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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5.01.14 10:43 수정일 : 2025.01.14 10:47 작성자 : 김하기
백두대간 인문기행
낙동정맥 단석산 김유신
寺號天官昔有緣 사호천관석유연 천관이라는 절 이름에 사연이 있는데
忽聞經始一悽然 홀문경시일처연 새로 짓는다는 말 듣고 마음이 처연하네
倚酣公子遊花下 의감공자유화하 술기운 가득한 공자는 꽃 아래서 노닐었고
含怨佳人泣馬前 함원가인읍마전 한을 품은 아름다운 여인은 말 앞에서 울었다네
紅鬣有情還識路 홍렵유정환식노 말조차 정겨워서 그 길을 떠올렸을 뿐인데
蒼頭何罪謾加鞭 창두하죄만가편 노복은 무슨 죄라고 채찍만 때려댔는고
唯餘一曲歌詞妙 유여일곡가사묘 남은 것은 오직 한 곡조의 어여쁜 노래뿐
蟾兔同眠萬古傅 섬토동면만고부 달 속에서 함께 자리라는 가사를 만고에 전하네
고려 정승 이공승李公升(1099~1183)
낙동정맥의 길목에 위치한 신라의 오악五嶽 중 중악이라 불리던 산이 단석산이다.
김유신은 15세에 화랑이 되어 18세에 국선 풍월주에 올라 큰 뜻을 품었다. 단석산 석굴에 들어가 목욕재계하고 산신령께 풍전등화 같은 나라를 구하고 적을 물리칠 힘을 달라고 지극정성으로 기도하자, 며칠 후 산신령이 나타나 비법이 담긴 책과 신검을 주었다.
김유신이 용화향도龍華香徒 앞에서 산신령이 주신 칼로 집채만 한 바위를 단칼에 쪼갰다 하여 ‘단석斷石’이라 산 이름을 붙였다. 김유신이 단칼에 쪼갰다는 바위는 지금도 산 정상에 두 조각난 채 역사의 진실을 대변하고 있다.
* 용화향도: 김유신이 이끄는 낭도집단. 화랑 1명에 승려낭도 1명, 800명의 낭도로 구성되었다.
백두대간 낙동정맥을 타고 환웅천왕 이후 많은 영웅들이 이 땅에 왔다 갔지만, 필자는 김유신 만 한 인물은 없다고 생각해 집중적으로 다루어볼까 한다. 혹자는 김유신의 삼국통일 과정을 비판하는 분도 있지만, 단도직입적으로 김유신이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티베트나 신장위구르처럼 당나라에 합병되어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란 진실을 직시해야 한다.
김유신의 증조부는 가락국 10대 구형왕이며 외증조모는 지소태후로 신라 23대 법흥왕과 보도부인의 딸이다. 혈통을 중시하던 시대 혈통 하나만큼은 신라와 가야를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다. 모친은 그 유명한 말목을 잘랐다는 역사 어린이 동화에 나오게 된 만명부인이고 아버지는 진골로 변방의 태수 서현장군이다.
삼국사기 인물 열전 10권 중 1/3이 김유신에 관한 기록이다. 사후 신라 왕이 아닌데도 왕릉 중에서 가장 화려했고, 둘레돌 12지신상이 가장 정교하다. 160여 년이 지나 흥덕왕 10년 835년에 ‘순충장렬 흥무대왕純忠壯烈 興武大王’의 시호가 추증되었다. 왕이 아닌 사람이 죽어 왕이 된 사람은 우리 역사상 김유신뿐이다.
*
실눈을 크게 뜨자, 백두대간을 타고 끝없이 연결된 낙동정맥의 산마루가 파도를 타듯 여명 속에서 서서히 밀려오고 있었다. 긴 장마가 끝나고 오늘부터 맑다는 뜻이다. 동굴 속에서 가부좌를 튼 채 김유신은 앞에 있던 보검을 들었다. 며칠 전 단석산 산신령이 준 보검이다. 칼을 뽑아 두 손을 눈높이까지 치켜들었다. 시퍼런 칼날 위에 대간의 산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18세에 국선에 오른 풍월주 김유신은 다시 자신의 마음을 다졌다.
