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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바다와 섬 그리고 등대 이야기

작성일 : 2025.01.27 11:52 수정일 : 2025.01.27 12:05

바다와 섬 그리고 등대 이야기

 

현재 대한민국은 경제력이나 K-문화, 체육 등 여러 분야에서 전 세계 선진국가의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와 같은 한국민족의 우수성을 펼치고 나아간 데는 전 세계와 교류할 수 있는 국가의 개방이 시작이었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인 반도국가이나, 동토의 나라로 남은 북한으로 인해 연결된 육지는 나아갈 수 없어 바다를 넘어 전 세계와 교류하면서 발전해나가야 한다.

 

본지에서는, ‘바다와 섬 그리고 등대에 관한 주제로 역사의 이면에 담긴 다양한 이야기를 펼쳐 국민들이 바다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가지도록 관련 분야에서 다년간 연구하신 전문가분들을 초빙하여 이야기를 이어나가고자 한다. 편집자 주

 

첫 번째 이야기

 

대한민국 등대 최초 공헌자에 대한 고찰

 

김민철, 국승기

 

시작하면서

 

최근, 해양수산계 학자들과 관련 연구자들 간에 우리나라 개방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등대에 관하여 역사적으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토론에서 우리나라도 외국의 사례에서 보듯이 등대 설치에 공헌한 최초의 항로표지인을 추대하여 역사적 정통성과 연속성을 가질 수 있도록 한다면 누구를 추대하는 것이 좋을까 하는 토론이 있었다.

 

토론회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 건설에 참여한 사람들로 서구인 중에서는 덕수궁의 설계자로 널리 알려진 영국의 존 레지날드 하딩(John Reginald Harding)과 대한제국의 해관총세무사 겸 탁지부 고문이었던 아일랜드 출신인 존 맥레비 브라운(John McLeavy Brown)을 후보로 올렸으며, 일본인으로는 대한제국의 등대 설치 조사와 일부 등대의 설계 및 감독에 참여하였던 이시바시 하야히코(石橋絢彦)를 추천하였다.

 

조선의 개방을 위하여 1982년부터 구미 각국(미국, 영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벨기에, 덴마크 등)과 통상조약 및 1983년 조일통상장전을 체결하면서, 대한제국에 입항하는 선박은 선세(船稅)를 납부하는 조건으로, 선세는 모두 등대와 부표(뱃길 표시물), 망루(감시대)를 세우고, ()가 정박할 장소를 마련하기 위하여 바닥을 파내고 정리하는 각종 공사비에 사용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등대 설치가 시급한 실정이었다.

 

1894년에 고종(高宗)은 중앙관제인 공무아문에 등장국(燈樁局) 조직을 신설하여 항구와 등대, 부표등의 사무를 관장하도록 기구를 개편하여 담당 인원 2(참의 1, 주사1)을 배정하였으나, 참의는 철도국장이 겸임하도록하여 실제 담당인원은 주사 1인으로 등대를 설치할 기술력과 인력 및 재정이 부족하여 실제 등대 설치로 진행이 되지 않았다.

 

2. 대한제국의 등대 도입

 

청일전쟁(1894-1895) 종료 이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한반도 연안에서 일본 선박의 항행이 증가하고 있으나 등대와 등표(암초 표시)가 설치되지 않아 항해자들의 불편을 이유로 일본 체신대신과 해군대신이 협의하여 일본항로표지관리소 체신기사 이시바시 하야히코(石橋絢彦)를 책임자로 하여 항로표지선메이지마루(明治丸)’1895629일부터 1895913일까지 출항시켜 거문도, 태종대 등 총 49개소에 대한 항로표지 건설 위치를 측량하도록 하였다.

 

일본은 조선에서 등대 설치 예정지를 측량하는 동안에 조선 관리 지원을 요청하여, 조선에서는 당시 항로표지업무의 소관 부처인 농상공부 상공국장 송헌빈과 참서관 김낙준이 파견되어 1895710일 인처에서 승선하여 모든 작업 일정을 함께하였으며 송헌빈 국장은 831일 원산에서 육로로 귀경하고, 김낙준 참사관은 94일 부산에서 하선하는 등 조선의 항로표지 건설 위치 측량 작업에 참여하였다.

 

이시바시는 측량기간 중에 송헌빈국장과 함께 귀경하여 경성의 일본 공사관에서 농상공부 대신 김가진과 면회를 하였으며, 부산에서는 동래감사 지석영을 면회하는 등 작업 사항에 대한 협의를 하기도 하였다.

 

이시바시는 조사 측량 출장 결과를 6개월 동안 설계도서 작업을 거쳐 18963월에 해군 대신에게 조사한 49개소 중 21개소에 등대 설치 계획을 선정 이유서와 설계 요령, 사양서 요령, 예산서, 부지도, 관사, 등대도면 등과 선정하지 못한 이유인 공사 곤란 사유서도 함께 첨부하여 보고하였다.

