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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바다와 섬 그리고 등대 이야기(2))

작성일 : 2025.02.04 02:13 수정일 : 2025.02.04 02:16

<1부에 이어서>

4. 존 맥리비 브라운(John Mcleavy Brown)의 등대건설 역할

 

존 맥리비 브라운(18351926)은 영국 아일랜드 리스 번의 마게라갈에서 태어나 벨파스트 퀸스 대학교와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교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맥리비 브라운은 1861년부터 1872년까지 주청 영국공사관 서기관으로 근무하다가, 1873년 청국 총세무사 로버트 하트에 의해 발탁되어 청국 남경, 대만, 진강(鎭江), 상해, 하문, 구룡 등 남부지역 여러 해관의 세무사로 20년간 근무하다가, 1893. 10. 15. 조선으로 오게 되었다.

 

맥리비 브라운이 조선에 오게 된 계기는 1893. 7. 전임 조선 총세무사 모건(F.A.Morgan)이 신병 치료를 위한 귀국 요청에 따라, 후임으로 청의 총세무사 하트(R. Hart)의 추천으로 조선의 제 5대 해관 총세무사로 조선에 부임하여 탁지부 고문직까지 겸임하면서 조선의 재무행정과 관세행정 및 금융화폐 정책 등 경제분야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브라운은 관세 수입을 수도공사와 등대건설 등 항만공사 비용으로 할당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입안을 하여 고종에게 허락을 받았으며, 개항장의 신설이 조선의 국가 개발상 이익과 관세수익의 증대로 재정난을 해결할 것이라며 개항의 필요성을 주장하여 1897. 10. 목포, 진남포의 개항을 시작으로 성진, 옥구, 창원 및 의 개항과 용암포 개항을 추진하였다.

 

1900. 9월부터 브라운은 차관을 도입하여 한반도 주변에 등대를 설치할 계획을 준비하였고 이듬해 등대 건설 사업을 주도하기 위하여 인청해관에 등대국이라는 조직을 설치 하였으며, 일본이 조사 측량하여 제안한 등대건설 제안을 등대건축전문가로 청국 해관에 근무하는 존 레지날드 하딩을 초청하여 일본의 등대 설치 제안을 전반적으로 재검토하여 190232개소의 등대 계획을 입안하고 1905. 11. 까지 총세무사로 재임하는 동안 팔미도등대 등 물포 6개의 등대를 건설하는 등 대한제국의 초기 등대 건설에 공헌하였다.

 

브라운은 탁지부의 고문으로서 한성의 도로정비, 경운궁의 보수, 석조전 계획, 탑골공원 등 공원의 조성 및 시장의 설치, 수도사업의 추진 및 철도사업 등의 업무등을 수행하여 행정적인 차원에서 유능하고 실력있는 인물로 평가 받기도 한다.

 

반면에 관세 수입을 고종에게 상납금 형태로 제공하고, 관세를 둘러싸고 브라운과 조선 대신들 간의 갈등 등 관세 수입의 전횡적 사용과 영국, 일본 양국의 이익과 권한을 대변하며, 조선을 침투하는 열강의 안내자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비판도 함께 받는 평가 등을 함께 검토해볼 때 대한제국의 등대 건설 최초 공헌자로서의 추천하기에는 고려해야할 사항도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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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에 의해 제안된 등대 리스트

존 맥리비 브라운

 

5. 존 레지날드 하딩(John Reginald Harding)의 등대 건설참여

 

레지날드 하딩(1858~1921)1858년 영국 몬마우스(Monmouth)의 더 헨드르(The Hendre)에서 태어나 말보르(Marborough) 대학에서 공학을 공부하고 졸업 후 1880년부터 청국 세관 총세무사인 Hurd의 초청으로 청국 해관에 서 시베이산등대의 조립을 위해 영조사(營造司, Assistant Engineer)로 입사하여 1908. 5. 까지 총공정사(總工程師, Engineer-in-Chief)로 근무하면서 중국의 해안선 등대 건설과 공공 시설물을 설계하고 건축하였다.