세속오계의 삼매경에 빠져있던 김유신을 깨운 자는 낭도 백석이었다.
“풍월주, 참선을 시작한 지 두어 식경이 지났소이다. 낭도 모두 조반을 마치고 풍월주를 기다리고 있사오이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김유신은 멋쩍은 듯 말문을 열었다.
“해가 중천에 떴구나. 내가 삼매경에 빠져있었구먼. 미안 하이.”
낭도 백석은 얼굴에 흑심을 감추고 은밀하게 김유신에게 아뢨다.
“풍월주, 첩자의 전갈에 의하면 고구려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고 합니다. 이제 장마도 끝났으니, 소인이 풍월주를 모시고 직접 고구려 땅을 염탐하고 오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소인이 북쪽 고구려 지리에 밝아 며칠이면 고구려 군을 염탐할 수 있사옵니다.”
낭도 중 총명한 백석의 제안에 김유신은 단번에 응했고, 그날 밤 달이 밝아 같이 북으로 떠나기로 했다.
해거름 단석산 토굴을 나선, 김유신과 백석은 골화천(영천)고개 들머리에서 웬 아리따운 처녀 세 명을 만났다. 나이도 비슷한 다섯 사람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주고받다 골화천 고갯마루에 다다랐다. 앞서 길을 잡아가던 백석이 바위에 앉아 잠시 쉬는 사이, 세 여인은 김유신에게 은밀히 할 말이 있다고 숲속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낭도 백석은 바위에 앉아 쉬고 있고 김유신이 숲속으로 세 여인을 따라가자, 세 여인은 산신령의 모습으로 화현하며 말했다.
“풍월주, 낭도 백석은 고구려 첩자로 풍월주를 꾀어 고구려로 잡아가려 합니다. 절대 따라가면 안 됩니다.” 하며 알려 주는 것이었다.
놀란 김유신이 합장하고 감사하다고 머리를 조아리자, 세 여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김유신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숲속을 나와 낭도 백석에게 말했다.
“이보게 백석, 내가 깜빡 중요한 문서를 집에 두고 왔는데, 다시 집으로 돌아가 빨리 문서를 가지고 오자.” 하며, 집으로 급히 돌아가 백석을 잡아 문초하자, 백석은 이실직고했다.
낭도 백석은 원래 고구려사람으로, 영양왕때 홍수로 고구려 국경의 강물이 역류하여 많은 사람이 죽는 천재지변이 발생했다.
영양왕은 추남이라는 점쟁이를 불러 점을 치게 했다. 추남은 천재지변의 원인을 이렇게 아뢨다.
“폐하, 큰비가 오고 홍수가 난 것은 왕비께서 음양의 도를 거스른 까닭에 이런 변고가 생겼나이다.”라는 점괘를 내놓았다. 노한 왕비는 영양왕에게 터무니없는 말이라며 다른 것으로 시험해 보고, 맞지 않으면 추남을 중형에 처해야 한다고 소리를 마구 질렀다.
영양왕은 쥐 한 마리를 상자에 숨겨놓고 추남에게 상자에 든 것이 무엇이냐 물었다.
추남은 단번에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폐하, 상자 속에는 쥐가 여덟 마리 있사오이다.”
영양왕은 쥐가 한 마리라고 상자를 열어 보여주며, 추남의 목을 당장 벨 것을 명했다.
졸지에 처형당하게 된 추남은 마지막으로 말했다.