 

이시바시가 제안한 등화를 밝히는 등대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등대인 팔미도를 비롯하여 태종대, 월미도, 소청도, 옹도. 부도, 교맥도, 울도, 소유독각, 여도(麗島), 절자도(節子島), 목통도(木通島:동도東島)를 추천하였으며, 이외에도 등무다리, 백암(白岩), 흑암(黑岩), 설문서(設門嶼)드의 암초에 등화가 없는 입표를, 1607년부터 두모포 왜관이 설치되어 일본인 거류지가 있던 부산 고관(古館)에 등간(燈竿)설치를 조선정부에 제안하였다.

 

이시바시가 제안한 이후에도 등대 설치가 지연되자 1989. 9. 1. 일본 외무대신은 1898. 9. 1 조일통상장전 31관에서, “등대와 초표(암초표시)를 설치해야 한다라고 규정한 바도 있으니, 한국 정부에 대해 항해상 가장 요긴하고 중요한 곳에 등대와 초표를 속히 설치하도록 교섭하는 회담을 열고, 그 위에 브라운 씨에게도 충분한 권고와 함께 일본정부에서도 기술상 상당한 보조를 하게 될 것이라고 훈시를 하여 일본공사가 조선정부와 협의한 결과 백만원 내외의 자금이 필요하며, 세관수입으로 사용하여야하니 총세무사와 협의하도록 하였다.

 

1893년 해관총세무사 겸 탁지부 고문으로 부임한 존 맥레비 브라운(John McLeavy Brown)19009월부터 차관을 도입하여 한반도 주변에 등대 설치 계획을 일본의 조사측량 결과와 함께 구미 각국의 의견을 모아 준비하였으며, 이듬해 등대 건설의 책임자가 되어 1902년 등대 계획을 입안하였다.

 

브라운은 조선의 전 해역을 대동강·진남포 입구/ 소청도 부근/ 제물포 입구/ 군산항 입구/ 목포항 입구/ 남측 왜해항로/ 남측 내해항로/ 부산항입구, 내측/ 원산항 입구, 내측/ 성진항 등 10개 해역으로 나누어 32개의 등대 설치를 제안하였다.

 

브라운이 제안한 등대는 자매도, 서도, 소청도, 삼심도, 소월미도, 팔미도, 북장자서, 백암, 부도, 장안서, 서격열비도, 옹도, 항구사상남변(港口沙上南邊) 유부도, 소노록도, 임자도서변사(荏子島西邊沙) 무명초(無名礁). 첨항도(尖項島) 서거차도, 구침암(九針岩), 거문도, 사자도 미에프도(ミエプ) 용단(龍端) 좌사리도, 소죽도, 생도, 제뢰(鵜瀨), 고관, 여도, 갈마단(葛麻端), 성진(城津)등으로 일본 정부의 조사 측량 결과 제시한 안과 많이 다름을 알 수 있다.

 

브라운이 제시한 등대 설치 입안에는 부산고관과 제뢰, 군산의 유부도와 항구사상남변(모래등)에는 도등(道登, Leading light) 설치를 계획하였다.

 

브라운은 등대 설치 계획 수립 전 1901. 11. 25 일본의 이시바시를 대한제국에 파견 요청을 하면서 항로표지 설치 계획 수립 자문과 함께 팔미도에 등대를 설치하기 위한 등명기 견적서도 가지고 오도록 하였다.

 

브라운은 인천 제물포 해안의 8개 등대를 가장 먼저 설치할 예정이었는데, 소월미도, 팔미도, 북장자서, 백암은 1902년도에 부도, 장안서, 서격열비도, 옹도는 1903년에 순차적으로 건설하고 이후 군산과 목포, 거문도 등 서남해안의 개항장과 도서에 등대를 설치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19026월부터 제물포 4개 등대가 인천 해관의 주관으로 공사에 들어가 1903. 6. 1 서구식 최초의 등대인 팔미도등대가 점등되고, 개항장을 중심으로 해벽 및 부두, 해관과 같은 기반 시설이 마련되고 등대가 설치됨으로써 해양을 오가는 항로가 확대되었다.

 

대한제국(1987.10.12 1910.8.29.)에서 서구식 최초의 등대가 설립될 때까지의 역사를 보면 이시바시와 존 맥레비 브라운의 역할이 일견 있었다고 보여진다.