 

청국에서는 퉁충도(東湧島)등대, 옌타이산(煙台山)등대 등 9개의 등대 건설과 해관과 관련한 다양한 건물, 선박, 항만 등의 설계 건축을 하였으며, 특히, 체푸(현재의 엔타이)의 항만시설, 등대의 역할을 하는 등선(燈船)을 디자인하였으며, 칭타오에 새로운 항구를 선정하였고, 칭타오 항구의 기초를 건설하기 위한 설계를 하였다.

 

1898년에는 중국에서의 경험과 당시 중국 해관에 예속된 대한제국 해관의 지원을 위하여 대한제국의 목포항 개항을 위하여 해벽과 부두 건설의 설계를 담당한 것으로 기록되어있으며, 18973월에 덕수궁 석조전의 사전 조사 기록과 1898. 2. 20.에 서명된 하딩의 석조전 설계도면이 발견된 내용에 비추어 하딩은 1897년부터 1898년까지는 청국해관과 조선해관을 오가면서 근무를 한 것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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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 3. 11.총세무사 브라운상하이해관의 하딩에개 보낸 암호전보문으로 하딩에게 10일간의 긴급 휴가를 받아 방문할 수 있는지를 묻고 있다.

19051120, 하딩은 샹하이해관에서 그동안 대한제국에서 수행했던 컨설팅 내용을 보고서에 담아 제출했다. 이 때 그의 직책은 한국 등대국 컨설팅엔지니어라고 적었다.

하딩의 초청과 대한제국에서의 역할 관련 문서

 

1903년에는 대한제국 등대국 컨설팅 엔지니어로 임명된 이래 동해에서 남해까지 등대 건축예정지를 돌아보고 맥리 브라운의 등대 건설을 도와서 1903년에 소월미도등대와 팔미도등대, 1904년에 부도등대와 대화도등대를, 1905년에는 거문도등대와 칠발도등대를 건설 점등하는 등 총 6개의 등대를 완공하였고, 41개소의 등대, 17개의 무적(霧笛), 가스 부이 10개소, 등대선 1척을 제안했다.

 

1905. 11. 17. 러시아와의 해전에서 승리하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해간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대한제국에서 고용되었던 외국인들을 전부 해임함에 따라 히딩도 청국 상하이해관으로 돌아가 근무를 하다가 1908. 5. 사직하고 영국으로 귀국하였다.

 

하딩은 상하이해관으로 복귀한 1905. 11. 20. 대한제국에서 등대컨설던트로 재임하는 동안 수행하였던 컨설팅한 내용을 보고서에 담아 상하이해관에 제출하였다.

 

하딩이 대한제국의 등대를 직접 설계하였다는 기록은 없으나, 덕수궁 석조전의 설계나 중국에서의 9개의 등대 설계 경험 등에 비추어 대한제국의 등대 컨설던트로서 설계와 시공에 영향력을 발휘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하딩은 청국해관에 소속되어 등대와 해관과 관련있는 건축물 및 항만구조물을 등을 담당한 전문적인 엔지니어로서 정치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고 대한제국의 초기 6개의 등대 건설에서의 건설팅 역할을 하였다는 기록 외에, 관련 자료가 미흡하고, 하딩의 근무 소속이 청국 해관으로 대한제국에는 파견된 신분으로 한국 등대의 최초 공헌자라고 추천하기에는 다소 미흡한 부분은 있다고 생각한다.

