이었던 부친 조헌영이 6·25 전쟁에 납북되어 그를 찾으며 종군하였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는 「奉日川 酒幕에서」(1950.10)라는 시에서는 ‘평양을 찾아간다. 임을 찾아서. 임이사 못 뵈와도 소식이나 들을까 하고……’라고 그 속내를 내비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막상 평양에서는 그러한 감정은 숨기고 텅 빈 평양 풍경을 담담하게 형상화 하고 있다.
「패강무정」에서 패강은 대동강의 옛 이름이다. 조 시인은 이 시에서 한 문장을 한 연으로 하고 있으며 한 문장이 한 행으로 끝나는 경우가 있으나 행 구분은 따로 하지 않고 있다. 첫째 연 서두에서 모두다 도시를 버리고 떠난 적막한 평양 풍경을 ‘사람이 없다’라고 담백하게 표현하고 있다. 둘째 연에서는 숨어 있다가 체포된 북한 여군 병사가 등장한다. 다시 셋째 연에서는 외로운 나그네로 갈 곳이 없다고 술회한다. 넷째 연부터 여섯째 연까지는 10년 전 그의 나이 20세 때 평양 왔던 추억담이다. 그래서 ‘왜 내가 다시 돈 없이 왔노’라고 자문하면서 감정을 어느 정도 억제한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째 연에서 대동문 다락방에서 강물을 바라보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 다. 그것도 평양 패전의 모습이 서울 후퇴의 풍경과 유사하다고 본다. 서울과 평양 즉 남과 북 그곳이 어느 쪽이던 패주한 후는 도시는 텅 빔으로 적막감이 든다고 인식했다. 말하자면 전쟁의 패주는 남과 북이 같다는 점에서 동질성 회복이라는 과제가 대두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전쟁의 승리나 전투의 치열함에 흥분하지 않는 점에서 근원적으로는 전쟁을 부조리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평화주의나 남북의 분단극복 그리고 통일지향성을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