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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기행

백두대간 김유신 2

작성일 : 2025.01.14 10:47 작성자 : 김하기

백두대간 인문기행

낙동정맥 김유신 ( 2)

 

紅鬣有情還識路 홍렵유정환식노 말조차 정겨워서 그 길을 떠올렸을 뿐인데

蒼頭何罪謾加鞭 창두하죄만가편 노복은 무슨 죄라고 채찍만 때려댔는고
唯餘一曲歌詞妙 유여일곡가사묘 남은 것은 오직 한 곡조의 어여쁜 노래뿐
蟾兔同眠萬古傅 섬토동면만고부 달 속에서 함께 자리라는 가사를 만고에 전하네

고려 정승 이공승李公升(1099~1183)

 

신라는 낙동정맥의 나라였고 신라엔 김유신이 있었다. 신라는 해양의 남방문화와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온 북방문화가 접화군생한 나라였다.

당태종에게 나당연맹을 먼저 제안한 김춘추는 당시 풍전등화 신세였다. 화려했던 신라 진흥왕 시대는 가고 나라 안팎으로 여자가 왕이라고 주변 국가 백제 ·고구려 바다 건너 왜· 멀리 당나라까지 완전 동네북 신세였다.

신라 승려 안홍이 편찬한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에는 여자가 왕이 되니 도는 있으나 위엄이 없어 구한이 침략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상대등 비담과 염종 등 진골세력은 여자가 왕이란 이유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선덕여왕의 지지 세력인 김춘추에게 더욱 충격적인 사건은 사위인 김품석 대야성 도독의 잘못으로 백제에게 요충지 대야성(합천)을 빼앗겨 버렸다.

사면초가 풍전등화인 김춘추는 자신과 낙동정맥의 나라 신라를 살리기 위해 백두대간을 타고 고구려 연개소문을 찾아갔지만, 백제의 방해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만다. 고구려 관리 선도해에게 청포 300포를 뇌물로 주고 그 유명한 수궁가 내용대로 토끼 용궁에서 빠져나오듯 살아 나온다. 그리고 시대의 전략가 김춘추는 당 태종을 찾아가 나당연맹을 맺는 데 성공한다.

 

사면초가에 빠진 김춘추의 최면을 세워준 사람은 김유신이었다. 빼앗긴 난공불락의 대야성을 되찾기 위해 김유신은 백제 장군 의직에게 허위전술을 폈고, 이에 말려던 백제 의직은 대야성 밖으로 나와 전멸하고 만다. 이 대야성 탈환 과정에서 사로 잡은 장수 8명을 죽은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과 딸 고타소의 유골과 맞바꾼 것은 신라군의 사기를 높이고 김춘추와 우정을 돈독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일약 신라 귀족과 백성에게 김유신의 명성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김유신은 전략가였다. 조미곤租未坤이란 고정간첩을 이용했다. 조미곤은 태종무열왕 때 천산 현령을 지낸 인물로, 백제의 포로가 되어 좌평 임자任子의 부하가 되었다가, 신라로 탈출하여 백제의 상황을 김유신에게 소상히 고했다.
김유신은 조미곤을 통해 백제의 최고 관리 좌평 임자에게 전하게 했다.
신라가 백제에게 망하면 나 김유신을 임자가 보호해주고, 만약 백제가 망하면 임자의 신변을 김유신이가 절대적으로 보호하겠다고 전해라.”
삼국사기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조미곤은 황송스러워하며 물러 나와 여러 달 동안 처벌을 기다렸으나 아무런 일도 없었다. 그러던 중에 임자가 조미곤을 불러 백제의 많은 정보를 주었다.
조미곤은 신라로 돌아와서 백제 좌평 임자의 말을 김유신에게 전했다. 이렇게 백제 최고책임자 중 한 사람을 포섭한 김유신은 적극적으로 백제공략의 계획을 세워나갔다.

이전 신라와 백제는 필요에 따라 나제동맹 등 동맹을 맺고 고구려의 침략을 막아냈으나, 때로는 서로 철천지원수였다. 아마 지금의 남과 북의 관계였다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김유신이 선지식 원효의 조언으로 고구려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기록은 삼국유사에 많이 남아있다. 소정방이 김유신에게 보낸 편지 화란화독畵鸞畵犢을 원효가 해독하여 김유신과 신라군은 고구려군의 급습을 피했다는 유명한 이야기다.

김유신과 원효의 관계는 아주 돈독했다. 두 집안은 아버지 서현장군때부터 각별한 사이였다. 원효의 아버지 설이금은 김유신의 아버지 서현장군을 대신해 고구려 낭비성 전투에서 대신 전사할 만큼 각별한 사이였다. 원효의 할아버지 잉피공은 화랑 풍월주 시절 김유신의 아버지 서현장군을 각별히 챙겼으니 두 집안은 대를 이어 돈독한 사이였다고 말할 수 있다.

647년 진덕여왕 1년 백제군이 무산ㆍ감물ㆍ동잠의 3(지금의 김천)을 공격해 올 때 김유신은 원효에게 작전을 상의하자, 원효는 비녕자를 선봉에 세우게 했고, 비녕자는 용감히 싸우다 전사했으나, 비녕자의 임전무퇴 정신은 귀감이되어 신라군은 일당백으로 이겼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남아있다.

이후 위기때마다 김유신은 대중에게 신망을 받은 원효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백두대간 원효편에서 더욱 자세히 하기로 한다.

 

백제의 침략으로 대야성을 빼앗기고 고구려 연개소문에게 외면당한 신라는 풍전등화 신세가 되었다. 신라는 살아남기 위해서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당태종과 김춘추의 나당연맹의 조건 중 하나는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점령하고, 고구려를 공격할 때 신라가 후방에서 군량미와 보급품을 지원한다는 약속이었다. 하지만 당나라는 백제를 멸망시키고 약속에 없던 웅진도호부를 설치하여 백제를 무력 통치했다.