 

6. 조선에서의 최초 등대 건설에 관한 이론(異論)

 

현재,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등대는 1903. 6월에 점등한 팔미도등대와 소월미도등대라고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으나, 일본의 이시바시가 조선의 연안을 측정하고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인천 월미도에는 조후표(潮候標)가 설치되어있었고, 인천 백암에는 석조입표, 부산에서는 제뢰(鵜瀨)에 석조입표가, 등무다리 암초에는 철조입표가 설치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부산의 총세무사서리 피리(A. Théophile Piry1850~1918) 1887. 4. 9. 항해고시로서 부산항의 항계(港界)를 정하여 선박회사를 비롯한 각국 공관에 알렸는데, 고시된 내용은 부산항에 도등 1(동구 초량동 구봉산), 해관등대(해관청사 지붕)초량항 방파제등대를 점등하고 부산항 입구 암초 2곳에 입표(등무다리암, 제뢰)를 설치하고, 설치된 등대의 경위도 위치와 가시거리, 등명기 색상, 고도, 점등년월일 까지 자세한 정보가 고시된 사항을 보면 공식적인 대한민국의 최초의 등대는 부산항도등과 초량항 방파제등대이며, 최초 등대의 설치년도는 188749일 이 공식적인 기록이다.

 

조선에서의 최초 등대 설치에 관한 외국의 기록은 영국의 언론매체인 ‘THE LONDON GAZETTE’의 기사에서 ‘Sinsoryo(신초량)의 도등, 세관의 항만등, 채널과 피너클락의 비콘이라는 제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일본해군 수로부에서 1894년에 발간한 조선수로지에도 부산항의 등대를 도등간(導燈竿) : 신초량. 전등(前燈) 부동홍색, 후등(後燈) 부동백색, 초량등간(草梁燈竿) : 세관 옥상 부동홍색, 세관전면 부동녹색, 제뢰(鵜瀨) : 높이 20피트 흑백종선 입표, 등무다리암 : 철주입표. 홍색등롱.20)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이외에도 London And China Telegraph1887. 10. 22.기사와 영국해군에 의해 1894년에 간행된 ‘The China Sea Directory, vol. IV’에도 상세하게 게재되어 있다.

 

주한일본공사관 기록 1898. 5. 4. 부산일등영사와 일본공사가 부산해관조직에 관해 의견을 제출한 문서에 보면 조직 인원중에 燈臺番(등대번) 1명이 현행대로 편성하고, 항장대리 겸 감정관대리는 부장의 지휘에 따라 출입 화물의 검사, 평가, 항내 단속, 등대·뇌표(입표) 단속, 측후 토지 가옥 및 소주 수선, 감리 및 감정리, 기타 수부, 고원 등의 근태를 감독한다는 것을 볼 때 1887년 등대 설치 이후 부산해관에서 등대의 유지관리를 위한 인원이 배정되어 관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상기 기록 등을 비추어보면, 대한제국에서 등대 설치에 대한 정책을 수립하여 설치한 최초의 등대가 1903년에 설치된 팔미도등대 일뿐 국내외에서 공식적인 문서로 기록된 등대는 부산의 도등과 초량 방파제등대, 제뢰입표와 등무다리입표가 최초의 항로표지이며, 항로표지의 기술 측면에서도 등대보다는 도등의 설치 기술이 어렵고 뛰어난 기술이 필요하다.

 

188749일에 설치된 등대는 누가 설치하였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1886년 부산해관의 세무사서리로 부임한 피리가 역할을 담당하였을것으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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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포 초량 왜관도

1890년 경 부산해관 선착장

(붉은 원안에 등대가 설치)

 

7. 한국인으로 초기 등대 건설 공헌자 검토

 

. 강문형(姜文馨, 1831~ 미상)

 

조선 정부에서는 1881년에 세계 정세 변화에 대응하고 근대화를 추진하기 위해 서구 문물과 제도를 직접 조사하고 배우기 위해 조사 시찰단(朝士視察團)을 조직하여 일본을 방문하였다.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12명의 조사(朝士)를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조사 1명 당 수행원 2, 통역 1, 하인 1명 등 5명 정도의 인원으로 1개 반을 구성하였으며 전체 12개 반 62명의 인원이었으며, 선발된 12명의 조사는 강문형을 비롯한 조준영, 박정양, 엄세영, 조병직, 민종묵, 이헌영, 심상학, 홍영식, 어윤중, 이원회, 김용원 등이었다.

