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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일현의 책상과 밥상 사이

<책상과 밥상 사이> 67.새까만 마스크 사진을 보며

작성일 : 2022.07.04 11:27

새까만 마스크 사진을 보며

 

/윤일현

 

 

최근 카톡으로 사진 한 장을 받았다. 지난 9일 법원 인근 빌딩 방화 사건 발생 당시 같은 건물에 계셨던 분이 보냈다. 법조계 고위직을 지낸 존경받는 변호사로 산전수전 다 겪은 분이다. 새까만 마스크 사진 설명도 곁들였다. “4층에 있던 우리는 연기가 올라오자 마스크를 쓰고 10여 분 기다리다가 구조됐습니다. 평소 우리를 불편하고 답답하게 하던 마스크 덕분에 살았던 것 같습니다.” 사진을 보며 전화를 걸었다. 우리는 먼저 너무도 황당하게 유명을 달리한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었다. 온전하게 살아남은 것을 두고 축하한다같은 말도 하지 않았다. 희생된 분들을 생각하면 나는 살아서 감사하다는 말조차 할 수 없었다. 그냥 다행이다라고만 했다.

 

지난 5월 어느 날을 떠 올렸다. 아는 지인 몇 명이 천주교대구대교구청 성직자 묘지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조금 일찍 성모당에 도착했다. 나는 살아생전 존경하던 신부님이 그곳에 계셔서 인사드리러 갔다. 묘지 입구 대문의 조적 기둥 양측에는 라틴어로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HODIE MIHI, CRAS TIBI 호디에 미히, 크라스 티비)’ 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간혹 이 문구를 떠올리지만 우리는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만 말 할 수 있다. 나의 죽음과 그 과정, 느낌은 말할 수가 없다. 하지만 죽음은 밤낮으로 내 곁에 있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그의 저서 위험사회에서 현대사회가 가지는 위험의 특징은 통제 불가능성과 불확실성이다라고 했다. 위험사회에서의 위험이란 개인적인 의도나 의지와는 무관하며 일단 한번 촉발되기 시작하면 인간의 제한된 능력으로는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급속하게 확장되는 경향이 있다.

 

울리히 벡은 근대사회는 불평등을 극복하고, 평등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한 시대였지만, 현대는 무수한 위험과 각종 재해 앞에 누구나 평등하게 노출된 사회라고 지적한다. 위험사회에서 위험은 민주적이다. 과거에 인간이 마주한 위험은 경제적 궁핍에서 비롯된 굶주림과 아사 등 계층적으로 차별화된 위험이었다. 근대화 과정에서 생기는 환경오염이나 원전 폭발사고 등의 위험은 권력이나 자본, 재산과 관계없이 모두에게 평등하다. 오늘의 황사나 미세먼지, 스모그, 대형 빌딩의 화재 등은 누구에게나 비슷한 확률로 다가온다. 과거에는 대부분의 위험이 제한된 공간 안에서 국지적으로 발생하고 대개 그 안에서 해결됐다. 지금의 위험은 국경을 넘어 전 지구적으로 광범위하게 확산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더 이상 과학을 맹목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 근대 이후 만능해결사로 신성시되던 과학이 이제는 끊임없이 증가하는 위험 앞에서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위험을 증가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산업화가 가져온 인간성의 파괴와 황폐화는 과학으로 극복하기가 어렵다.

 

불평등한 계급사회의 꿈은 모든 사람이 파이를 공평하게 나누어 먹는 것이다. 반면에 위험사회의 유토피아는 모든 사람이 위험에 노출되거나 중독되지 않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울리히 벡은 우리가 코스모폴리탄적인 자세로 다원적이고 복합적인 시각을 가져야 위험과 불확실성을 줄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언제 어디서 마주하게 될지 모르는 잠재적, 구체적 위험에 대한 국가, 지역, 개인적 차원의 대비책이 마련돼야 한다는 말이다. 각종 위험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대비책이 없으면 사회의 안정과 지속적인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 사회에는 이미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불안하고 불만에 가득한 사람들이 개인 또는 집단으로 심각한 파괴적 행동을 일삼고 있다. 극단적인 불안감과 불만은 비합리적 신비주의나 광신 상태, 또는 극렬한 파괴주의로 발전할 수 있다. 반면에 불만과 불안을 추동하는 힘은 잘만 다스리고 방향을 제대로 잡으면 창조적 에너지가 될 수도 있다.

 

위험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의 유대와 협력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의 징후와 전조를 찾아내 항상 점검하며 비상사태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지엽말단적인 일에도 쉽게 분노하는 우리의 성향을 고려하여 합리적 해결책을 존중하고 생명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 조성을 위한 교육도 꼭 필요하다. 다시 한번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신 분들의 명복을 빌며 유족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