당나라는 지금은 동맹이지만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고 나면 다음은 신라가 당의 목표가 될 것을 예측하고 당과 싸울 계책을 무열왕 김춘추에게 진언하기도 했다.

무열왕이 "우리를 위해 적을 멸해준 그들을 친다면, 하늘이 우리를 도와주겠느냐?"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김유신은 지금 동맹이나 혈맹관계에 있다 해서 그저 무조건 의지하고 따라다니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철저한 현실적 중도의 태도를 견지했던 것이다. 국가 간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는 정말 지금도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승하하고 문무왕이 등극하자, 신라 조정에서는 더 이상 당나라와 연맹을 유지하지 말 것을 주장하는 대신들이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당나라는 고구려와 전쟁을 앞두고 신라에 많은 군량미를 요구했다. 신라는 이 땅에 들어온 당군의 식량 지원으로 백성은 풀뿌리를 먹으며 당군의 군수 물품을 지원했다고 한다. 이에 신라 대신들은 반대했으나 김유신은 노구의 몸을 직접 이끌고 당군의 군량미 수송에 앞장선다. 이유는 이러했다. 신라가 당을 돕지 않는 상태에서 고구려가 멸망하면 고구려 땅은 전부 당나라 것이 된다는 이유였다. 평양 이남을 신라가 찾아오기 위해서라도 신라가 참전을 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당시 고구려는 긴 독재자 연개소문이 지병으로 사망하고, 연개소문의 자식들 연남생 연남산, 동생 연정토의 권력 다툼으로 나라가 풍전등화 신세였다. 이를 감지한 김유신은 군량미를 당나라 이적에게 지원해 주고, 평양 이남 땅을 찾아오는데 전력을 다한다.

668년 고구려가 멸명하자 당고종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매소성(연천)20만 대군을 주둔시켜 신라를 총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미리 당의 흑심을 알고 있던 문무왕과 잘 훈련된 김유신 부대 3만은 신무기 장창 쇠뇌 등의 개발로 매소성의 당군 20만 대군을 이 땅에서 쫓아내자, 당 장군 설인귀는 기벌포로 5만의 군사를 지원했으나, 김유신에게 또 대패하고 완전히 한반도에서 손을 떼고 만다.

삼국유사에는 고구려가 멸망 한 후 소정방의 폭정을 보다 못한 김유신이 소정방을 유인하여 경상도 문경 당교 밑에서 사살하여 묻었다는 대목이있다. 당교란 소정방이 묻힌 다리란 말이다.

신당서에는 소정방의 죽음에 관하여 기록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한다.

 

김유신은 경주 김씨 진골이 득세한 신라에서, 무엇보다 가야계 김해 김씨 집안의 가풍을 중시해, 당과의 평양성 전투에서 패하고 살아 돌아온 아들 원술에게 "집안을 더럽힌 죄를 물어 목을 베소서" 라고 문무왕에게 청하는 등 강경한 태도를 보여, 끝내 아들 원술이 집안으로부터 버림받아 평생 숨어 살도록 했다.

가문의 안위를 중요하게 여기는 김유신의 모습은 훗날 죽은 지 100년이나 지나 자손들이 가야계 김해 김씨란 이유로 신라 조정으로부터 소홀한 대접을 받게 되자, 그의 무덤에서 회오리바람이 일고 탄식하는 소리가 들렸다는 삼국유사의 이야기다.

고려 현종은 신라의 김유신 · 최치원· 설총3대 개국공에 봉했다.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은 인물 열전의 총 분량(10) 가운데 3권을 모두 김유신에게 할애하고 있을 정도로 김유신을 추켜세웠으며, 조선조에서도 무묘武廟를 세워 배향해야 할 인물의 한 사람으로 추대했다.

 

단재 신채호의 주장은 김유신과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고 볼 수 없는 것이, 고구려의 장수 대조영발해라는 나라를 건국해서 고구려의 유지를 받들었으며, 신라가 고구려의 영토를 점령한게 아니라 고구려의 영토는 발해가 차지했다는 것이란 이유다. 하지만 우리는 당시 있는 그대로 볼 필요가 있다.

676년 신라는 매소성과 백강구 지역으로 들어온 당나라 장수 설인귀를 이 땅에서 완전히 쫓아내고 삼국을 통일했다는 사실과 진실이다.

화랑 시절의 김유신이 천관天官이라는 기생에게 반해 자주 그녀의 집에 드나든 이야기는 우리 모두 다 아는 이야기다. 어머니 만명부인의 꾸중을 듣고 다시는 그녀의 집으로 출입하지 않기로 맹세하였는데. 어느 날 술에 취하여 집에 돌아가는 길에 위에서 깜박 잠이 들었는데, 말은 주인이 늘 가던 대로 그녀의 집 앞으로 가서 멈추었다. 천관이 나와서 보고 반가워하고 또한 원망스러워 눈물을 흘리자, 김유신은 말에서 내려 그 자리에서 단칼에 말의 목을 베어버렸다.

신라는 해양의 남방문화와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온 북방문화가 접화군생한 나라다. 신라는 낙동정맥의 나라였고 신라엔 김유신이 있었다. 한국을 빛낸 위인 100분의 동요엔, 말목 자른 김유신 단 7자로 유명하다,

박창화의 화랑세기 필사본에 의하면 천관녀와 김유신 사이에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이 김군승이라 한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천관녀가 김유신을 애달파하는 마음을, 고려 문인 '이공승이 지었다는 천관녀와 김유신 시 한 수를 20화와 21화 들머리에 나누어 읊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