 

조사시찰단은 410일 부산을 출발하여 다음날 나가사키에 도착한 후 나가사키 - 아카마세키- 오사카 - 고베 - 요코하마의 경로를 거쳐 428일 도쿄에 도착하였다. 이후 약 74일간 일본에 체류하면서 각 관서를 시찰하였다.

 

조사시찰단의 12명의 조사들은 일본의 각 관서를 분담하여 조사하였으며, 강문형은 공부성, 조준영(문부성박정양(내무성.농상무성), 엄세영(사법성). 조병직·민종묵(외무성). 이헌영(세관심상학·홍영식(육군), 어윤중(대장성-수원:유길준,윤치호).이원회·김용원등이었다..

 

이들이 시찰한 시설로는 등대를 비롯하여 포병공창, 진대, 조선서, 조지소, 조폐소, 인쇄국, 방적공장, 제사소, 양잠소, 광산, 도기소, 초자제조소, 피혁장, 육종장, 도서관, 서림, 박물원, 박람회, 맹아원, 병원, 신문, 화폐, 우편, 전신, 전기, 천문소, 각종 학교등의 시설물과 관제, 군제, 세제, 세관, 통상지법, 도량형, 형법, 경찰제도, 감옥 등의 관제를 함께 조사하였다.

 

강문형은 공부성을 조사하고 귀국하여 일본국공부성시찰기(日本國工部省視察記)일본문견사건(日本聞見事件)을 저술하여 외국의 선진 문물을 조선에 알리고자 노력하여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문물의 도입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를 넓혔다.

 

강문형의 일본국공부성시찰기에는 공부성의 10개국인 서기국ㆍ회계국ㆍ검사국ㆍ창고국ㆍ철도국ㆍ광산국ㆍ전신국ㆍ등대국ㆍ공작국ㆍ영선국 등의 업무 내용과 부설 대학교의 교육과정 등에 대하여 조사하여 기술하였으며, 등대국에 대한 내용은 등대국의 인원과 업무 내용인 등대, 등선, 부표 및 안개신호 등에 소개하고 각 등대의 위치, 광달거리, 도색, 구조, 높이 및 건설방법 등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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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공부성시찰기, 강문형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강문형의 일본국공부성시찰기는 대한제국에서 등대 설치 필요성에 대한 인식 전환의 기여로 맥리비 브라운의 대한제국 등대 설치 계획 수립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한다.

 

. 송헌빈 (宋憲斌, 18411923)

 

일본의 이시바시와 함께 대한제국의 연안 등대 설치예정지의 조사 측량에 참여한 송헌빈은 참서관 김낙중과 함께 1895710일 인천에서 메이치마루호에 승선하여 1895831일 원산에서 하선할 때까지 인천, 평안, 충청, 전라, 경상, 함경도 등 각 도의 연안도서를 측량하여 등대와 부표 위치를 검정하였다.

 

송헌빈은 등대 설치 예정지 작업 중에 이시바시를 농상공부 대신 김가진(金嘉鎭)과 동래감사 지석영을 접견하게하는 등의 외교적인 업무와 함께 각 지역의 측량 작업에서 지역 관헌과의 협조 등의 업무도 함께 수행하였다.

 

 

송헌빈은 공무아문(工務衙門)의 기술직으로 시작하여 당시 농상공부의 상공국장으로 재임하였으며, 일찍이 1881년에 조사시찰단의 일원으로 조사 이원회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방문하여 일찍이 근대 문물을 습득하였고, 일본인들과의 교류 경험도 있어 일본의 항로표지 설치 예정지 조사 측량 작업에는 다른 관헌들보다는 기술적인 이해도와 판단력이 뛰어났을 것으로 생각한다.

