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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5.01.13 06:56
<부문2-5>
배은경 시인의 기억현상학적 시 쓰기
배은경 시인이 제2시집 『낙타의 저녁』(2015)을 낸지 7년 만에 제3시집『그리운 그루터기』(2022)를 낸다. 지금까지의 시에도 배 시인의 삶의 궤적이 간혹 나타나 있었으나 이번의 시집은 그의 삶 전체가 짙게 나타나 있다. 어쩌면 배 시인도 이제 60대를 넘어 70대로 가까워져 지난날을 뒤돌아보고 있다는 증거가 시 속에 녹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집 편집 순서와는 다르게 나타나 있으나 유년의 기억부터 대학 시절 그리고 결혼 이후의 30-50대 시절의 기억들이 작품의 군데군데 나타나 있다. 그 기억들을 어떻게 시로 형상화 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유년을 함께 하던 수정동, 수정산
마산완월초등, 부산중앙초등, 부산수성초등, 경남여중, 경남여고, 부산약대
경여중 앞 4-5미터 떨어진 골목 안
개천 돌아 나가는
우물을 끼고 앉은 기억자 기와집
해바라기와 무화과나무 사철너무로 울타리 치고
채송화 사루비아 다알리아 아마달리스 장미넝쿨 아아치로 꽃밭을 가꾸시던
아
버
지
새장 비둘기 곁
경여중 비둘긱가 날아와 깃들고
누렁이 토종개 에스
함
께
하
던
마루에 올라서면 멀리 혹은, 가까이 아스라이 바다가 보이고
오빠 둘 여동생 하나 남동생 하나
아이들 다섯 명과 엄마 아버지
아이들을 돌보아주던
엄마 전영옥 선생의 고모
건천할머니가
함
께
소박하고 소담하던
방 세 칸
수정산을 오르내리며 행복하고 다사로웠던 유년
그리움으로 돌아 봅니다
-「수정동」 앞 부분
인용시 「수정동」에서 우선 배 시인은 유년 시절부터 대학 시절의 공간들이 절제된 시어로 잘 제시하고 있다. 이 시의 전체적 구조로 볼 때에 배 시인이 어른이 된 시점에 어린 시절 살았던 수정동의 뒷산인 수정산을 오르내리며 유년의 기억을 순차적으로 되살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첫 연의 경우 한 행으로 수정산이라는 공간을 제시하면서 ‘유년을 함께 하던’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앞으로 시적 전개가 시간적 순서 즉 기억현상학에 의존할 것이라는 점이 예견되고 있다. 역시 한 행인 둘째 연의 경우 배 시인이 마산에서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다른 작품에서 전매서장인 것이 밝혀지고 있음)와 교사인 어머니와 함께 부산으로 전학을 와 3개 초등학교로 옮겨 다니다가 그 당시에는 명문이던 경남여중과 경남여고를 졸업하고 부산대 약대를 다닌 학력 사항이 제시되어 있다. 셋째 연의 경우는 세 행으로 살던 집의 위치와 구조를 간결하게 제시되어 있다. 이어서 넷째 연에서는 정원과 꽃밭을 가꾸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제시되어 있는데 아버지를 한 글자 한 행씩 총 3행으로 표현하여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형태주의 수법으로 극대화 하고 있다. 다섯째 연에서는 집에서 키우던 비둘기와 토종개를 제시하면서 그들과 함께 했다는 것을 강조하여 함/께/하/던으로 한 글자 한 행으로 하고 있다. 또 한 행인 여섯째 연에서는 마루에 올라서면 부산 앞 바다가 보인다고 하면서 그 기억이 가까이 보이기도 하고 멀리 보이기도 한다고 하여 불확실성을 암시하고 있다. 다음 일곱째 연에서는 배시인의 부모와 자신을 포함한 5남매, 교사로 출근하는 어머니 때문에 가사를 돌보는 어머니의 고모인 건천할머니가 하께 생활하였다는 점을 간략하게 밝히고 있다. 이 부분에서도 식구들이 함께했다는 것을 강조하여 ‘함/께’라고 한 글자 한 행으로 배치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주의 기법의 도입으로 유년 시절의 식구들과 집에서 기르던 동물까지 함께 하였던 것을 강조함으로써 유년 시절의 그리움이 간절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이렇게 많은 식구에도 불구하고 방 세 칸의 소박하고 소담했던 집이라는 것을 여덟째 연에서 밝히면서 인용한 부분의 미지막인 아홉째 연에서 비로소 그 시절에 대한 배 시인 자신의 정서를 ‘다사로웠던 유년’이라고 긍정적으로 인식하면서 그리워하고 있다.