"억울하오, 상자 속 쥐는 분명 여덟 마리오다. 나는 반드시 다른 나라의 대장으로 환생해, 고구려를 멸망시킬 것이오." 라는 저주의 말을 남기고 처형당했다. 추남을 죽이고 나서 미심쩍은 생각이 든 영양왕이 쥐의 배를 갈라보게 했는데, 쥐의 뱃속에는 새끼가 일곱 마리 들어있었다. 추남의 점이 사실임을 알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그날 밤 영양왕의 꿈에, 처형당한 추남이 신라 서현 장군의 부인(만명 부인)의 품에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 추남이 신라에서 김유신으로 환생했다고 판단한 영양왕과 그 신하들은 백석을 시켜 김유신을 꾀어 죽이려 했던 것이다.
*
김춘추와 당태종이 ‘나당연합’을 할 때 ‘백제의 영토와 평양 이남의 고구려 땅’을 신라에 주기로 했다. 이 약속을 무시하고 당고종은 백제가 멸망하자 사비성에 ‘웅진도독부’를,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는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당나라에 편입시키려 했다. 그뿐만 아니라 신라를 나라로 인정하지 않고,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라 하고,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鷄林州大都督’으로 취급했다.
백제, 고구려는 물론이고 신라마저 지배하려는 야욕을 보였던 것이다. 문무왕은 외삼촌 김유신과 동맹 관계를 배반한 당나라와 끝까지 싸워 삼국통일을 이루기 위한 항쟁이 ‘7년 나당전쟁’이다.
신라는 3만의 군사와 고구려 부흥군들과 백성의 힘을 합쳐 한마음 일심으로 백제의 옛 땅을 되찾고, 설인귀가 이끄는 20만 대군을 공격해 매소성 전투와 기벌포 싸움에서 승리하여 당나라군을 완전히 이 땅에서 쫓아냈다.
삼국통일 과정에서 다른 것은 제쳐두고 고구려 땅 일부지만 대동강 이남을 신라가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김유신의 탁월한 혜안이었다.
당나라는 고구려 집권자 연개소문이 지병으로 죽자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면서 신라에게 많은 식량 지원을 요청한다. 다수의 신라 대신들은 당나라 소정방과 이적의 고구려 평양성 공격에 식량 지원하지 말 것을 주장하지만, 김유신은 반대의 의견으로 문무왕을 설득한다.
“폐하, 만약 지금 와서 우리가 나당연맹을 깨고 당나라를 지원하지 않을 경우, 고구려 땅 전부는 당나라 것이 될 것이고, 차후 우리 신라도 당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할 것입니다. 일단 지금은 나당연맹을 유지하면서, 우리의 힘을 길러 당나라 웅진도독부를 하루 빨리 이 땅에서 쫓아내어야 합니다.”
신라 김춘추는 발등에 떨어진 불인 백제의 공격을 막아내고 살아남기 위해서 먼저 나당연맹을 제안했다.
기록에는 당시 문무대왕은 당나라 주둔군, 웅진도독부 포함 20만의 식량과 의복을 제공하며, 신라 백성은 풀뿌리를 먹으며 당군의 식량을 지원한다며, 눈물을 흘리며 탄식했다.
김유신은 당이 밉지만 고구려 전투에 참전하여 고구려 땅 일부라고 찾을 명분을 찾아야 한다고 설파했다.
김유신은 직접 노구의 몸을 이끌고 1만의 군사로 수례 2천의 식량을 지원한다. 결국 고구려는 연개소문 아들들의 내란과 권력 다툼으로 스스로 자멸하고 만다. 김유신은 참전국의 자격으로 대동강 이남 땅과 고구려 유민 7천5백을 데리고 신라를 돌아온다.
삼국유사 기록에는 소정방이 김유신에게 사살되었다고 볼 수 있다는 대목 있다. 이후 20만 당군은 매소성(연천)에서 김유신의 잘 훈련된 3만과 일심으로 뭉친 신라 의병에게 연패하여 요동으로 쫓겨갔고, 급히 5만의 군사를 이끌고 서해 백강구로 상륙한 설인귀는 전멸하고 맙니다. 이후 중국의 역대 최대 부국강병이며 문화 선진국을 자랑하던 당나라는 멸망의 길로 들어서고 다시는 한반도 신라를 만만히 보지 못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