 

다만, 항로표지 설치 예정지 조사 측량에 입회한 이후 체신부 우표기기 구입을 위하여 일본 동경에 방문하는 등 일본과의 교류는 계속되었으나, 등대의 설치는 총세무사의 관할이어서 농상공부에서는 이후 등대 설치와의 관계되는 업무는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송헌빈은 조사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 방문 결과를 동경일기라는 일기체 방문 서책을 발간하여 선진문물의 소개와 수용 과정을 보여주는 등 개혁적인 성향으로 1896년 독립협회 창립 시 간사원으로 참여하는 등의 자주적인 활동을 하였으나, 일제강점기에서 중추원참의 등을 장기간 역임하고 병합기념장을 받는 등의 친일적 행동으로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 김낙준(金洛駿)

 

김낙준은 송헌빈과 함께 대한제국의 연안 등대 설치예정지의 조사 측량에 참여하여 1895710일 인천에서 메이치마루호에 승선하여 1895831일 부산에서 하선할 때까지 인천, 평안, 충청, 전라, 경상, 함경도 등 각 도의 연안도서를 측량하여 등대와 부표 위치를 검정하는데 실무자이며 통역관으로 참여하였다.

 

김낙준은 부산 지역에서 일본어 통역관으로 활동한 관료. 집안의 후예로서 개항 전에는 동래부 하급 통역관인 소통사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되며, 1881년 조사 시찰단의 조사 박정양의 통사(通事, 통역관)으로 일본에 다녀와서 신문물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김낙준은 일본공사서 번역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 부산항 번역관, 동래감리서 주사, 외무아문 주사 등 외교·통상과 관련된 실무 부서 직책을 역임하다 농상공부 참서관으로 근무 중에 대한제국 연안 등대 설치예정지의 조사 측량에 이시바시 등 일본 책임자들에 대한 통역과 송헌빈을 보좌하는 실무 담당자로서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김낙준은 이후 동래우체사장, 부산우체사장 등 부산 지역 우체사(우체국의 전신)의 장()을 역임하였으며, 이후에도 일본에서의 기동연습 시찰에 참여하는 등 일본과의 외교 업무의 통역에도 참여하였으며, 18974월 독립협회 보조금, 19072월 동래부 읍내면에 위치한 사립 정정의숙(貞靜義塾) 찬조금, 19072월 재일본단지 유학생 학자금 모집 등에 참여하였으며, 1906년경에는 발기인으로서 초량소학교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등 개혁과 교육사업에 열정적으로 공헌하였다.

 

김낙준은 일본어 통역관으로 일본에 수차례 방문을 하면서 일본의 등대와 기타 선진 문물을 일찍 마주한 경험으로 일본의 대한제국 등대 설치를 위한 조사 측량 작업에 참여를 하여, 일본의 등대설치 예정지 선정에 대한 대한제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송헌빈국장의 결정에 큰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하며, 등대 설치예정지의 조사 측량 작업 전반에 실무자로서의 큰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한다 .

 

 

. 기타

 

1887년의 부산해관의 등대 설치와 등대 유지관리 담당 직원의 내용 등에서는 자세한 기록은 없으며, 조선에서 최초의 등대와 부표 등의 사무를 관장하기 위한 조직으로는 1894년에 공무아문에 등장국이 신설되었으나, 실제적으로는 등대와 관련한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으로 주사 1인의 정원이 책정되었으나, 실제적인 업무는 이루어진 것이 없다고 보여진다.

 

실제적인 등대와 관련한 업무는 총세무사에서 등대 건설과 계획 및 통계에 대한 업무를 당당하여 일본 통감부에 통보하였다는 기록을 볼 때 전적으로 총세무사에서 담당한 것으로 보여진다.