인용하지 않은 뒷부분에서도 ‘수정동’을 배 시인 자신의 ‘정서적 고향’이라면서 좋다고 하고 있다. 이렇게 배 시인의 기억의 현상학은 밝고 긍정적으로 출발하고 있다.
유년을 보내던 수정동 달동네 언덕을 오르면
부산진 몰몬교회에 잇닿는 좁은 골목이 있습니다
작은 몰몬교회에서 영어회화를 목적으로 대학생들이 모여
선교사와 서툰 회화를 주고 받았습니다
서울대 연세대 부산대 이회여대…
앨 더 겜머는 왜 제게만 여러 질문 해댔던 걸까요
프리즈 미스 배
프리즈 미스 배
프리즈
눈빛 맑고 서늘하던 엘 더 겜 머는
지금 어디서 어떻게 늙어 있을까요
그립습니다
엘 더 겜 머가 그리운 것이 아니라
사무치게 아름다운 청춘의 흔적이 그립습니다
저무는 가을 쓸쓸하게 부는 다사로운 바람과 함께
수정동 달동네
잘 마른 낙엽 잎맥같이 소담한 나의 골목들
곳곳마다 묻어 있던 내 사유의 파편들
몇몇 대학생들
저의 귀갓길을 위해
함께 언덕을 올라 주었습니다
그들 중 누구에게도 안착하지 못하고 진주로 날아갔습니다
루멘인들
약대인들
사회인들
몰랐습니다
사랑이 무언지 통 몰랐습니다
-「몰랐습니다」 전문
인용 시 「몰랐습니다」의 경우는 유년 시절에서 한참 시간이 경과된 대학시절의 에피소드가 시적 제재로 되어 있다. 부산진 몰몬교회 선교사에게 서울대, 연세대, 부산대, 이화여대 대학생들이 아마 방학 때에 그 교회에서 영어회화를 배웠던 것 같다. 70년대 초반에는 이런 일들이 많았다. 그 가운데 셋째 연과 넷째 연의 몰몬 선교사에 대한 기억들은 이 작품의 전체적 구조로 볼 때 일종의 반전의 역할을 하고 있다. 배 시인은 선교사 엘 더 겜 머가 자신에게 관심이 집중되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그런 후 그 선교사가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늙어 가고 있을까요’라고 하면서 선교사에게 관심을 돌린다. 이렇게 되면 독자들은 배 시인이 혹시 선교사를 그리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배 시인은 그 다음 연인 다섯째 연에서 이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선교사가 그리운 것이 아니라 ‘ 사무치게 아름다운 청춘의 흔적’이 그립다고 하면서 다음 에피소드를 전개한다. 경남여중 근처의 자기 집과 달동네의 몰몬교회 사이를 몇몇 대학생들이 배 시인을 바래다준다는 핑계로 같이 걸었다고 회고 한다. 그러나 그 대학생들은 배 시인의 선택을 받지 못하고 필자의 5년 후배인 진주고등학교 출신인 현재의 남편 김영명 후배와 결혼하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어서 열거되는 루멘인들, 약대인들은 결혼하기 전에 만난 많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에게서는 사랑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이런 점에 이 작품은 배 시인의 ‘청춘의 흔적’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라고 볼 수 있다.
필자가 이렇게 계속 배 시인의 시집 해설을 하게 된 데에는 김영명 후배와의 인연과 그 헌신적이고 선량한 성품에서 필자가 감동한 탓도 있다. 배 시인은 고려대 법학과를 나온 김 후배와 결혼 후 후배의 대기업 직장 생활로 서울의 약국에 취업한 적도 있고 김 후배가 갑자기 직장을 그만두고 대리점 형식의 자영업을 할 때에는 너무나 많이 고생도 하였다. 그러다가 오래 전부터 오히려 김 후배가 배 시인의 정신적 상처와 약국 경영의 어려움을 뒷바라지 하면서 헌신하고 있는 점에서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필자는 감동하고 있다.
다음의 작품은 앞에서 말한 어려웠던 시절의 소회를 시로 형상화하한 작품이다.