 

3. 이시바시 하야히코의 역할

 

이시바시는 조선의 해역을 직접 조사 측량하여 그 결과를 가지고 설치 대상 등대를 선정하고 등대 설계서를 기초하였으며, 브라운의 등대 설치 계획에도 자문을 하는 등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이시바시가 대한민국의 등대 설치에 공헌한 최초의 항로표지인으로 거론되는 것 자체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먼저, 일본이 조선에 등대를 설치 요청한 배경은 조선을 둘러싼 일본과 청국 및 서구 열강 들 간에 치열한 해운 경쟁이 벌어지던 상황에서 한반도 연안으로 운항하는 증가되는 일본 선박의 안전보호와 함께 1900년대 들어 일본과 러시아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한국 내 등대 건설을 서둘러야 하는 상황에서 시작되어 결국에는 일본의 한국 침략의 발판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조선에 등대 설치를 요구한 것은 일본의 조슈번이 양이(攘夷) 정책을 실현하기 위하여 서구열강 함대를 공격하여 서구 연합군에 의해 크게 패배한 시모노세키전쟁(1864)의 보상으로 영국, 프랑스, 미국, 네덜란드 등과 도쿠가와 막부가 체결한 1866. 6. 25 체결한 개세약서(改税約書) 에서 선박의 안전한 항해를 위해 일본 측에서 항로표지를 설치할 것을 명시하고, 그해 11월에 주일영국공사 파크스를 중심으로 각국이 협의하여 캐논자키(観音崎), 캔자키(剣崎) 10여 곳의 등대 설치와 관련해 강제 요청당했던 개국 경험을 조선에 적용하면서, 일본의 개방이 목적이었던 서구 열강과 달리 일본은 조선의 침탈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이시바시 아야히코는 1853년 일본 에도에 태어나서 1873년에 6년제인 공부성 공학기숙사(공부대학교 전신) 토목과에 입학하여 학업 중 요코하마 등대국에서의 실습과 수로부에서의 해상측량 및 기계공장 등에서의 실습 등과 함께 측량, 제도 등을 공부한 후 1878년에 학사학위를 받지 못하는 2등급으로 졸업하고, 1979년에 서구에서의 기술 습득을 위한 유학생 11명 중 1명으로 선정되어 1880년 영국에 유학하여 영국의 등대를 관리하는 트리니티 하우스(Trinity House)의 제임스 니콜라스 더글라스 경(Sir James Nicholas Douglass)에게 등대의 건설법을 배웠다.

 

1883년 일본으로 돌아온 이후 이시바시는 공부성 등대국의 기사로 근무하면서

일본에서 다수의 등대를 건설업무를 담당하다가,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이후조선을 침탈하기 위한 단계적 침략의 일환으로 한반도 주변을 운행하는 일본 선박의 증가를 이유로 1895. 6월부터 9월에 걸쳐 한반도 연안을 조사하고 등대를 건설하기 위한 측량을 수행하였다.

 

이시바시의 한국연안측량 출장은 당시 일본 대본영 병무총감이 명령하였으며, 출장 귀국보고는 체신대신에게하고, 체신대신이 해군대신에게 전달하는 형식으로, 일본 군부에서 한반도의 등대건설은 조선의 침탈 목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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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바시의 한국 내 등대 설치를 위한 연안 측량 출장 명령부와 귀국보고서에 대본영과 체신대신, 해군대신에게 보고한 문서

 

이시바시가 조선의 등대에 관계한 것은 1895년 한반도연안의 측량 결과로 팔미도등대 등 21개소의 등대 설치 건의를 하였으며, 이후 이시바시는 청일전쟁(1894-1895) 이후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대만을 통치하게됨에 따라 육군성 내에 임시대만등표건설부가 설치되어 이시바시가 파견되어 189611월부터 18974월까지 8개소의 등대를 잇달아 점등시키고, 이후 임시대만전신건설부 기사로서 해저전선 포설 업무 등을 담당하기도하였다.

 

일본과 러시아의 긴장이 높아지면서 한국에 있어서의 등대 건설이 필요함에 따라 1901년 총세무사 브라운의 초청 형식으로 등대 설치 계획에 자문한 기록과 1903. 4월에 압록강에서 러시아와의 국경문제로 설치하는 항로표지 설치 감독관으로 파견 요청에 대한 기록 등과 1903. 9월 거문도등대와 매가도등대 건설 감독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1906년에 건강상의 이유로 체신성에서 퇴임하고 1910년에 공수학교 교장으로 취임하게된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시바시는 일본 내에서는 기술자로서 등대 건설과 여러 토목 분야에서의 기술적 업적이나, 학문적인 성취는 인정하더라도, 일본 제국주의의 영토 침탈을 위해 군부의 명령에 따라 대한제국이나 대만의 등대 건설에 관여한 것은 사실이며,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이시바시를 대한민국의 등대 건설의 효시 또는 현대식 대한민국 등대의 공헌자라고 거론하는 것 자체가 매우 불쾌한 발상이다. <2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