 

조선인으로 등대근무자로 최초의 기록은 190581일 세관공사부 등대국 근무를 시작한 정관진 (鄭寬鎭, 1882?)으로 19051012일 등대감수조수(燈臺監守助手)로 인천해관에 임명된 이후 정관진 (鄭寬鎭, 1882?)으로 1905년에 부도등대, 1908년에 시하도등대와 항문도등대에 근무를 하다

일제강점기 시대에도 1927년까지 하조도, 백암, 목덕도, 주곧, 대화도, 옹도등대에서 근무를 하였다.

 

실제로 대한제국에서 등대와 관련한 업무와 담당 직원이 정해진 것은 19071213일 칙령 제49호로 등대국 관제에 관한 안건을 재가하여 반포한 후 1908년 대한제국 직원록에 의하면 국장 시마시게루(島重治) 54명의 직원이 임명되어 있는데, 54명의 직원 중 한국인은 안정기(安定基, 관직 주사(主事), 관등 판2,4, 공훈 9)와 윤형규(尹炯奎, 관직 간수(看守)), 관등 판4,7, 공훈 9) 2명이 있었으며, 안정기는 일제강점기 시데에는 지방관서에 근무를 하다가 군수를 억임하였으며, 윤형규는 1909년도에 소월미도등대를 근무를 하다가 1910년부터 1912년까지는 부도등대에서 근무를 하다 그해 1119일 퇴임을 하였다.

 

8. 마무리를 하면서

 

대한민국의 항로표지 역사는 대한민국 전체의 개방의 최일선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순수한 우리나라의 자율적이고 자주적인 입장 보다는 외세의 압력에 의해 외국의 선박들이 안전하게 우리나라의 개항장에 입출항 할 수 있도록 바닷길을 안내하는 목적에서 건설이 되었다.

 

현재, 대한민국은 국제항로표지협회에 2006년도에 처음 이사국으로 선출되어 현재까지 거의 20년간을 활발히 활동을 하고 있으며, 이러한 역할로 대한민국의 항로표지의 위상은 세계적으로 리딩 국가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국내외 적으로 대한제국 시기에 건설된 등대를 국가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있으며, 등대문화유산과 관련하여 등대유산보존및활용에관한법률을 제정 시행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대한민국 항로표지의 최초 공헌자에 대한 역사적 탐구는 필요하며, 본 연구에서는 조선시대와 대한제국 시대에서의 등대 설치와 관련한 인물을 조사하여 그 들의 공헌 또는 행적을 나열하였다.

 

대한제국의 항로표지 설치 계획에 참여한 공헌자들에 대한 공헌 사항에 대한 필자의 의견을 포함한 공헌 등의 요약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일본인 이시바시 하야히코는 조선의 등대 설치와 관련하여 설치 예정위치의 측량과 기본 설계 도서의 작성 등의 역할을 하였으나, 이는 일본의 조선 침략과 중일전쟁과 러일전쟁 등에 대비한 전략적인 행동으로 항로표지 최초 공헌자로 거론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 영국인 존 맥리 브라운은 대한제국 총세무사로 대한제국의 항로표지 설치계획을 수립하고 설치한 책임자이며, 등대 기술자인 영국인 존 레지날드 하딩을 중국해관에서 초빙하여 등대 건설 실무를 맡겨 초기 대한제국의 등대 건설에 공헌을 하였으나, 관세 수입의 전횡젓 사용과 영국, 일본 양국의 이익과 권한을 대변하며, 조선을 침투하는 열강의 안내자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비판도 함께 받는 평가 등을 함께 고려해보아야 한다.