하여
여름을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중3인 막내 데리고
광복절 날 해수욕을 하기로 하였다
부모가 자식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추억뿐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막내와는 아무런 추억을 함께 하지 못하였다
막내의 유치원 시절부터 시작된
우리 부부의 유랑 생활
삶의 곡예
전매서장의 딸로 교감 선생의 딸로 회사원의 아내로
43년을 살아온 나에게
남편의 퇴직은 청천벽력이었다
그날로부터 시작된 삶의 수레바퀴는
수십 년 써오던 일기를 절필하게 했고
내 기억의 앞뒤를 뒤섞어 버렸다
알콩달콩 잘 키워보려는 욕심으로
나 닮은 딸을 기도하며 얻은 일곱 살 딸아이는
졸지에 혼자 나 뒹굴게 되고
부부는 엘지 대리점으로 근무 약국으로 마른 낙엽처럼 몰려 다녔다
어미는 아이 옆에서 남편을 걱정하고
남편 옆에서는 아이를 걱정하며
아무 곳에서도 안주할 수 없었다
돌이켜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징그러운 사십대
차라리 죽고만 싶던 치욕의 사십대
모멸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고
내가 이렇게 고통스러워도
해가 뜨고 진다는 것을 깨달으며 나의 사십대가 갔다
-「해수욕」전반부
앞에서 언급한 대로 김 후배는 그 당시만 해도 좋은 직장이라는 대기업 LG전자에 근무하였다. 그러다가 어떠한 연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갑자기 퇴사한다. 그 때의 배 시인의 충격과 그 뒤의 분주한 삶의 모습을 앞에 인용한 「해수욕」의 셋째 연부터 여섯째 연까지 형상화하고 있다. 그러면서 일곱째 연과 여덟째 연에서 상처투성이 40대의 그 신산한 삶에 대한 현재의 소회를 시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 시는 첫째 연과 둘째 연에서 그러한 분주한 삶에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인 막내가 중학교 3학년이 된 여름 어느 날 그에게 추억이라도 만들어 주기 위하여 해운대 해수욕장에 갔던 기억부터 시작하여 셋째 연에서 과거회상으로 돌아간 구조로 되어 있다. 인용하지 않은 뒷부분에 그날 파도가 심하여 고생하였으며 오른 쪽 손목도 삐게 되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말하자면 막내에게 추억을 만들어주기 위하여 간 해수욕이 배 시인에게는 오히려 고통스러운 하루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고통을 이 시의 마지막 연에서 신앙으로 극복하고 있다. 그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주여!
제게 고난을 주시되 견딜 능력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참 인간이 되게 하시며
주님이 제게 주신 소명을 몸소 깨닫게 하시고
참으로 쓰임 받는데
두려움 없게 하옵소서
-「해수욕」 마지막 연
이렇게 젊은 날의 상처를 신앙으로 극복하고 큰 병마도 이겨낸 배 시인의 나이도 이제 60을 넘기고 70을 앞두고 있다. 지금은 과연 어떻게 일상을 보내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풀어줄 시 한편을 인용해 보기로 한다.
아침 산책길
낙엽 공중에 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놀라운 장면이라 가까이 다가가 보았습니다
거미줄이 노랑 낙엽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낙엽은 사선으로 길게 늘어진 거미줄에
손목 발목을 잡힌 채
바람 따라 핑글핑글 공중회전돌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잠깐 순간
노랑 낙엽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낙하마저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하는
창조주의 섭리를 보았습니다
얽히고설킨 인연의 거미줄
깨끗이 정리한 후라야 만날 수 있는 세상과의 별 리
십년 전 작별 없이 떠나려 하는 나를
지상으로 돌려놓은 건 다사로운 우정이었다는 것을
거미줄과 노랑 낙엽을 보며 깨달았습니다
예,
벗과 더불어
그분이 부르시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
서럽도록 아름다운 만추 즐기며 살겠습니다
무릇
지킬 것 중 가장 귀한 것은 마음의 중심이라 하셨으니
기쁨과 사랑으로
하루하루 소중하게 매만지며 살겠습니다.
-「다짐 2」 전문
인용시 「다짐 2」는 아침 산책길에 거미줄에 걸려 공중에서 회전돌기를 하고 있는 낙엽을 발견하고 그것을 통하여 배 시인 자신 특히 10년 전의 투병에서 회복하여 오늘날까지 살고 있는 의미와 앞으로의 삶의 지혜를 발견하는 작품이다 . 이 작품에서 배 시인의 사물에서 발견하는 삶의 지혜는 누구나 발견할 수 있는 인식의 과정은 아니다. 즉, 그가 오랫동안 시작을 해 왔기 때문에 발견한 소중한 선물이다. 따라서 그가 ‘어처구니없는 일’ 혹은 ‘황당한 일 벌리는 것’( 「詩作」)이라고 자조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시작행위는 결코 부질없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는 작품이 바로 이 작품이다. 필자는 이 작품에서 배 시인이 가지고 있는 신앙과 시작행위로 인하여 만년의 그의 삶이 더욱 원숙하고 보람 있을 것이라는 예감을 발견한다.