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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2.05.29 11:53
봄, 고양이, 지방선거
/윤일현
작약 지고 감꽃도 다 떨어졌다. 5월이 며칠 남지 않았다. 가는 봄을 아쉬워하며 시 한 편을 떠 올린다.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29살로 요절한 고월 이장희가 24살이던 1924년에 발표한 시 ‘봄은 고양이로다’ 전문이다. 시인은 꽃가루처럼 휘날리는 고양이의 털에서 봄의 향기를, 호동그란 눈에서 생명의 불길 같은 봄기운을, 입술에서는 나른한 졸음을, 수염에서는 역동적인 봄의 생기를 발견한다. 봄의 나른함, 생동감을 이렇게 창의적으로 표현한 시는 찾기 어렵다. 고양이를 보며 봄의 본질을 직관하는 시인의 천재성에 그저 탄복할 따름이다.
몇 해 전 어느 추운 겨울날 아침, 동네 길고양이 한 마리가 현관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측은한 생각에 미지근한 물을 주니 열심히 핥아먹었다. 그날 이후 계속 찾아와서 사료를 구입해 주었다. 얼마 지나자 동네 고양이 몇 마리가 더 왔지만, 이 녀석은 기득권을 잘 지키며 대장 역할을 했다. 씩씩한 수컷인 줄 알았다. 비록 동물이지만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라고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주인공 이름을 따서 조르바라 불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암컷이었다. 조르바는 마당 구석 창고에서 새끼를 낳았다. 한 마리만 살아남았다. 봄에 태어났다고 ‘봄’이라고 불렀다. 조르바는 포획 틀로 잡아 중성화 수술했다. 중성화 이후 조르바는 활기를 잃었다. 자연의 이법에 개입한 것 같아 죄책감을 느꼈다, 그래서 새끼의 중성화 수술은 망설이고 있었는데 발정기가 오자 봄이는 집을 나갔다. 나이가 든 조르바는 지금 심한 구내염을 앓고 있다.
나는 아침마다 조르바를 기다린다. 이 녀석이 나타나면 정성껏 참치에 약을 섞어 먹인다. 그런데도 이 녀석은 내게 다가오는 일이 없다. 항상 몇 발짝 떨어져 있다가 내가 멀어지면 다가와 먹는다. “개는 잘해주는 사람을 왕으로 생각하고 따르지만, 고양이는 집사가 잘해주면 자기가 왕이라고 생각한다”라는 말이 있다. “견심으로 살지 말고 묘심으로 살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좀 잘해준다고 개처럼 꼬리를 흔들며 무조건 충성하지 말고 집사에게 오히려 도도하게 구는 고양이처럼 살라.” 멋진 말이다. 조르바는 완벽하게 나를 지배한다. 이 녀석을 보며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진부한 주제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소유욕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소유란 내 주변을 맴도는 어떤 것이 내게로 와서 나의 일부분이 되길 욕망하는 것이다. 그 대상을 얻는 순간 그 욕망과 간절함은 사라진다. 반대로 사랑에 빠지면 우리는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타인을 향한 여정을 떠나게 된다.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 내게 소속돼 내 주위를 돌길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궤도 속으로 내가 들어간다. 그 여정은 때로 슬프고 고통스러울 수 있다.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향하는 중력이다. 나는 오늘도 조르바의 관심을 끌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지방선거가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대구경북에는 치열하게 선거전을 치르는 곳이 많지 않다. 한쪽은 시간을 죽이며 당선 통지를 기다린다. 다른 쪽은 당선보다는 득표율에 더 신경 쓰는 것 같다. 한쪽 캠프는 승리가 확정적이니 잿밥에 관심 있는 선거 철새들로 북적거린다. 벌써 만세를 부르며 후보자 받들기에 여념이 없다. 이런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으니 후보자는 자신이 왕이라고 착각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유권자는 4년에 딱 한 번 주인 대접을 받는다. 선거 기간만 집사에게 도도해질 수 있다. 대구경북의 유권자는 표를 주고도 대접을 못 받는 것 같다. 결과가 빤하니 묘심으로 후보자를 대하지 못한다. 나중에 손해를 볼까 두려워 견심으로 후보자에게 충성한다. 긴장감이 없으니 선거가 재미없다. 선거 기간만이라도 모든 후보는 진심으로 유권자를 왕으로 섬기길 촉구한다. 유권자도 과장된 몸짓이나 허드레 빈말에 값싸게 반응하지 말고 도도한 묘심으로 후보자를 대하길 권한다. 날카로운 매의 눈으로 그들의 말과 행동을 주시해야 한다. 그래야 선거가 끝나도 조금은 유권자를 두려워할 것 아닌가. 오호애재, 임인년 봄이 덧없이 가고 있다.
(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