 

. 영국인 존 레지날드 하딩은 청국 해관의 등대 기술자로서 1903년에는 청국 해관 소속으로 대한제국 등대국 컨설팅 엔지니어로 파견 임명된 이래 동해에서 남해까지 등대 건축예정지를 돌아보고 1903년부터 1905년까지 팔미도등대 등 총 6개의 등대를 완공하였고, 41개소의 등대, 17개의 무적(霧笛), 가스 부이 10개소, 등대선 1척을 제안하는 등 순수한 등대 기술자로서의 역할을 하여 대한제국의 등대 건설 최초 공헌자로 추천 대상으로 적합하나, 대한제국에서 직접 등대의 설계나 감독을 한 기록 문헌에 대한 추가적인 검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강문형은 1881년 조사유람단으로 일본의 공부성 등대국을 방문하여 등대의 설치 필요성과 등대에 관한 자세한 보고를 문헌으로 남겨 대한제국에서의 등대설치가 필요하다는 정책적 공감대를 형성 하는데 공헌을 하였으나, 이후 실제적인 등대 건설과 계획 수립에는 참여한 실적이 없어 최초 공헌자로 추대하기에는 다소 미흡하다고 생각한다.

 

. 송현빈은 일본의 이시바시와 함께 대한제국의 등대 설치예정지의 조사 측량에 참여한하여 이시바시 등이 제시한 등대와 부표 위치를 검정 등의 업무를 수행하였으나, 등대의 조사 측량 작업 이후에도 일본을 방문하는 등의 교류는 계속하였으나, 등대의 설치는 총세무사의 관할이어서 농상공부에서는 이후 등대 설치와의 관계되는 업무는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 김낙준은 일본어 통역관으로 일본에 수차례 방문을 하면서 일본의 등대와 기타 선진 문물을 일찍 마주한 경험으로 일본의 대한제국 등대 설치를 위한 조사 측량 작업에 참여를 하여, 일본의 등대설치 예정지 선정에 대한 대한제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송헌빈국장의 결정에 큰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하며, 등대 설치예정지의 조사 측량 작업 이후에는 부산 지역의 우체사장 등의 역임으로 등대 설치와의 관계되는 업무는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 조선인으로 기록에 나타난 최초의 등대근무자인 정관진은 대한제국의 등대 설치계획 수립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1905년 부도등대 근무를 시작으로 1927년까지 하조도등대 등 여러 등대에서 근무한 기록을 비추어보면 대한제국 시대의 등대 운영에 공헌을 하였다고 보여진다.

 

. 대한제국에서 실질적 등대와 관련한 업무와 담당 직원이 정해진 1907등대국 54명의 직원 중 한국인으로 윤형규와 안정기가 근무를 하였으며, 윤형규는 1909년도 소월미도등대를 근무를 시작으로 1912년 부도등대에서 근무를 하다 그해 퇴임을 는 등 대한제국 시절의 등대 건설과 운영에 역할을 한 것으로 보여지며, 안정기는 회계관련 업무를 하다가 이후 근무지를 옮겨 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등대(항로표지) 최초 공헌자에 대하여 상기 사항을 전체적으로 검토한 결과 대한제국의 등대 설치 최초의 공헌자로 한사람만을 지정하기에는 여러 이견(異見)이 있을 수 있어, 대한제국 총세무사 존 맥리 브라운과 대한제국 등대국 컨설팅 엔지니어 존 레지날드 하딩 그리고 한국인으로는 공부성시찰기를 펴낸 강문형과 등대 설치를 위한 조사 측량 작업에 참여한 김낙준과 최초의 등대 근무자인 정관진 및 최초 등대국 직원으로 근무한 윤형규와 안정기 등을 공동으로 대한제국 최초 등대 공헌자로 추대하는 것이 적절할 것으로 생각한다.

 

 

 

 

집필자 : 김민철 (공학박사)

 

인터넷신문 문예타임즈 이사, 아이플러스원 연구소장, 국가기술자격 정책심의위원회 세부직무전문위원, 중소기업기술개발지원사업 평가위원, 전 해양수산부 기술서기관,

 

공동 집필자 : 국승기(공학박사, 교수)

 

한국해양대학교 해사대학원장, 한국해양대학교 해양과학기술전문대학원장, IALA 월드아카데미 운영이사회 의장, 극동전파표지협의회 의장, 전 해양대학교 산학협력단장, 전 한국항해항만학회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